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물, 우리들: 아스트리다 네이마니스와의 대화







엘레나 하이트
아스트리다 네이마니스
번역: 뚜이부치 




물은 우리 모두를 경유해 흐른다. 이는 다들 알고 있으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실이다. 인간과 비인간에 걸친 내 조상들을 살아가게 했던 물은 매일 아침 내 수도꼭지로부터 흘러나오는 물과 똑같은 물이다. 내가 마시는 물 한 방울 한 방울마다 그 물 한 방울의 이야기, 연결, 의미가 넘쳐흐른다. 그 이야기, 연결, 의미는 나 자신의 이야기와 신체에 또한 교차하게 된다.

그렇지만 후기 자본주의에서 이러한 물의 흐름은 인체를 폴리염화비페닐, 미세 플라스틱, 항우울제, 에스트로젠과 만나도록 인도하기도 하는 흐름이다. 미국 산업 공정의 부산물은 이누이트 산모의 모유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만연한 소비주의의 폐기물은 고래와 바다거북들의 부풀어 오른 복부 속에서 볼 수 있다.

이번 팟캐스트에서 아스트리다 네이마니스(Astrida Neimanis)는 그녀의 신간 『수역들 Bodies of Water』을 논하고, 우리와 물이 맺는 모순적인 관계와 더불어 어떻게 물이 각자에게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고 모두를 연결하는지 이해하도록 도울 것이다. 네이마니스의 저서 『수역들』은 나 자신과 다른 이들을 ‘수역들’ 혹은 ‘물의 신체들’(Bodies of water)로 간주하는 것이 어떻게 체현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꾸고, 또한 급속한 환경 악화에 영향을 받는 모든 존재에 대한 윤리적인 의무를 재구성할 수 있는지 고찰하게끔 한다. 동시대의 환경 중심적 사고에 있어서 페미니스트, 퀴어, 반 식민주의 이론가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인식하려 분투하는 이 기획 안에서, 네이마니스는 자넷 암스트롱(Jeanette Armstrong), 레베카 벨모어(Rebecca Belmore), 이탈로 칼비노(Italo Calvino),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와 같은 작가와 예술가들의 작업뿐만 아니라 철학자 질 들뢰즈(Gilles Deleuze), 뤼스 이리가레이(Luce Irigaray),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arleau-Ponty)의 작업을 참조한다. 광범위하고 풍부한 저서를 통해, 네이마니스는 물이 실어 가는 대단히 유의미한 불공평의 역사에 비춰 인류가 물과 같은 존재들을 관리한 방식을 점검하고자 우리를 호명한다.  



엘레나 하이트(Elena Height, 이하 EH): 물과 당신의 개인적인 연결 고리는 무엇인가? 왜 당신의 저서를 물을 중심으로 쓰기로 선택했는가?

아스트리드 네이마니스(Astrida Neimanis, 이하 AN): 개인적인 연결 고리라면, 나 자신이 이미 대략 80%의 물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 외에 말인가? 좋은 질문이다. 연구를 시작했을 때의 나라면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답했을 것이다. 약 십여 년 전 물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토론토의 요크 대학에서 박사 학위 공부를 하는 중이었고 연구 분야는 체현의 페미니즘 철학이었다. 나는 체현을 유물론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중이었고, 만일 당신이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신체들 사이의 상호 연결성을 사유하려 한다면 ,그러한 상호 연결이 오로지 인간의 신체에 국한되어 있지 않음을 고찰하기 시작하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첫 구상은 인간의 신체가 어떻게 공기, 음식, 흙, 물로 구성되는지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운 좋게 나는 물을 첫 주제로 삼아 출발했고 이후로도 물을 결코 떠나는 법이 없었다. 바로 거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것이 있었다. 그건 의도치 않은 환경주의적 실천이었다. 사적으로도 환경에 관심이 있었지만, 학자로서의 내가 환경 중심의 사유를 하도록 직접적으로 이끈 것은 페미니즘 이론이었다. 그것은 나 자신의 체현에서부터 시작해, 세계의 환경 문제와 쟁점들을 사유하는 총체적으로 다른 길을 열어줬다.



EH: 당신의 저서 『수역들』에서 당신은 참으로 다양한 사고의 신체들을 함께 엮는다. 무척 탁월한 작업이었다. 당신의 책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그러한 사고의 신체들은 또 무엇으로 구성되었는지, 그리고 당신이 하필 그 신체들을 맞물리게 선택했는지 개괄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을까?

AN: 물은 우리에게 매우 친밀한 무엇인 동시에 종잡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말 그대로 콕 집어 분명히 규정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나는 물이 무엇이며 물이 이 세계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발견하기 위해서는 지식의 온갖 다른 유형들 그 전부에 기대야만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직접적이고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앎만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이야기들, 역사, 과학을 포함한다. 

나는 환상적 이야기이든 다윈주의적 이야기이든 과학적 사실이든 상관없이, 이들 모두를 세계를 알아가기 위한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방법들이 되도록 하는 관점을 택했다. 비록 이들이 서로 동떨어져 있어 보일지라도 말이다. 이야기들을 누가 썼거나 생각했거나 탐색했건 간에 상관없이 그 누군가는 항상 “세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지내는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

나는 이 책을 쓰며 우리가 세계를 아는 방식이 어떻게 우리가 세계 안에서 행동하는 방식과 직접 연계되는지 탐구해보기를 희망했다. 우리가 물을 어떻게 알고, 우리가 물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는 직접적으로 우리가 물을 대하는 태도에 영향을 미친다. 만일 우리가 물을 소비재로 여긴다면, 혹은 물을 저기 밖에 동떨어져 있는 무엇으로 여긴다면, 혹은 물 부족이나 수질 오염을 특정 공동체에서만 일어나는 무언가로 생각한다면, 이러한 가정들은 우리의 매일의 생활 속에서 물을 대우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물은 저기 바깥에 있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다. 우리가 물을 대하는 방식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우리의 친족을, 우리의 인간 이상의 친족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러한 점에서, 물은 매우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하는  환경적 쟁점이 된다.



EH: 그에 대한 훌륭한 예시 중 하나는 유독성 모유에 대한 당신의 논의다. 당신의 유독성 모유에 대한 논의는 우리가 물의 흐름에 연결된 방식과 그 연결의 윤리적 함의를 역설하는 가장 강력한 사례 중의 하나다.

AN: 이것은 분명 훌륭한 사례지만 내가 발견한 건 아니다. 나는 다른 연구자들과 학자들의 연구로부터 사례를 취했다. 자신의 모유에서 발견한 화학적 오염에 관해 쓴 저널리스트 플로렌스 윌리엄스(Florence Williams)의 기사1를 읽고 오염된 모유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 기사의 놀라운 점 중 하나는 생물 농축(biomagnification)의 문제다. 한 여성의 체액에 오염원이 함유되었을 때, 모유는 바로 그 모유가 작동하는 기제로 인해서 유해 물질을 자신 안에 모으게 되며 그렇게 농축된 상태의 유해 물질을 신생아에게 내려보낸다. 놀라운 사실이다. 내 체액은 결국 신생아 혹은 다른 인간 신체들에 연결되어 있다.

이제 우리가 생물 농축의 문제에 대해 더 광범위한 시야를 가지고, 극지방의 이누이트 공동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서2 배움을 얻는다면, 우리는 극지방의 모유가 소위 산업화된 서구의 모유보다 더욱 오염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왜 그러한가? 생물 농축은 물의 신체들 사이의 다종 연결을 통한다. 다만 이 경우에는 유방에서 신생아로 가는 종류의 연결이 아니라, 공장에서 강으로, 산성비로, 바람과 강수로, 해류로의 연결을 통하여 심화된다. 이 유해 물질은 극지방으로 흘러 들어가는 갖가지 물의 신체들에 의해 운반된다. 극지방에 당도한 유해 물질은 동물의 먹이 사슬을 따라 상위 단계로 올라가면서 연속적으로 농축된다. 그리하여, 고작 엄지손가락만 한 식용 고래 가죽 한 조각에서 1년 권장량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폴리염화비페닐(polychlorobiphenyl)을 섭취할 수 있게 된다.

이 사태는 유해 물질의 생체 축적을 유발한 환경 오염에 책임이 전혀 없을지 모를 북극권의 모유 수유자들이 훨씬 더 큰 신체 부담(body burden)을 떠안게 되는, 일종의 환경 식민주의다. 유해 물질은 행성 전체로서 물의 신체를 통과해 여행하고 인간으로서 물의 신체를 경유해 젖먹이에게 전달된다.



“물은 바깥에 있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다.”




내게 있어서, 이 흐름이 모든 것을 한데 묶는다. 물의 신체들은 도관 導管 인데, 모유가 목적하듯 생명을 주는 물질의 도관만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자본주의와 식민주의를 실어 나르는 도관이며, 삶을 변화시키는 물질, 생을 변형시키는 물질, 독성 물질의 도관이기도 하다. 이는 인간의 몸만이 아니라 인간 그 이상의 몸들이 도관에 연루되어 있다는 걸 보여준다. 플랑크톤은 생선에게 먹히고, 그 생선이 바다표범에게 먹히고, 그 바다표범이 인간에게 먹힌다. 비인간 동물체들까지 유독성의 교통 체계 안에, 곧 다종 환경 식민주의 안에 연루되어 있음이 밝혀진다. 다종 환경 식민주의는 우리가 모두 물의 신체들이고, 물의 신체로서 연결되어 있으되 이 연결이 같은 방식으로 경험되지 않는다는 걸 골치 아픈 방식으로 증명한다.

그러므로 신체 부담의 문제는 환경 정의(environmental justice)의 표현을 뛰어넘어서도 매우 핵심적인 사안이 된다. 당신이 당신의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기를 원하지만 실상 분유를 먹이는 게 더 아이의 건강에 좋다는 걸 깨달을 때, 신체 부담은 어떠한 종류의 부담이 되는가? 여기서 떠안겨진 부담은 과학적인 값(valence)만이 아니라 매우 정서적이고 정동적인 값 또한 포함한다.



EH: 『수역들』에서, 당신은 ‘인류세의 물’(Anthropocene water)을, 그리고 우리 인류가 어떻게 인류세의 물을 관리하고 생각하는지를 논의한다. 『수역들』이 특히 인류세의 물에 제기하는 도전에 대해 설명해 줄 수 있을까?

AN: 인류세의 물에 대한 내 논의 또한 역시 다른 사람들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 나는 아니쉬나베(Anishinabe) 원주민 예술가 레베카 벨모어(Rebecca Belmore)의 작업들3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인류세의 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생각했다. <연못 fountain>이나 <사원 temple>같은 그녀의 작업들은 각각 매우 다른 물과의 관계들을 제시한다. <연못>은 강탈된 물과 땅을 밟고 선 정착자인 나의 육신에 깃든 책임을 묻는 기소장이며, 물을 곧 붉은 피로 여기라고 나에게 요청한다. <연못>은 아름답고 도전적이며 중요한 영상 작업이다. 주춧돌 위에 물로 가득 찬 비닐 봉지를 쌓아 올린 <사원>은 거래될 수 있는 것, 포장되고 교환 가능한 것으로서 물을 바라보는 종류의 이해를 나타낸다. 이 이해는 관리 중심적인 이해이고 상품화된 이해면서 명세서 항목별로 분류되는 이해다.

<사원>은 나로 하여금 인류세의 물이란 무엇인지 묻도록 했다.  이 질문은 지리학자 제이미 린튼(Jamie Linton)의 중요한 책, 『물은 무엇인가? (What is Water?)』에서 발전되어 나타난다. 린튼은 현대적 물의 역사를 추적하며, 어떻게 물이 더 이상 복수형의 "물들"(waters)이 아니라 교환 가능하고, 정량화될 수 있고, 관리 가능한 바로 이 물질이 되었는지 질문한다. 인류세의 물은 많은 특징을 가지지만, 결국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특징은 그것의 관리될 수 있는 성질이다.

인류세의 한 부분으로서 인류는 물을 관리하고, 이를 통해 지구의 황폐화를 목전에 두고서 사로잡힌 거대한 불안과 트라우마에 맞서 싸우려 한다. 그건 양날의 검이다. 우린 관리를 통해 물을 통제하려 노력하고, 우리가 누구에게도 제어되지 않는 채로 방향을 잃고 표류하고만 있다는 기분을 조금이나마 떨치려 한다. 그러나 물을 관리하는 것은 문제를 악화시킨다. 우리는 물을 가둘 수 없다. 우리는 물을 통제할 수 없다. 물은 제멋대로다. 우리는 물 스스로가 되고자 하는 것에 우리를 넘겨줘야 한다. 물이 되고자 원하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은 제각기 다른 것들이고, 그것은 인간에 의해서 완전히 관리되지 않는 것들이다.

우리는 물로부터 특정한 환경에서 관리와 통제가 중요함을 배울 수 있다. 인류는 약간의 정책, 약간의 재분배, 혹은 약간의 정화 작업만으로도 나아질 수 있는, 너무나 많은 오염과 결핍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관리와 통제의 측면에 지나치게 몰두한다면 우리는 물과 그것의 이상하고 기이한 리듬, 물의 시간성, 물이 채집하는 모든 것, 물이 실어 가는 모든 역사들에 우리 신체들이 조율되는 방식과 접촉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관리와 통제는 그와 같은 것들을 추적하지 못한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종류의 지식들, 이야기들과 경험들에 넘겨줘야 한다. 나는 이 넘겨줌이 우리가 인류세의 시대를 맞아 어떠한 종류의 품위를 갖추고서 일을 잘 해 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 본다.



EH: 우리는 더욱 광범위하게 생각하는 일의 윤리적 함의를 이미 어느 정도 논했다. 그렇다면 물과 환경을 다루는 방식들에 대해 정말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하고자 할 때, 활동가이자 학자로서 당신은 우리가 무엇을 더 잘 해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가?

AN: 이 질문에는 당연히 다양한 답변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는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필요가 있다. 모두 손에 손을 모아 도움을 보태야 한다. 머뭇거리지 말자. 당신의 질문에 더 겸허히 답하려면 내 작업이 그 일에 무엇을 기여할 수 있다고 여기는지 답하면 될 터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라. 나는 결국에 어느 정도는 철학자이며 또 어느 정도는 문화 사상가인 학자다. 나는 세계를 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내 작업이 기여할 수 있는 바는 우리가 물과 맺는 관계에 우리 자신을 맞춰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거듭 고집하는 정도다. 물을 저 밖에 있는 것, 우리와 다르고 추상적인 것 혹은 우리의 삶의 배경이라고 상상하지 않도록 물을 전경으로 데려와라. 우리는 물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물과 관련짓는가? 우리는 물을 어떻게 대하는가?

내 작업이 기여할 수 있길 바라는 또 다른 사안은 물이 단순히 환경 문제의 대상만이 아님을 주장하는 일이다. 페미니스트 학자이며 젠더 연구를 배경으로 가진 사람으로서, 환경 오염, 여성 혐오, 반-흑인, 정착 식민주의, 연령주의와 장애인 차별 사이의 교차성들을 항상 응시하는 것이 내게는 매우 중요하다. 학제적 구분으로 인해, 앞서 말한 문제들은 전통적으로 인문학적 문제들로 여겨져 왔다. 



“우리가 물을 어떻게 알고, 우리가 물을 무엇이라고 여기고는 우리가 그것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준다.”



그러나 환경 정의로부터 환경 과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살피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문화적 문제를 환경 문제와 떼어놓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페미니스트와 퀴어 이론 학자들, 원주민 학자들, 장애학 학자들의 놀라운 작업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해 보라. 어떻게 그 모든 일이 우리가 물이나 여타 환경 문제들과 맺는 관계를 사유하는 데 동원될 수 있는가? 그러한 동원은 탁월한 방식으로 일어나며, 나는 항상 그들로부터 배운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보다 다음에 집중해야 한다. 물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고, 물은 추상적 인간에 의해 경험되지 않는다. 좋은 방식이든 나쁜 방식이든, 물은 이 모든 것들 속에 위치한  인간에 의해 경험된다.






*이 글은 저자의 허가를 받아 아래 링크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Our Waters, Our Selves: A Conversation with Astrida Neimanis”(2020), https://edgeeffects.net/astrida-neimanis





필자 소개 
아스트리다 네이마니스(Astrida Neimanis)는 주로 상호 교차적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바라본 물과 기후에 대해 쓴다. 그녀의 저서로 『수역들: 포스트 휴먼 페미니즘 현상학(Bodies of Water: Posthuman Feminist Phenomenology: 2017)』과 공동 편집한 모음집 『물과 함께 생각하기(Thinking with Water: 2013)』가 있다. 그녀는 온타리오 해밀턴 거북 섬의 오대호 근처에서 자라났고 현재는 호주 시드니 대학에서 문화 연구와 젠더 스터디 부교수로 있다.

옐레나 하이트(Elena Hight)는 위스콘신-메디슨 대학의 사회학 대학원생입니다. 그녀는 현재 오대호 주변의 도시의 수자원 기반 시설 이면의 정치와 정책을 연구한다. 대학원을 다니기 전의 그녀는 온두라스에서 교육자로, 오클라호마에서 서점 매니저로 일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지역 환경 옹호 단체와 광범위하게 활동했으며 그러한 활동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녀는 또한 인터섹스 활동가 그룹인 InterACT Youth의 회원이기도 하다. InterACT를 통해 그녀는 커뮤니티 및 대학 조직 내의 인터섹스 인권 침해에 대한 여러 발표를 했으며 한 명의 인터섹스로서 자신의 경험에 대해 글을 썼다. 그녀의 작업은 Sociological Imagination, Mic, NukeWatch 및 Rooted in Care: Sustaining Movements에 게재되었다.


역자 소개
뚜이부치. 영문학을 공부하고, 어쩌다보니 하루에 만 보씩 걷고 있습니다. (seoyeongjo27@gmail.com)






1.Williams, Florence. “Toxic Breast Milk?” The New York Times, The New York Times, 9 Jan. 2005, www.nytimes.com/2005/01/09/magazine/toxic-breast-milk.html.
2.Trainor, Sarah F., et al. “Arctic Climate IMPACTS: Environmental Injustice in Canada and the United States.” Local Environment, vol. 12, no. 6, 2007, pp. 627–643., doi:10.1080/13549830701657414.
https://www.semanticscholar.org/paper/Arctic-Climate-Impacts%3A-Environmental-Injustice-in-Trainor-Chapin/3563f5c4d667d9787824991c9c96babe52c4f9e5?p2df
3.https://www.rebeccabelmor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