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F 특집호 기획의 말: 친구의 표정






1.

당신에게는 재수없고 짜증나는 비건 친구 한 명이 있다. 그는 곁들이 소스의 정체가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멀쩡한 음식이 담긴 접시를 벌써 두 번이나 돌려보낸 참이다. 소비자주의에 경도된 그가 하는 운동이란 사실상 불매가 전부인데, 그중에서도 악랄한 식당 리뷰 남기기는 그가 가장 좋아하는 취미다. 그는 왜 한번이라도 성실하게 밥벌이 하는 자영업자의 입장에 서려고 노력하지 않는 걸까! 개와 고양이와 소와 돼지, 심지어 저멀리 아마존의 빛깔 고운 새의 마음까지도 환하게 들여다보인다는 그가, 유독 인간의 고통과 처지에 이토록 무심한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대부분의 음식 앞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굶기를 택하는 그는 저 텅 빈 속으로 야만적이라든지, 미개하다든지, 비위생적이라든지, 고통에 무감하고 식욕을 자제할 줄 모른다든지 하는 식의 부당한 평가를 당신에게 내리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는 그의 믿음이 경제적, 문화적, 사상적, 영적 가난을 배척하는 결과로 이어질 뿐이라는 점을 알고 있을까? 항간에는 그가 모퉁이를 돌고 집으로 들어가 혼자가 되는 순간 게걸스럽게 고기를 먹는 모습을 본 이웃이 있다는 소문이 전해지기도 한다.





2.

이것은 부당한 험담이다.


그런데 이러한 험담이 외부에서 비건 지향인에게 쏟아질 뿐 아니라, 비건 지향인의 내면에서도 시끄럽게 번성한다면, 우리는 저 무도하고 모욕적인 의심에 응수하기 위해서 어디에도 그런 비건은 없다고 단정해도 좋은 것일까? 비거니즘에 대한 날선 공격을 불식시키기 위한 재반박의 근거를 마련하는 일이, 비건 개인이 스스로에게 퍼붓는 자책과 검열의 말까지 묵과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면? 다시 말해 비건들이 도무지 가능하지 않은 수준의 윤리적 결백을 증명하는 데 에너지를 소진한 나머지, 일상 속 비건 실천의 실패와 시행착오를 서로 공유할 힘이 남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종말론에 심취한 비건, 동물에게 자기를 투사하는 비건, 고기를 먹지 않는 날보다 고기를 먹는 날이 더 많은 비건, 윤리적 우월감을 즐겨버리고 만 비건, 손쉽게 인류애를 저버리는 비건, 잠재적 동료를 주눅들게 하는 비건, 다양한 꼴불견의 비건이 아마 어딘가에는 실존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비건으로 의심받는 일을 힘주어 불쾌해 하거나 불안해 해야 할까? 비건이 인간인 한, 어떤 비건도 인간 이상으로 또는 인간 이하로 실패하지는 않을 것이라면. 그러므로 유독 비건에게 무적의 이론과 흠잡을 데 없는 실천을 요구하는 일이 부당하다는 데 동의한다면, 우리는 좀 더 편안하게 비건이 되는 일의 슬픔과 어려움에 대해서도 말해보아도 좋지 않을까?


매거진 OFF의 특집 기획, <친구의 표정>에서 우리는 보다 적극적으로 비건 동료들에게 “실패할 기회”를 주고자 했다. 내부 분열을 맞닥뜨리기, 자기 모순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세상의 여느 이야기가 그렇듯 이곳에도 치명적인 설정 충돌이 있음을 우스워하기, 비약에 너그러워지기, 도리어 그것이 비거니즘이 음모론은 아니라는 증거가 아니겠냐고 주장해버리기. 필연적으로 비거니즘은 실패와 용서의 장르다. 인간이 인간에게 너그러운 날에 우리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내일의 실천을 기약한다. 인간이 인간에게 엄한 날에 우리는 내일도 실천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용서하라고 명령한다. 비거니즘은 조직적인 동물 학대 및 착취의 역사로부터 개인을 건져내 표백시키고 면죄부를 쥐여주기 위한 운동이 아니다. 비거니즘은 당사자-동물의 언어를 번역하기에 연대자-인간의 자원이 지극히 빈약하다는 사실을 매순간 인지하는 운동이다. 용서를 알아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지기도 전에 서툴게 사과해보는 운동이다.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벌써 실패를 사랑할 참이냐고, 그것이야말로 인간중심적인 작업이 아니겠느냐고 물을 수도 있다. 한때는 걱정과 죄의식을 즐기는 사람들이 꾸며낸 음모론 취급을 받았지만, 이제는 매일 살갗으로 감각하는 현실이 된 기후위기 또한 인간에게나 의미가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동식물의 절멸, 빙하의 붕괴, 산과 들의 소실, 끓는 바다와 죽은 조개들의 벌판에 관해 지구의 입장이란 게 존재할 리 없다고. 가치중립적인 행성의 입장에서 생태계의 균형과 종평등이라는 상태가 기후재앙의 상태보다 특별히 나쁘거나 좋을 리 없으므로, 비거니즘은 역시 지독하게 인간만의 일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다. 그 편도 그리 나쁘지 않다. 비거니즘이 철저하게 인간적이기 때문에 비로소 마음을 움직여 보려는 사람이 또한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 시대의 인간은 동료를 가릴 처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3.

비거니즘의 이론적 정합성을 확보하느라 분주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과는 별개로, 비건이 비건이 된 계기에는 대개 지극히 사적이고 비논리적인 우정과 사랑의 경험이 있다. 사랑하는 비인간동물 가족의 눈을 지나치게 오래 응시하고 말았다든지, 정을 붙여 키우던 식물이 갑작스레 문드러져 죽었다든지, 어느 날 친구가 정육점 앞에서 눈을 질끈 감는 것을 보았다든지 하는, 이토록 시시한 찰나에 한 명의 비건이 더 생겨나고는 한다.


그러므로 동물의 고통과 인간의 고통을 같게 볼 것인지, 만약 쾌고감수능력의 크기를 기준으로 모든 동물종에 번호를 매겨 줄세운다면 몇 번부터가 먹어도 되는 동물인지, 식물은 고통을 느낀다고 할 수 있을지 아닐지, 엄격한 채식으로도 필수 단백질을 다 충당할 수 있을지, 세상엔 행복한 돼지도 있고 슬픈 깻잎도 있는 게 아닐지 그런 탁상공론을 혼자서 다 매듭짓고 나서야 비건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도무지 잊히지 않는 친구의 표정 때문에 고기 먹기를 주저하고 나서야, 우리가 왜 도대체 그 표정을 잊을 수 없었는지를 고민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이상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선언이 급진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언제나 이상하게 느껴진다. 비건은 이미 결정했기 때문에 되는 게 아니라, 아직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되는 게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비거니즘은 식물 먹기가 아니고 동물 먹지 않기이다. 그들은 무언갈 하는 게 아니고, 도리어 하지 않는다. 비건은 결정을 보류하고 판단을 중지한다. 그들은 내일 뭘 먹어야 할지 확신하는 사람들이기보다는, 어제 먹은 것을 되새김질하고 오늘 먹을 것 앞에서 우물쭈물하는 우유부단한 사람들에 가깝다. 아마도 내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친구의 표정이, 친구인 개의 표정이, 친구인 개의 친구의 표정이, 그의 마음 속에서 모래알처럼 자분자분 씹히기 때문에.


그렇다면 이렇게 하는 것도 가능할까? 우리가 더 많은 비건 친구를 데려온다면, 그렇다면 드디어 당신을 신경쓰이게 하는 일도 가능할까? 이토록 가지가지인 우정의 표정으로 당신을 따뜻하게 옭아매는 일이 가능할까? 





4.

하은빈은 다른 몸을 소화 중인 ‘더부룩한 배’로 사랑의 실패에 골몰한다. 서로의 존재를 고통으로 접붙이자,  사랑의 근육은 도리어 마모되고 짧아졌다. 그는 ‘미안해서’ 비건이 되었음에도, 살아있어서 미안하다고 느끼는 일만으로는 존재와 존재를 이을 수 없었음을 고백하면서, 지난 사랑이 가르쳐준 ‘잔잔바리적 수완’을 통해 수치심에 함몰된 입을 바깥으로 건져낸다. 그는 단어를 건네고, 다음 단어를 기다린다. 하은빈의 간절한 종결어미를 백종륜이 이어받는다. 백종륜은 역사적으로 보편의 지위를 부여받았던 ‘우리’ 인간들이 떠난 ‘인간중심주의’의 자리에, 여태껏 ‘우리’로도 인정받지 못했던 ‘하위 인간’들이 ‘도덕적 하층민’으로서 남아있게 되는 상황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동시에 그러한 맥락적 비거니즘이 인간은 언제든 맥락에 따라 비인간동물을 착취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편리하게 오해되는 반동적 결론 또한 막아선다. 백종륜이 지적하듯이, 비거니즘이 이쪽의 고통을 저쪽으로 옮겨놓을 뿐인 ‘고통의 제로섬 게임’이 아닌 이상, ‘우리’는 ‘무지가 아니라 미지를 받아들이는 겸손의 윤리’를 통해 새로운 비거니즘의 정치와 윤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하은빈이 제안한 바 우리가 서로를 결코 끝장내지 않는 법은 ‘아직’ 알지 못하는 너의 말을 심심히 기다리는 일뿐이므로, 이러한 겸손의 윤리를 우리는 ‘끝말잇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현호정에게 암컷 공통의 젖은 한 종이 다른 종의 젖을 착취하는 일을 고통으로 감각하게 하는 기관이다. 동시에 그가 ‘자꾸만 저질러지는 우유 소비’를 비난할 수도, 비난하지 않을 수도 없는 딜레마에 처하게 되는 것 또한 이 공통의 젖 때문이다. 공장식 축산업의 촘촘한 기획 안에서, 남의 젖도 먹지 않고 제 살도 깎아 먹지 않는 일은 외줄 타기처럼 불가능하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쌀알같이 단단하고 희끗하게 빛나는 맹세들을 그러모아본다면, 그런 맹세들로 지어진 구수한 밥으로 우리는 어떤 미래를 도모할 수 있을까? 현호정의 감각이 젖에서 출발한다면, 허주영의 질문은 피를 의심한다. 허주영은 인간과 비인간 동물의 관계 맺기를 여전히 ‘친족’의 관계도 안에서만 상상하려는 버릇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혼종 가족 또한 ‘친족’의 은유가 품고 있는 ‘끈끈함’, 곧 ‘보수적이며 폐쇄적인 사랑, 돌봄의 감각’에 대한 중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수 있다고 말한다. 때문에 그는 ‘친족 만들기’ 보다 유연하고 느슨하며 변화를 내포한 관계 맺기 방식인 ‘친구 만들기’를 통해 응답력을 기를 것을 제안한다. 딸과 아들을 집어삼키는 신화들을 참고할 때, 인간에게 ‘친족 먹지 않기’란 금방이라도 저지를까 두려운 금기인 것으로 보인다. 그에 비하면 ‘친구 먹지 않기’란 얼마나 당연하고 쉽게 들리는가? 현호정의 초대처럼, 우리가 서로의 ‘살’을 먹지 않고, 나란히 ‘쌀’을 먹는 사이가 될 수 있다면, 허주영의 ‘친구’ 되기는 ‘식구’ 되기의 끈적이지 않는 재해석이기도 할 것이다.


최여름과 한유리는 모두 자신들의 가해자성 앞에 서 있다. 최여름은 인간의 피해자 정체성 정치가 더 이상 파고들 여지가 없는 동물권의 개념 앞에서, 오래전 등 뒤에 두고 온 동물학대의 경험을 향해 우뚝 돌아선다. 한유리는 번거로운 사랑을 요구하는 약한 존재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 존재를 바스러뜨리고 싶은 충동과 싸우기 위해 손바닥을 있는 힘껏 편다. 최여름을 결박하는 공모자로서의 기억은, 전에는 몰랐을 뿐이라는 알리바이를 바탕으로 완전한 속죄를 구해볼 수 있는 자리로부터 그를 추방한다. 그는 가해자 인간의 폭력성을 손가락질하기만 하는 고결한 죄책감의 정치를 포기한다. 대신 그는 폭력에 가담했던 경험과 정면으로 마주하면서 남김없이 분열하고 재구성되기를, 심지어는 죄책감마저 희미해져버린 마음을 목도하는 용기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택한다. 한편, 한유리는 다름 아닌 자신이, 나약해서 번거롭고 번거로워서 죽었으면 싶은 존재로서 보호자의 손바닥 위에 놓여있었던 순간을 상기한다. 이내 그는 사랑을 놓아버리는 장소인 ‘동굴’을 이해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작은 동물의 생생한 삶은 그가 동굴의 어둠과 동기화되지 못하도록 그의 소매를 애틋하게 잡아 끈다. ‘털고구마’들이 그에게 요청하는 사랑과 삶을 전력을 다해 조립하면서, 그는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되뇌어 보는 것이다. “약해도, 아파도, 장애가 있어도, 돈이 많이 들어도, 앞으로 끝없이 잘못을 반복할 예정이라도, 심지어 태어난 게 민폐라도, 단 한번도 원해진 적 없는 존재라 해도…”


호주의 농부인 곽제규는 비거니즘의 현관에 앉아 느긋하게 동료를 기다린다. 거기서 그는 유기농업을 공부하면서 체득한 ‘유기적인 관계’의 진정한 의미를 들려주고, 직접 기른 동물을 도살했던 경험을 담담히 털어놓는다. 흙냄새 물씬 나는 이야기를 통해, 그는 쉽사리 변화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이해심을 유지해보자고, ‘더 도덕적임’을 ‘더 행복함’, ‘더 재미있음’, ‘더 아름다움’으로 소개하는 유혹의 태도를 가져보자고 우리를 설득한다. 소심한 실천을 북돋우는 것이 곽제규의 글이라면, 분노와 저항심으로 딴딴해진 실천이 맞닥뜨릴 충격과 좌절을 다독이는 것은 활동가 신명의 글이다. 신명은 비거니즘과 만나고 멀어지고 다시 만나는 과정 속으로 우리를 찬찬히 안내한다. 과거의 경로를 되걸으면서 그는 묻는다. 어떻게 하면 ‘운 좋게’ 비건이 되었던 그가 처음 받았던 환대의 기쁨을 타인의 삶에서도 재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검열과 미움’을 버리고, 실천의 어려움과 외로움 속에 개인을 놓아두지 않을 수 있을까?


마지막으로 소개할 글은 채효정과 안담의 글이다. 혼란의 청년 비건은 열 수 앞서 두는 채효정 선생님을 만났다! 안담과 같은 고민에 빠진 ‘동료’ 비건들에게 채효정의 글은 충분한 참조점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OFF 편집부 일동(리타, 안담, 유리)을 대신해, 안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