만 명의 여자
내 안에 만 명의 여자가 있어. 언젠가 연인이 내 안에 있는 여자 말고 다른 여자를 만나고 싶을까 봐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약속했다. 내 안에 만 명의 여자가 있다고, 다 만나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고, 그러니 한눈팔 생각을 하덜 말고 나하고 오래오래 있자고. 지금 생각하면 그건 유혹적이지 않고 공포스럽기 짝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잘도 했는지 알 길이 없다. 아무튼 그런 창피한 거짓말을 해서인지 나는 저주를 받게 되었다. 내 안에 정말로 만 명의 여자가 살게 된 것이다. 어깨 양쪽에 천사하고 악마 하나씩을 두고도 괴로워하는 캐릭터가 책에도 영화에도 그득그득한데, 만 명이라면 나는 어떻게 사람 구실을 해야 할까. 페미니즘을 처음 배웠을 때 찾아왔던 그 명징한 깨달음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 개인적인 상처와 어려움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사건들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차별과 착취의 구조 안에서 이해되기 시작한다. 거대하고 견고한 성을 이루는 작은 못으로서의 나를 본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못,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못의 끝나지 않는 연쇄를 직시한다. 우리는 기여하지 말고 균열이 되자. 우리는 이 성을 무너뜨리자. 각성은 강렬하고 연대는 쉬웠다.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첫 번째 증언이란 게 있다. 너무 많은 여자에게서 말해졌으나 나에게는 최초인 상태로 단어들이 흘러나온다. 우리의 증언은 포갤 수도 있을 만큼 닮았다. 어떤 증언은 넌더리가 나게 진부하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강렬하다. 그런 일치의 경험, 그리고 동일성의 경험 안에서 내 옆에 있는 여자의 손을 잡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탈육식과 동물해방운동
상품을 먹다 한 끼 한 알 삼시세끼 알약 세 알로 때웠으면 했던 시절이 있다. 밥이란 건, 하는 시간도 먹는 시간도 아깝다 생각한 젊은 날. 밥 하는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읽고, 더 쓰면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자. 그 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아니다. 텃밭 농사부터 매일 밥상 삼시세끼를 ‘내손내만’1 해먹는 사람이 되었다. 흙과 불과 물을 다루는 이 노동이 내 하는 일 중에 제일 근본이라 생각한다. 물론 귀찮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간단히 먹는다. 식사공동체의 협동 규칙도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한 사람에게만 독박으로 씌워진 의무라면 그건 강제노동이 되고 만다. 반대로 지루하고 반복적인 노동이라도 그 노동을 자기의 생활리듬 속에서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고, 같이 나눠 할 사람이 있고, 자연의 절기에 맞춰 변주하고 음미할 수 있으면 그것은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라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노동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선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게을러서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도, 공간도,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밥을 먹는 데는 소화기관만 필요한 게 아니다. 건강한 음식을 제대로 해 먹으려면 돈도 필요하고 마음의 여유도 필요하다. 날마다 일에 치여 녹초가 되고 안팎으로 가부장제 문화가 이토록 견고한데, 임금으로 돌아오는 노동의 기쁨도 느끼기 힘든 마당에 대가 없는 돌봄의 기쁨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는가. 그러다보니 창조적 활동으로서의 ‘요리’란 것은 돈 많고 시간 많은 유한계급의 과시적인 취미활동이 되어버렸다. 트렌드에 따라 유행하는 식문화는 계급적으로 ‘하류화’하면서 부유층의 미식 탐사부터 ‘프로페셔널 주부’의 중산층 집밥을 거쳐 정크푸드 먹방까지, 각종 상품 선전의 도구가 되어 인스타와 유튜브, 홈쇼핑으로 이어지는 푸드 포르노 산업을 떠받친다. 다들 이 음식 포르노의 관람자가 되어버린 것 같은 슬픈 풍경을 볼 때마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하는 ‘남이 차려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는 말은 남의 밥을 차리느라 자기를 돌보지 못하는 이들의 채워지지 않는 또다른 허기를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풍요가 넘치는 사회에서 만성화된 배고픔은 위장의 허기가 아니라 돌봄의 허기가 아닐까 하고. 지금 그 허기를 채워주는 것은 대부분 외식산업과 식품산업, 그리고 먹방과 음식 사진으로 채워진 문화적 소비생활이다. 그리고 반대편에, ‘그렇게 먹고 살고 싶지 않은’ 이들의 거부와 저항도 나타난다. 채식주의에도 그런 저항적 반(反)문화의 성격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비거니즘’은 먹거리의 시장화와 상품화가 극단화된 서구의 선진산업국가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는 사상이다. 풍요로운 문명에 대한 반성 또는 지루함의 반응으로.
친구(not kin)를 먹지 않기로 응답하기
1. 생존 은유 친구란 무엇인가? 아마 먹는 것은 아닐 것이다. 씹어 삼킨다는 의미에서 먹지 못할 것은 없겠지만 먹는 순간 나는 친구를 잃을 것이며, 세상 사람들에게 왜 친구를 먹었는지 해명하기 위해 평생을 소진해야 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친구라는 존재란 먹기엔 너무 소중하면서 동시에 참을 수 없을 만큼 거북하다.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 혹은 인간과 비인간 등 먹이 사슬의 계급을 뛰어넘는 우정에 대한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들을 전해 들은 바 있을 것이다. 어린이 대상 TV 애니메이션들은 많은 경우 동물이 조력자이거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몬스터 형태의 동물들은 인간의 언어로 말을 했고 또 어떤 것들의 언어는 상상 가능한 동물 특유의 소리로 재현되기도 했다. <디지몬 어드벤처>의 디지몬 파트너들이 인간의 말을 하는 것이 말이 되는지, <포켓몬스터>의 몬스터가 인간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정확한 고증인지 친구들과 진지하게 싸웠던 것은 인간 동물이 비인간 동물들과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며 삶을 공존하는 모델을 그럴싸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매우 인간적으로 쌓아온 앎과 경험 속에서 나는 낯선 존재들과 친구로 혹은 친족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이글은 도나 해러웨이 D. Haraway의 아름다운 은유와 말장난, 특히 “아기가 아닌 친족을 만들자 Make Kin Not Babies”라는 구호가 만들어내는 촘촘하고 느슨한 생태 정치 속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한다.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아기가 아닌 친족을 만들자”고 선언한다.1 이는 종차별에 대한 새로운 생태 정의를 위해 계통과 친족, 친족과 종으로 맺고 있는 끈끈한 연결들을 이종 간의 관계들로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이다.2 공-산 논의를 관통하는 주요한 키워드인 ‘반려종’은 두 개 이상의 종이 공-산 sympoiesis3하는 새로운 관계성이다. 해러웨이는 출산과 혼인 등 계보 혹은 법률관계를 통해 묶이는 관계 너머 인간과 오랜 시간 가까운 거리에서 공진화해온 개, 고양이, 새 등 반려동물뿐만 아니라 미생물까지 포함하는 차원에서 생명들의 연결을 포착하고자 한다. 해러웨이의 생태정치는 『사이보그 선언』과 『반려종 선언』 이후 환경위기의 원인을 인간종 전체로 돌리며 미래에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인류세 비판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심각한 환경파괴와 기후 위기 속에서 ‘아기가 아닌 친족 만들기’는 긴급 구호이자 요청이다. 개와 고양이와 같은 친밀한 동물들뿐만 아니라 만나본 바 없는,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종과 어떻게 친족을 맺어야 하는 걸까? ‘친족 만들기’는 ‘응답력 response-ability’을 요구한다. 다종 간의 관계 맺기 과정에서 다른 종을 이해하기는 매우 관계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응답하기 위해서 나에게 걸어오는 말들을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인간과 비인간 모두에게 다종과 관계 맺을 의무가 있다고 간주하지만, 책임의 무게에 차이를 뒀다.4 인간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응답력을 길러야 하고, ‘누가 어디에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가?’라는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촉수 tentacular를 세워야 한다고 말이다.
젖은 내가 말하도록 – 자꾸 저질러지는 우유 소비와 괴로운 암컷들에 관한 짧은 이야기
0. 여자가 얼마나 아플지 내가 잘 알지. 여자가 당한 일을 나도 당했으니까. “말하고 싶지 않지?” “나도 말하고 싶지 않았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했어.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그 끔찍한 일을 당하는 여자가 또 있으면 안 되니까.”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를 테니까.” “내가 참으라는 것은 아픔을 참으라는 뜻이지 말을 참으라는 뜻이 아니야.” “말해야 해. 그래야 사람들이 알지.”1 1. 젖 먹는 어른들 내가 어린이였을 때 우유 마시기를 싫어한 이유는 그게 남의 엄마 젖이기 때문이었다. 약간 더 자란 뒤에는 나한테도 젖이 있다는 사실이 더 크게 작용했다. 어린이로서 스스로의 젖을 마주하기란 아주 쉬웠다. 뛰놀다 땀을 식히려 선풍기 앞에서 티셔츠를 까 올릴 때, 목욕을 마치고 팬티만 입은 채 방바닥에 누워 있을 때, 젖꼭지는 무릎이나 손가락처럼 나에게 있었다. 거울을 보면 내 몸통은 작은 주홍빛 두 눈동자로 내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았고, 나는 언젠가 여기서 반투명한 우유가 방울방울 나온다면 그건 눈물 같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브래지어를 차기 시작하면서부터는 가슴을 가리는 데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나에게 젖이 있다는 사실을 잘 잊고 지냈다. 그것을 의식적으로 지향하기도 했다. 내 젖꼭지와 눈이 마주칠 일도 드물어졌고, 차차 그것을 무릎이나 손가락처럼 여기지도 않게 되었다. 우유 생산의 주체가 젖소가 아니라 기업이라고 생각하게 됐고, 눈물(진짜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날이면 치즈와 라떼와 생크림케이크로 스스로를 뚝 그치게 만드는 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꽤 오랫동안 나는 나 자신을 포함한 건장한 어른이 흰 우유를 마시고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에 흰 줄을 머금고 있는 장면을 목도하면 이 세상이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리고 무지막지하게 화가 났는데 그가 남의 엄마의 젖을 빨아먹고 있는 장면이 눈앞에 겹쳐지기 때문이었다. 생리를 시작하고, ‘가임기’ 여성이 된 후에는 종종 예의 그 ‘남의 엄마’ 얼굴에 내 얼굴이 겹쳐지기도 했다. 거리에서, 카페에서, 식당에서, 강의실에서, 사무실에서, 지하철에서 젖 먹는 어른들은 정말 많았고 나는 스스로를 포함한 그들 모두에게 온종일 젖을 물리느라 피로하고 또 피로했다.
파옥 : 비겁한 저항의 정치
1. 결박 피해자성에 매달리는 것을 좋아한다. 피해자성 뒤에 숨어 비겁하게 굴며 사람들에게 용서받으면 특별 대우를 받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피해자성에 천착하는 비겁함은 한평생 내 삶 정치 그 자체였다. 배움을 통해 언어가 흘러들어오는 만큼 고통에 붙일 수 있는 이름표도 늘어났다. 내 서사를 조각내 불쌍하게 편집해서 재현하면 사람들은 나를 환대해주고, 연민해줬다. 가해자성을 표백한 채 피해자로서 얻어내는 환대는 중독적이었다. 그건 내 몸을 가지고 획득할 수 있는 최고의 자원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내 피해자성이 수용되지 않는 개념을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그게 바로 동물권이다. 집 근처 분식점에 똥개라고 불리는 ‘나리’가 살고 있다. 가게 앞에 나리가 앉아 있으면 “안녕?”하고 그의 눈높이에 맞춰 인사를 건다. 나리는 나에게 관심이 별로 없는데, 그 무관심이 반가우면서 어쩐지 섭섭한 기분이 든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땐 길거리에서 만난 강아지들이 항상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독립하면서부터는 어떤 강아지도 딱히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내게서 더는 ‘개 냄새’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몸에서 냄새가 난다고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개 냄새 때문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나는 열 평짜리 지하 방에서 강아지 서른 마리와 10년째 살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애니멀 호더’였다. 아빠가 도박으로 생긴 빚을 우리에게 떠넘기고 줄행랑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에는 강아지가 없었다. 엄마는 치매와 시각장애가 동시에 온 외할머니와 10살도 되지 않은 나를 비정규직 노동으로 홀로 돌보면서 굳건한 다짐을 하나 했다. 그건 바로 ‘사람을 믿느니 차라리 강아지와 평생 살겠다’라는 것이었다. 엄마는 다짐과 실천을 동시에 했다. 외로운 마음을 달래고 싶었던 건지, 집구석에 붙어있을 명목을 찾고 싶었던 건지, 어디서 똥개 한 마리와 유기견 한 마리를 데려와 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우리 집에는 2마리의 강아지와 세 명의 사람이 살게 되었다.
기니피그 키우는 얘기
나와 함께 사는 기니피그 두 마리는 털이 복슬복슬한 고구마 덩어리처럼 생겼다. 티라미수와 인절미라는 어엿한 이름이 있긴 하지만, 나는 그들을 대충 털고구마 새끼들이라고 묶어 부르곤 한다. 입에 특등품 블루베리를 물려주거나 발밑에 푹신한 새 베딩을 깔아주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온 몸으로 삑 뾱 삑 삑 뛰어오르는 털고구마 새끼들! ‘터질 듯한 기쁨’이라는 말은 저런 몸짓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졌음이 틀림없다. 털고구마들─티라미수와 인절미─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며 한 방에서 생활한 지 어언 5년째, 그들은 이제 다른 인간과 나를 구분할 줄 안다. 내 발소리만 들어도 알아보고 반가워할 정도다. 병원 등 낯선 곳에서 기니피그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두려운 상황에 처할 때마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찾고, 나를 부르는 소리를 내고, 내 쪽으로 달려와 품 안에 파고들며 안긴다. 그렇게 다가오는 털고구마의 표정에는 저 인간이 내 인간이라는 확신이 깃들어 있다. 가장 못된 악당이라도 배반하기 껄끄러울 이 대단한 믿음 앞에서, 사랑이 아닌 마음을 꺼내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들을 원한 적이 없었다. 사실 기니피그에 관한 그 어떤 생각도 해본 적 없다. 그냥 어쩌다 보니까 어느 날 갑자기 상상도 못했던 방식으로 덜컥 기니피그를 가지게 되었다. 이미 비건지향 페미니스트로 정체화 한 후였기 때문에, 어디 갖다 버리거나 ‘환불’하는 처리는 어줍잖은 윤리 의식이 허락하지 않았다. 입양 또한 입양을 기다리는 기존 유기 기니피그 숫자를 고려했을 때 가능하지 않은 선택지라고 느꼈다.
어쩌다 유기농, 우연한 생태적 인간
내가 유기농업을 공부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좋은 걸 공부한다고 칭찬한다. 더러는 전망이 좋아서 하는 거냐고 묻기도 한다. 정작 내가 유기농업을 시작한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내가 너무 잘 먹으니까, 나를 먹여 살리려면 직접 농업을 배우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을뿐이다. 기왕이면 유기농업으로. 건강한 거 길러 먹으면 좋으니까. 지구에 대한 사명감이나 세상을 꿰뚫는 통찰력 같은 건 없었다. 농부학교에는 생태적인 삶에 대한 고민이나, 부모님의 권유 때문에 농사를 지으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나같은 이유로 농사를 지으러 온 사람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었다. 내가 먹을 걸 기르는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애착도 욕심도 금방 커져서 지금까지 농업을 하고 있다. 같이 입학했던 사람들 중에 아직까지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나뿐이다. 비거니즘의 개념도 유기농업을 공부하면서 새로 알았다. 개인의 건강을 위해 고기를 줄이거나 끊는 식습관의 변화, 즉 채식이 비거니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 비거니즘은 환경과 지구를 생각하며 전반적인 삶의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비거니즘이라는 삶의 방식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실천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농업 종사자로서 비거니즘적 실천의 현실성에도 의문을 품고 있었다. 농업이 산업화 되면서 생겨난 문제가 분명히 있고, 가축이 공장의 물건처럼 취급당하고 있는 현실 또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것 역시 산업의 일부분이므로 어느 정도까지는 감수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다 호주를 오기 전 꽤나 오랜 기간동안 비건 지향을 해 온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100명이 주말 동안만 고기를 먹지 않아도, 내가 1년 동안 철저하게 비건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동물을 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참신한 관점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비건이 굳건한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만 가능한 고된 수행에 가깝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나는 소극적 채식의 힘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됐다. 비거니즘의 개념도 유기농업을 공부하면서 새로 알았다. 개인의 건강을 위해 고기를 줄이거나 끊는 식습관의 변화, 즉 채식이 비거니즘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 비거니즘은 환경과 지구를 생각하며 전반적인 삶의 방식 자체를 변화시키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비거니즘이라는 삶의 방식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실천할 엄두는 나지 않았다. 농업 종사자로서 비거니즘적 실천의 현실성에도 의문을 품고 있었다. 농업이 산업화 되면서 생겨난 문제가 분명히 있고, 가축이 공장의 물건처럼 취급당하고 있는 현실 또한 개선이 필요하다는 점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것 역시 산업의 일부분이므로 어느 정도까지는 감수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다 호주를 오기 전 꽤나 오랜 기간동안 비건 지향을 해 온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100명이 주말 동안만 고기를 먹지 않아도, 내가 1년 동안 철저하게 비건하는 것보다 더 많은 동물을 살릴 것’이라고 말했다. 참신한 관점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비건이 굳건한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만 가능한 고된 수행에 가깝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나는 소극적 채식의 힘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됐다.
#나의비거니즘일기
1. 비거니즘을 시작하기 고기를 먹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 한 해 동안 구제역 사태가 발생해 돼지 172,721 마리가 산 채로 매장당해 죽었다. 나는 마침 홀로코스트와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공부하고 있었다. 많은 존재가 아팠고, 아파하다가 죽었다. 나를 둘러싼 공기가 답답했다. 자꾸만 무엇인가 잘못되어가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학교 선생은 교단에 서서 불의에 저항해야 한다고 가르치면서도, 학교 안팎에서 일어나는 불의에 관해서는 졸업할 때까지만 참으라고 타일렀다. 졸업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고들 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졸업 후에도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누군가는 계속 아파하고 있다. 아파하다가 죽는다. 그리고 나는 평생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만약 내가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없다면, 최소한 남을 해하지는 말자. 동물을 먹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자. 나의 비건 실천은 그렇게 단 하룻밤 만에 결정됐다. 이 ‘저항’은 아주 사소하고 소심한 것이어서, 지극히 개인적인 수준에 머물렀다. 나는 선생과 친구에게 고기를 먹지 않을 것임을 선언했다. 급식을 아예 먹을 수 없는 날에는 말린 고구마나 밤을 가져와서 먹었다. 먹을 수 있는 음식이 극히 적어졌지만, 어차피 할 수 있는 일보다 없는 일이 더 많은 고등학생이었던 내게 자유의 제한은 익숙했다. 아니, 이런 제한이 오히려 해방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을 어떻게 먹을지, 언제 쉬고 화장실에 갈지 전부 정해져 들이밀어지는 환경에서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내가 직접 선택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이나 동급생이 채식을 조롱해도 의기양양했다. 생활이 불편해지고 소외를 겪을수록 가해자성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듯한 착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처음 채식을 시작했을 당시에는 비건이라는 말도 몰랐고, 다른 채식인의 존재도 몰랐다. 조금씩 채식에 대해 공부하며 비거니즘의 세계를 발견해 나갔다. 내가 가진 분노의 근거를 확인받는 희열을 느끼기도 했고, 내 세계의 협소함에 깊은 부끄러움과 반성을 느끼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동물권 운동, 장애인권 운동, 페미니즘 등을 함께 접하며 내 세상을 확장하고 다른 이의 세상과 연결되는 기쁨도 누렸다. 대학 진학 후에는 더욱 본격적인 비건지향을 실천했다. 그때는 비건지향인을 만나기가 굉장히 어려워서, 비건식당에서 처음 보는 사람과도 연락처를 교환하며 친해지곤 했다. 비건이라는 이유만으로 초면인 나를 집까지 초대해서 손수 요리를 해준 베트남 친구들과 중국 친구들이 생각난다. 그들이 바리바리 들려 보내준 라면과 과자의 맛을 기억한다.
끝말잇기
1. 채식을 시작한 것은 우와 헤어진 이후였다. 사는 게 쉬워지자 삶의 난이도가 무지 낮아졌다고 느꼈다. 이렇게 편해도 되나 싶었던 것이다. 그 무렵 나는 번드르르한 삶이 욕심나서 나의 가장 귀한 일부를 헐값에 팔아먹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혼자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고 사랑하는 우를 내다버렸다고. 우와 지내는 것은 여러모로 복잡하여 몇 마디 말로 줄이기엔 곤란하다. 우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근육병과 함께 자랐다. 근육병은 평생에 걸쳐 근육이 죽고 관절이 굳는 희귀난치성 질환으로 지체장애를 동반한다. 우는 집안에서는 수동휠체어를 타고 집밖에서는 전동휠체어를 타고 생활했다. 우의 몸은 크고작은 도움을 필요로 했으므로 오 년간 우리는 집약적으로 함께 있었고 매일매일 서로를 돌보았다. 기억나는 곤욕이 있다면 대개 이동이나 접근의 문제들이다. 오지 않는 장애인콜택시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밤을 새던 일, 저상버스를 타려고 같은 노선의 버스를 몇 차례고 그냥 보내던 일, 그렇게 기다려서 탄 버스의 휠체어 리프트가 고장나 오도가도 못하던 일, 어디에도 없는 장애인화장실을 찾아 공원으로 전철역으로 함께 뛰어가던 일. 우의 탓도 내 탓도 아닌 일들이었지만 단련되고 무뎌져야 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었다. 먹는 일에 관해서만큼은 유달리 고달팠다. 전동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가게는 많지 않았다. 초행길의 경우 우리가 밥을 먹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거의 우연에 달려있었다. 우리는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게들만을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매번 제일 좋아하는 것들을 시켰고 먹는 데 돈을 안 아꼈다. 엥겔지수가 높은 삶이었다. 그 끼니들이 주는 포만감은 어딘지 착잡해서 우리는 자주 배가 아팠다. 우리는 남자 장애인화장실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한 명은 변기에 한 명은 전동휠체어에 오도카니 앉아 통증이 가시기를 기다리던 나날들. 그럴 때 우리는 자주 끝말잇기를 했다. 좀체 서로를 이길 생각이 없는 끝말잇기였다. 어쩌다가 ‘산기슭’이나 ‘나트륨’으로 상대를 끝장낼 기회가 와도 다른 재미없는 단어를 고르는. 혹은 ‘슭이로운 생활’이나 ‘륨어티스 관절염’으로 위기를 모면하는. 그러면 머리를 맞댄 채 승인여부를 근엄하게 검토하곤 어쩔 수 없다는 듯 또다른 지루한 단어를 찾아나서는. 얼렁뚱땅 멎었다가도 어물쩡 재개되곤 하던 무료하고 끊임없고 영원한 놀이.
비건은 인간중심주의와 종차별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의 범세계적 대유행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인간이 동물과 맺어 온 ‘잘못된’ 관계의 민낯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하나의 사건이었다. 대규모 공장식 축산업을 위한 무분별한 개간과 벌목은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단일 가축 사육으로 인해 면역력이 취약해진 축산농장 동물이 서식지를 잃은 야생동물과 접촉하면서, 기존 병원균의 유전자 재조합이 발생, 치명적인 병독성을 가진 바이러스가 탄생한다.1 이렇게 진화한 고위험군 바이러스는 농부들을 거쳐 다양한 인간 집단을 감염시키고, “무역과 여행의 전 지구적 연결망”2을 경유해 세계 곳곳으로 빠르게 확산된다.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견된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 SARS-CoV-2가 해당 지역에 영향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팬데믹 상황까지 야기한 기원에는 공장식 축산업으로 대변되는, 인간이 동물을 ‘착취’해 온 오랜 역사가 존재한다. 비거니즘은 이 같은 비인간 동물에 대한 구조적 착취의 역사에 종언을 고하고자 하는 정치적 실천이며 집단적 운동이다. 이처럼 비인간 동물과의 ‘좋은’ 관계 맺기의 양식을 새롭게 재/발명하려는 윤리-정치적 의도에서 비거니즘을 실천하는 이들은 인간중심주의와 종차별주의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해 왔다.3 그러나 이 둘로부터 완벽히 벗어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 이 물음에 대답하기 위해, 나는 1990년대 미국 페미니즘 학술장에서의 한 논쟁을 경유하고자 한다. 1994년, 조지(Kathryn Paxton George)는 「페미니스트는 채식주의자여야 하는가?(Should Feminists Be Vegetarian?)」라는 문제적인 글을 통해, 싱어(Peter Singer)의 공리주의 논변과 레건(Tom Regan)의 권리이론 논변을 검토하면서, 양자가 공히 주장하는 윤리적 채식주의란 결코 페미니즘의 이상(ideal)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조지가 문제 삼는 것은 윤리적 채식주의가 가지는 보편주의적 경향이다. 한국어 사용자에게 상대적으로 접근이 용이한 텍스트인 싱어의 『동물 해방(Animal Liberation)』4을 예로 들어 보자. 싱어는 어떤 동물에게 쾌고감수능력(sentience)이 있다면 그 동물 역시 인간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며, 그렇다고 할 때 동물에게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는 일체의 행위, 예컨대 공장식 축산업을 통해 생산된 고기를 섭취하는 행위 등은 금지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때 내가 ‘불필요한’이라는 구절을 강조한 까닭은 싱어가 모든 종류의 동물 소비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조지의 말처럼, “싱어의 공리주의적 방법은 어떤 동물 그리고/또는 인간이 더 큰 선(善)을 위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를 승인한다. 그러나 [동시에] 싱어는 고기나 동물성 제품을 사용할 진정한 필요(와 복지 이해)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결국] 윤리적 채식주의를 주장한다.”5 싱어의 이러한 논의를 복기하며 조지가 되묻고자 하는 것은 이 “우리”가 과연 누구의 얼굴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OFF 특집호 기획의 말: 친구의 표정
1. 당신에게는 재수없고 짜증나는 비건 친구 한 명이 있다. 그는 곁들이 소스의 정체가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멀쩡한 음식이 담긴 접시를 벌써 두 번이나 돌려보낸 참이다. 소비자주의에 경도된 그가 하는 운동이란 사실상 불매가 전부인데, 그중에서도 악랄한 식당 리뷰 남기기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다. 그는 왜 한번이라도 성실하게 밥벌이 하는 자영업자의 입장에 서려고 노력하지 않는 걸까! 개와 고양이와 소와 돼지, 심지어 저멀리 아마존의 빛깔 고운 새의 마음까지도 환하게 들여다보인다는 그가, 유독 인간의 고통과 처지에 이토록 무심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대부분의 음식 앞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굶기를 택하는 그는 저 텅 빈 속으로 야만적이라든지, 미개하다든지, 비위생적이라든지, 고통에 무감하고 식욕을 자제할 줄 모른다든지 하는 식의 부당한 평가를 당신에게 내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그의 믿음이 경제적, 문화적, 사상적, 영적 가난을 배척하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라는 점을 알고 있을까? 항간에는 그가 모퉁이를 돌고 집으로 들어가 혼자가 되는 순간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본 이웃이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기도 한다. 2. 이것은 부당한 험담이다. 그런데 이러한 험담이 외부에서 비건 지향인에게 쏟아질 뿐 아니라, 비건 지향인의 내면에서도 시끄럽게 번성한다면, 우리는 저 무도하고 모욕적인 의심에 응수하기 위해서 어디에도 그런 비건은 없다고 단정해도 좋은 것일까? 비거니즘에 대한 날선 공격을 불식시키기 위한 재반박의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 비건 개인이 스스로에게 퍼붓는 자책과 검열의 말까지 묵과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다시 말해 비건들이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수준의 윤리적 결백을 증명하는 데 에너지를 소진한 나머지, 일상 속 비건 실천의 실패와 시행착오를 서로 공유할 힘이 남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페미니즘과 반달리즘: 예술 노동자 그 미만에서
「페미니즘, 예술, 그리고 역설Feminism, Art, Contradictions」에서 안젤라 디미트라카키(Angela Dimitrakaki)는 "페미니스트 정치와 투쟁을 불신용하고 배제하는 것을 여성 예술가의 작업들을 포함함으로서 보상하려는"1 영미권 현대 미술의 경향성을 살피고, 예술 노동자란 규정이 집약하는 전문가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여성 예술가들이 맹렬히 투쟁해온 역사가 도리어 급진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페미니즘 실천을 방해하게 된 역설을 분석한다. 2010년대 테이트 미술관이 체계적인 노동자 착취, 자연 파괴와 아파르트헤이트의 기여로 악명이 높은 석유 회사 BP의 후원을 받으면서 흑인 여성 예술가와 노동자 계급 출신 여성 예술가들 중심의 기획 전시를 열었던 것이 대표적이다.
걸그룹 팬픽이 레즈비언 문학이 되기까지
판도라티비에서 320P 저화질에 싱크도 맞지 않는 한글 자막으로 <엘워드 L-Word>를 보던 때가 있었다. 바싹 말라 괴상한 머리를 한 채로 수많은 여자들과 섹스를 하는 쉐인을 보면서 어린 나는 ‘레즈비언’이란 어떤 막연한 존재에 대한 상을 그리곤 했다. 십대 중반이던 당시의 내가 아는 레즈비언은 같은 반 부치 친구가 데리고 가준 일차1의 레즈비언들과 판도라티비 속 <엘워드 >의 레즈비언이 전부였다. 불과 십여 년 전만해도 청소년 레즈비언이 접할 수 있던 레즈비언 픽션은 몇 존재하지 않았고, 아주 어린 시절부터 레즈비언 이야기에 탐닉했던 나는 요상한 태국 퀴어 영화와 더 요상한 일본 백합만화들을 보며 레즈비언 이야기를 보고 싶은 욕망을 채우곤 했다. 내가 소녀시대 팬픽을 본 것도 그 때쯤이었다. 소녀시대는 2009년 <Gee >가 크기 인기를 얻으며 이후 인기 걸그룹의 반열에 올랐는데,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그 때의 인기 덕에 팬덤 또한 크게 세를 불렸다. 인기 있는 그룹이 그렇듯 소녀시대 역시 RPS(‘Real Person Slash’의 줄임말로 실제 존재하는 인물들을 로맨스·섹슈얼한 관계로 해석하는 일종의 팬덤 문화) 팬덤의 규모가 컸고 여성 팬들도 많았다. 십대 청소년이던 나는 소녀시대 멤버들의 생일에만 가입을 받는다는 유명 팬픽 카페에 가입해 내 전자사전을 명작 팬픽들로 가득 채워 밤낮없이 읽곤 했다. 소녀시대 RPS 팬덤은 지금도 걸그룹 팬들에게는 요순시대에 비유되는 번창했던 시기로 HOT, 젝스키스 시절부터 여성 팬덤 문화의 일부로 평가 받던 보이그룹 팬픽과 달리 주목받지 못했던 걸그룹 팬픽이 처음으로 조명받던 시기기도 하다.
도둑 맞은 ‘D’에 관한 세미나 : 《보잭 홀스맨》과 ‘할리우’
리뷰를 더 심오하게 시작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애니메이션 시트콤 《보잭 홀스맨》1의 클로징 사운드트랙만큼 이 작품을 투명하게 드러낼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짧은 노래는 《보잭 홀스맨》과 주인공 보잭의 기본적인 특징들을 농축한다. “90년대 시절 나는 아주 유명한 TV쇼에 나왔어 (아아-) / 나는 보잭이라는 말(보잭!), 보잭이라는 말이라네, 모르는 척 하기는 / 나는 계속 과거에 기대보지만 너무 오래 전이야, 계속 잘나갈 순 없겠지 / 그저 나는 알려주고 싶었어 / 나는 인간보단 말에 가까워, 아님 말보단 인간에 가깝나 (보잭!)” 먼저 보잭 홀스맨은 홀스-맨, 그러니까 사람이면서 동시에 말이다. 보잭 말고도 《보잭 홀스맨》에는 여러 종의 개, 고양이에서부터 곤충, 어류, 갑각류, 절지동물에 이르는 온갖 생물들이 인간 행세를 하며 등장한다. 이 기이한 ‘멜팅팟’ 속에서 인물들은 얼굴만 동물인 ‘인간’이 아니라, 동물로서의 습성을 적극적으로 유지하는 ‘동물-인간’으로서 살아간다. 예컨대 말(보잭)은 많이 먹고, 개(Mr.피넛버터)는 초인종 소리와 공놀이에 흥분하며, 고양이(프린세스 캐롤린)는 그루밍한다.
일반 행동
/ : 이 시점에 다음 대사가 끼어 든다. // : 끊고 들어온다 희수 P 의사 비가 온다. 무대를 십자로 4등분 했을 때, 오른쪽 위 방향 무대는 막혀있다. 조명은 어두컴컴하다. 희수는 오른쪽 위 방향의 막혀 있는 무대에 설치된 문을 열고 들어온다. P는 방에 앉아서 손에 폰을 들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 희수: 저기요, 들어왔어요? P: ... 희수: 들어왔으면 대답 좀 해요! P: ... 희수: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요? P: ... 희수, 다리에 힘이 풀리며 털썩 주저앉는다. 희수: 도통, 영문을 모르겠네..... / 왜 이러는 건지..... P: 난 알아. P의 말을 듣고 희수는 P를 찢어 죽일 듯이 노려본다. 희수: 그래, 당신은 항상 알지! 나는 모르고!/ P: 아니, 그런 식으로 아는 게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