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여자 이론
요한나 헤드바
번역 : 허지우
1.
2014년 말부터 약 12개월에서 18개월마다 약 5개월 동안, 만성적인 질환으로 인하여 나는 걸을 수도, 운전할 수도, 일할 수도, 때로는 언어를 말하거나 이해할 수도, 도움을 받지 않고 목욕을 하거나 침대를 떠날 수도 없을 정도로 아팠다. 이 특별히 아픈 시기는 만약 내가 할 수만 있었다면 끊이지 않고 참여했을 블랙 라이브즈 매터
Black Lives Matter 시위와 시기가 겹치게 되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의 맥아더 공원에서 한 블록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데, 그곳은 통상적으로 라틴계가 지배적으로 거주하는 지역이며 많은 이민자들이 미국 생활을 시작하는 곳으로 통한다. 그러므로 이 공원이 가장 활발한 시위장소였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나는 창문을 넘어 흘러오는 행진 소리를 들었다. 침대에 틀어박힌 채, 연대의 의미로 나는 아픈 여자의 주먹을 치켜들었다.
아픈 사람들에게 가능한 시위 방식에 대한 생각이 시작되었다. 재직 중인 사람들은 행진에 참여할 경우 수반되는 해고의 위협이나 말 그대로 수감의 위협, 폭력이나 공권력의 위협에 의해 행진에 참여하기 어려워 보였다. 마찬가지로 질병이나 장애를 가져서, 혹은 질병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는 삶들도 있었을 것이다.
시선의 바깥으로 치워진, 주먹을 치켜들고 있는 모든 신체들에 대해 나는 생각했다.
주류 담론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한나 아렌트의 견해를 따라서 ‘정치성’을 공공장소에서 행해지는 어떤 행동이라고 정의한다면, 우리는 한편으로 그것이 함축하는 배제와 다퉈야만 한다. 정치적이기 위해서는 공공장소에 현존하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한다면, 단지 몸을 거리로 옮기는 것이 신체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인구집단이 비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내 대학원 과정 중에는 아렌트는 일종의 신과 같은 위치에 있었고, 그래서 나는 그의 정치성에 대한 정의가 급진적이고 해방적이라고 생각하도록 훈련받았다. 물론 1950년대 후반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그의 정의가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이해할만하다. 아렌트는 이와 같은 정의를 통해 ‘정치성’을 갖추는 데 필요하다고 여겨지던 것들 중에서 법률 구조나 투표 등의 민주적 과정,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개인에 대한 의존을 단번에 말소했다. 이로써 정치성을 갖추기 위해서 더는 정책에 매달릴 필요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 이전에는 정치적이나 가시적인 행동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들이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렌트는 ‘아니, 그저 거리로 나가면 된다. 그러면
짜잔, 정치적이다.’라고 말한 것이었다.
하지만 여기에는 두 가지 실패가 있다. 첫 번째는 “공공영역” 개념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이는 가시적인 공간과 비가시적인 공간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사적 영역이라는 개념을 필요로 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사적 영역에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정치성을 획득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사적 영역에서 아내에게 매질을 한다고 하여도,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 일도 아닌 것이다. 사적인 이메일에 인종차별적 비속어를 쓰더라도 “공적인 자리”에서 그러려는 의도는 아니었으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인종차별을 한 것은 아닌 것이다. 아렌트는 무엇이든 정치성을 지닌 것으로 고려된다면 아무것도 정치적이지 않게 될 것을 염려했다. 아렌트가 정치적인 공간과 비정치적인 공간을 나눈 이유는 이것이다. 하지만 이런 불안으로 인해, 그는 어떤 인구집단을 통째로 비가시성과 정치적 무관심성의 영역으로 추방함으로써 희생시켰다. 공공영역의 개념화에 있어서 그들이 포함되지 않도록 하기로 선택했다. 이러한 비판은 꾸준히 있었다. 아렌트의 정치성 개념이 지닌 문제점은 곧바로 60년대, 70년대 시민권 운동과 여성주의 운동을 통해서도 드러났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표어는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고도 읽힐 수 있다. 왜냐하면, 당연하게도, 사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정치적이다. 누구와 섹스하는지, 샤워하는데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깨끗한 물로 샤워할 수 있는지 등등….
다른 문제점도 있다. 주디스 버틀러의 2015년 강연 “취약성과 저항
Vulnerability and Resistance”
1에서도 지적되었듯이, 아렌트는 누가 공공장소에 있을 수 있도록 허락되는지, 누가 공공영역을
책임지는지 설명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누가 공공영역에
들어오는지에 책임을 지는 것이 누구인지에 관한 설명에 실패했다. 버틀러에 따르면 대중 시위에서는 한 가지 항상 참인 사실이 있다. 경찰이 이미 그 자리에 있거나, 곧 온다는 점이다. 블랙 라이브즈 매터 시위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이는 무서운 힘으로 공명한다. 시위에 있어서 폭력의 불가피성은 그로 인해 시위에 참가할 수 없으므로 그 시위에 나오지 않을 사람들이 상당히 존재하리라는 것을 보장하며, 특히 폭력적일 정도로 보호받지 못하는 신체들의 중요성을 주장하기 위해 조직된 시위의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이를 신체적이거나 정신적인 질병 또는 장애로 인해 침대나 집에 머물러야만 하는 사람들과 연관하여 생각해보자. 우리는 이 시위들이 위하는 사람들이 그 시위에 참여할 수 없다는 사실과 싸워야만 한다. 이들이 정치성을 띤 활동가로서 가시화될 수 없다는 사실과 싸워야만 한다.
이 몇 주간의 시위 동안 우연히 내 텀블러 대시보드에서 마주친 포스팅이 있었다. 대략적인 내용은 “오늘 밤 우리와 함께 거리에서 함께 시위하지 못한 모든 장애인들, 환자들, PTSD나 공황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위해 소리친다. 당신들의 가치 있는 목소리는 분명 함께한다고 느낄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좋아요. 리블로그.
2.
나는 만성질환을 앓고 있다. 만성질환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말뜻을 설명하겠다. 영어로 만성질환은 ‘chronic illness’인데, 여기서 ‘chronic’은 그리스어 khronos가 라틴어화된
chronos에서 유래했으며, 시간을, 그중에서도 일평생에 걸리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만성질환은 평생 지속되는 병이다. 다시 말한다면, 나아지는 병이 아니다. 완치란 없는 병이다.
이제는 시간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는 매일같이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주 가끔 나는 마치 세상 밖으로 끌어내진 것처럼 내 질환에 대해 의식하지 않게 되는 순간을 경험하는데, 이는 수 분 정도, 길게는 수 시간 정도 지속된다. 이 행복한 망각의 순간들은 내가 아는 한 기적이라는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만성질환을 앓는다는 것은, 삶이 그저 에너지를 배급하는 것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만성질환은 모든 행동에 에너지 소모를 요구한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스스로 먹을 음식을 요리하거나, 옷을 입거나, 이메일에 답장하는 일에도. 만성질환이 없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에너지 소모는 그리 큰일은 아니다. 뒷감당을 생각하지 않고 에너지를 사용해도 괜찮다. 한정적인 자원을 가진 우리들은 배급제를 시행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에너지의 공급량이 많지 않다. 보통 점심도 되기 전에 바닥나곤 한다.
나는 다른 방법으로 만성질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앤 크베코비치
Ann Cvetkovich2는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만약에, 적어도 미국에서는, 우울증을 식민주의, 인종청소, 노예제, 법적 배제, 그리고 우리 모두의 삶을 망치는 일상적 차별과 소외의 역사로서 기술한다면 어떨까? 생화학적 불균형이 아니라?” 나는 여기서 “우울증”이라는 단어를 모든 정신 질환으로 대체하고 싶다. 크베코비치는 다음과 같이 이어간다. “대부분의 의학 문헌은 연구의 대상으로 기분이 나쁜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백인 중산층을 상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왜냐하면 기분 나쁨이란 특권과 편안함이 만드는 표면적으로 보기에 좋은 삶에는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미국에서 이야기되는 건강(wellness)이란 부유한 백인의 생각이다.
스타호크
Starhawk의 책 ‘어둠을 꿈꾸다
Dreaming the Dark’의 1982년 판 서문을 인용한다. “심리학자들은 신화를 만들었다. 어딘가에 건강한 상태라는 게 존재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건강한 상태에 있을 것이며, 불안해하거나, 우울하거나, 신경질적이거나, 고통스러워 하거나, 대부분의 시간을 불행해하는 사람은 일탈적인 것이라는 신화를 말이다.” 나는 여기서 “심리학자들”이라는 단어를 “백인우월주의”, “의사들”, “상사”, “신자유주의”, “이성애규범성”, 그리고 “미국”으로 대체하고 싶다.
최근 몇 년 동안 “여성”의 통증이 어떻게 치료되는지에 관한 글들이 쏟아져나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응급실과 진료실에서 의사, 전문가, 보험사, 가족, 배우자, 친구들에게 여성의 통증이 남성의 통증에 비해 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지, 이러한 현상이 얼마나 문화 전반에 퍼져있는지에 관한 글들이었다. “의사들은 얼마나 여성의 고통을 덜 심각하게 받아들이는가”
3라는 최근의 애틀랜틱의 기사에서, 레이첼의 배우자는 레이첼이 응급실에서 겪은 경험을 소개한다. 레이첼은 난소 염전(난소 낭종이 너무 자라서 나팔관을 비틀면서 떨어지는 것)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처치를 받기까지 오랫동안 응급실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전국적으로 남성들은 급성 복통으로 진통제를 받기까지 평균 49분을 기다린다. 같은 증상에도 여성들은 평균 65분을 기다린다. 레이첼은 약 90분에서 2시간가량을 기다렸다.” 내원 즉시 수술을 받아야 했을 상황이었지만, 레이첼이 수술을 받기까지는 결국 15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기사는 그의 신체적인 상처가 치유되는 것으로 끝을 맺지만, 한편으로 그는 “아직도 레이첼 자신이 ‘보여지지 않음의 트라우마
the trauma of not being seen’라고 부르는 정신적인 고통과 싸우고 있다.”
기사가 언급하지 않는 것은 인종차별의 문제이다. 이로써 나는 글쓴이와 그의 아내가 백인일 거라고 짐작하게 되었다. 백인에게만 그러한 망각적 중립이 허용된다. 이는 빈칸을 전제하며 보편을 가정한다.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인종차별에 관해서 백인들은 다른 백인들이 말을 할 때 유색인종이 이야기할 때보다 더 경청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곧잘 백인으로 통하는
white-passing 사람으로서 백인들에게 돌리지 않고 말하겠다. 내 하얀 얼굴을 보고 잘 들어라.)
보여지지 않음의 트라우마. 또다시 묻는다. 누가 공공영역에
있을 수 있도록 허가받는가? 누가 보일 수 있도록 허가받는가? 레이첼의 끔찍한 경험을 별것 아닌 것처럼 만들려는 게 아니다. 나 자신도 난소 낭종이라는 진단을 받기까지 응급실에서 열 시간을 기다렸던 적이 있다. 나는 그의 공포에 배경이 되는 가정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 가정이란, 우리의 취약성은 보여지고 존중되어야 하며, 생명의료윤리의 4원칙에 따라서 우리 모두가 신속하고 “환자의 자율성을 존중받는” 방식으로 치료받아야 한다는 가정이다. 물론, 이러한 가정은 우리 모두가 가져야 할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그러한 가정을 가질 수 있도록 허가받았는지를 질문해야만 한다. 사회는 누구에게 그러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증명하였는가? 그리고 사회는 누구에게 정반대의 것을 강요하였는가?
레이첼의 의료기관에서의 경험과 캠 브록
4의 의료기관에서의 경험을 비교해보자. 2014년 9월, 자메이카 출신으로 뉴욕에서 살고 있던 32세의 흑인 여성 캠 브록은 BMW를 운전하던 중 경찰에게 제지당했다. 경찰은 그의 행동이나 차량에 대한 수색에서 이를 뒷받침할만한 아무 증거도 찾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브록이 마리화나에 취한 채로 운전하고 있다는 혐의로 차량을 압수했다. 브록이 뉴욕시와 할렘병원을 상대고 제기한 소송에 따르면, 다음날 그가 압수당한 차량을 되돌려받기 위해 경찰서를 방문하자, 경찰은 그가 “감정적”으로 행동한다는 이유로 체포하였으며,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를 할렘병원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너무” 감정적으로 행동한다는 이유로 비자발적 입원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이 이야기를 생각할 때면 마치 내 뇌리에서 인식이 찢기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의사들은 그가 “망상”을 하고 있으며 조울증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브록은 트위터에서 오바마가 자신을 팔로우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이는 사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진은 이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 후 그는 8일 동안 감금되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강제로 진정제를 주사받았고, 향정신성의약품이 투여되었으며, 집단치료에 참석해야 했으며, 환복을 위해서라지만 옷도 강제로 벗겨졌다. 그의 변호사가 입수한 병원의 진료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었다. 브록의 입원에 관한 “치료 마스터플랜”에는, “목표는 환자가 고용을 위한 교육의 중요성을 언어화할 수 있게 되는 것과 트위터에서 오바마가 그를 팔로우하고 있지 않다고 진술하게 되는 것”이라고 적혀 있다. “현실 검증력이 부족함”이라는 언급도 있었다. 퇴원하면서 브록은 의료비용으로 13,637.10달러가 적힌 청구서를 받았다.
어째서 병원에서 의사들이 브록이 오바마가 자신을 팔로우 한다고 주장했을 때 이를 “망상”으로 치부했는지는 쉽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회에 따르면 젊은 흑인 여성은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 있을 수 없으며, 만약 그가 자신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면 그건 분명 그가 “아파서” 그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내가 행진하거나 팻말을 들거나 구호를 외치는 등 전통적으로 정치적 존재의 능력이라고 여겨지는 활동은 전혀 할 수 없이 누워있는 상태에서, 아픈 여자 이론의 중심적인 문제의식이 다음과 같이 형성되었다. 침대에서 나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은행 창문에 벽돌을 던지지?
3.
“아픈 여자”의 모든 다양한 모습에 대해 말하기에 앞서, 먼저 나는 개인으로서 내 특정한 위치에 대해 말해야겠다.
나는, 비록 그들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서양의 의료-보험 산업 복합체가 나를 온전히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랫동안 내게 이런저런 단어들을 붙여왔고, 그 단어들 중 일부는 내게 유용한 표현을 제공하기는 했다. 아무리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당면하는 현실에도 대처하는 방법을 찾는 일을 멈출 수는 없는 법이다. 우선, 나는 내 “질환”을 이해하는 다른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아마도 이 모든 것은 다음의 사실로 설명될 수도 있다. 내 달이 게자리와 함께 죽음의 하우스인 천궁도의 제8번 하우스에 위치한다는 사실, 또는 점성술에 따르면 “흉성(malefic)”이라 일컬어지는 내 화성, 토성, 그리고 명왕성들이 질병과 비밀, 슬픔, 그리고 자기파멸의 하우스인 제12번 하우스에 위치한다는 사실로 말이다. 아니면 친할머니가 어린 시절 탈북을 했었으며, 이 사실을 몇 년 전가지만 해도 숨겨오다가, 우연을 가장하여 발설한 후, 재빠르지만 다 티가 나게 부인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도 있다. 아니면 내 엄마가 가족들의 적극적 부인으로 인해 진단되지 못한 정신병을 앓고 있으며, 40년간 지속된 약물 및 알콜중독, 성적 트라우마, 소독되지 않은 주삿바늘로 인한 간염으로 인해 분노에 차 있으며, 현재까지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로 수감, 무단 거주, 노숙을 전전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설명될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어린 시절 신체적, 정서적으로 학대를 당했으며, 가난, 중독, 폭력의 환경에서 자라났으며, 14년 동안 부모와 절연하고 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도 있다. 어쩌면 이는 내가 가난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미국연방국세청에 따르면 내 2014년 조정 후 총소득은 (풀타임 근무를 할 건강 상태가 아니었던 결과로) 5,730 달러였으며, 이는 내 건강보험은 캘리포니아주에서 제공되고 있으며
(Medi-Cal), 내 “주치의”는 쇼핑몰 2층에 있는 병원에서 근무하는 의사보조사들과 간호사들이며, 나는 정부에서 제공하는 식료품 할인 구매권으로 끼니를 이어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쩌면 이는 내가 퀴어이고, 젠더 논바이너리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내 첫 커밍아웃은 14살때였으며, 이번에 엄마의 손에 멍든 눈이 마지막이기를 바라며 마침내 집을 나온 것이 16살때의 일이었다. 어쩌면 이는 “트라우마”라는 단어로 축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저 피부가 민감하고 운이 없었을 뿐일 수도 있다.
또한 내가 내게 붙어있는 서양 의학 용어를 공유한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좋든 싫든 이것들은 보편어를 제공한다. 에이드리언 리치는 1971년에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이것은 압제자의 언어이다. 하지만 당신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그게 필요하다.” 하지만 또 다른 언어도 제안하고 싶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언어들 중 하나인 크리
Cree 어는 영어와는 다른 소유명사와 동사 구조를 갖고 있다. 크리어에서는 “나는 아프다
I am sick”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아픔이 내게 왔다
The sickness has come to me”라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사랑하며, 이를 존중하고 싶다.
그래서, 다음의 것들이 내게로 왔다.
자궁내막증. 이는 자궁 질환으로, 자궁 내막이 있어서는 안 되는 곳에서 자라나는 질병인데, 주로 골반 부위에서 자라나지만, 몸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도 있다. 다리나 복부 심지어는 머리에서도. 이는 만성적인 통증, 위장 장애, 엄청난 출혈, 어떤 경우에는 암의 원인이 될 수 있으며, 내가 유산을 경험했고, 불임이며, 임신을 원한다면 수차례의 수술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이 병에 대해서 잘 모르는 친구에게 이를 설명하자, 그는 “그럼 네 몸 전체가 자궁인 셈이네!”라고 한 적이 있다. 그렇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떠도는 자궁” 이론의 아버지들인 고대 그리스의 의사들이 이에 대해 뭐라고 했을지 상상해보라.) 이는 몸 전체에 퍼진 자궁 내막 세포들이, 자궁내막증을 앓고 있는 힐러리 만텔의 표현에 따르자면, 매달 “본성에 따라 피를 흘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낭종을 일으키는데, 이 낭종은 결국은 터지고 작은 폭탄의 파편과도 같은 죽은 조직들을 남기게 된다.
양극성 장애, 복합성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공황 장애, 이인성/비현실감 장애도 내게로 왔다. 이는 내가 이 세상과 또 다른 세상 사이에서 살고 있음을 의미할 수 있다. 또 다른 세상이란 “자아”라는 비연속적인 개념에 의해 통제되기를 멈춘 내 뇌가 만들어낸 세상이다. 이러한 “장애들” 때문에, 나는 믿기 힘들 정도로 생생한 감정, 사고의 비약, 생생한 꿈, 자신의 마음이 별들 속으로 흩어져버렸다는 느낌,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감각, 강렬한 황홀감, 절정, 슬픔, 그리고 악몽 같은 환각을 경험하고는 한다. 나는 이 때문에 수차례의 자발적, 비자발적 입원을 경험했고, 내가 처방받았던 약들 중 하나 때문에 나는 거의 죽을 뻔도 했다. 그 약은 드물게 복용한 사람의 피부가 떨어져 나가게 하는 부작용을 갖고 있었는데, 다른 약은 한 달에 800달러의 비용이 들고, 이 약은 무료 샘플로 받아볼 수 있기 때문에 복용했던 것이었다. 만약, 이 세상이 내가 마땅히 일할 수 있다고 결정했으므로, 내가 직업을 갖기로 한다면, 나는 항정신병제를 복용해야만 하는데, 이는 다른 여러 섹시한 부작용들과 함께 단기 기억 상실과 침흘림을 유발한다. 이 방문객들은 그들의 친구들도 데려오는데, 신경쇠약, 정신 붕괴, 사실 뭐라고 부르든 상관이 없는 그것을 내 인생에 세 번이나 불러들여왔다. 나는 그들이 내 집에 다시 방문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은 열 번이 넘는 자살 시도(대부분은 해리를 겪는 중에 발생했다)의 동기가 되었으며, 그중 첫 번째 시도는 내가 아홉 살 때 있었던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진료를 받는 의사마다 모두 당황케 하는 자가 면역 질환(혹은 자가 면역 질환’들’?)이 내게로 왔다. 이 질환은 아직도 이름을 받기를 거부한다. 이 에세이가 마스크 매거진에 원래 게재되었던 바로 그날, 신경과 의사는 내 질환을 ”100% 섬유근육통”이라고 “일단 진단을 시작할 곳”으로 진단했다. 이 일이 있기 1년 남짓 전에 나의 "1차 진료" 의사는 신경과 전문의, 류마티스병 전문의, 면역학 의사를 만나 보라고 내게 권했기 때문에 나는 내 증상들이 암시하는 다발성 경화증과 다른 자가면역 질환에 대한 검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내 보험은 이런 진료의뢰 및 전원를 승인하지 않았고, 내 보험이 커버하는 전문의를 150마일 이내에서 찾을 수도 없었다. 섬유근육통을 진단해준 신경과 의사도 비보험으로 현금 지불을 조건으로 진료를 해주었는데, 이는 친구로서 호의로 해준 것이었다. 자가 면역 질환과 함께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묘사하기에는 여기에는 공간이 충분치 않다. 내가 살면서 충분한 공간을 한 번쯤은 가질 수 있을까?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는 피로, 매 순간 온몸에서 일어나는 통증, 질병에 대한 민감성, “정상적”이어야 할 기능을 무시무시할 정도로 비정상적으로 수행하거나, 아니면 전혀 수행하지 않는 신체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4.
이 모든 방문객들과 함께, 나는 아픈 여자 이론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픈 여자 이론은 견딜 수 없는 현실을 살아가기 위한 방법이었으며, “내 것”이라고는 도저히 느껴지지 않는 자아에 대한 증언이었다.
“아픈 여자 이론”의 초기 발상과 명칭은 몇 가지 출처를 두고 있다. 주된 출처는 질병, 장애, 그리고 취약성이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을 여성화시키는, 이를테면 더 “약하게” 만들거나 더 “취약하게”만드는 것을 생각하는 방법이었다. 하나는 오드리 월렌의 “슬픈 소녀 이론”
5에 대한 반응으로서 나왔다. 이 이론은 역사적으로는 여성의 병리 현상으로 다뤄지던 것들을 소녀들을 위한 정치적 저항의 방식으로 재정의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슬픈 소녀 이론에 비판적인 시선은 주로 백인성, 아름다움, 이성애규범성, 그리고 중산층의 자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므로, 그 슬픈 소녀가 만약 가난하거나, 퀴어이거나, 비백인이거나, 셋 모두 다 일 때, 성장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문제의식을 나는 품기 시작했다. 또 하나는 케이트 잠브레노의 소설 “히로인즈
Heroines”
6를 읽으며 자극받은 일이었다. “영웅주의”라는 개념 자체를 엿먹이고 싶어져서 근질거려진 나는 전통적으로 반영웅적이라고 여겨진 자질들을 지닌, 이를테면 병들고, 게으르고, 행동하지 않는 인물을 거대 이론의 상징으로 내세우고 싶어졌다.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 중 하나는 1973년의 여성주의 서적인 “불만과 장애
Complaints and Disorders”였다. 이 책은 백인 상류층의 “아픈 여자”와 비백인 노동계층의 “병나게 하는 여자들”을 비교분석하는 글이었다. 그리고 만약 아픈 여자 이론에 후견인 대모가 있다면, 그는 오드리 로드일 것이다.
아픈 여자 이론은 자신의 취약성과 견디기 힘든 연약성에 매일같이 직면하는 이들을 위한 이론이다. 그들의 경험을 존중하기 위해서 싸우는 이론일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그들의 경험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이론이다. 오드리 로드의 말을 빌리자면, 세상이 그들의 생존에 반하여 세워졌기 때문에, 생존할 예정이 없었던 이들을 위한 이론이다. 내 바보 같고, 아프고, 병신 같은 동지들을 위한 이론이다. 진단명을 받은 적이 없더라도 당신은 당신이 누구인지 안다. 아픈 여자 이론의 한 가지 목표는 기관이 당신의 존재를 승인하여 그들의 기준에 따라 당신을 고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사상에 저항하는 것이다. 고귀한 당신은 고쳐질 필요가 없다. 고쳐져야 하는 것은 세상이다.
나는 이를 동원령으로서, 그리고 인식의 증언으로서 제안한다. 내 생각이 보다 정확한 표현을 제공하고, 여러분과 공명할 수 있으며, 생존과 회복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만성적인 질환이나 장애가 없는 여러분들에게는, 아픈 여자 이론은 여러분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공감의 폭을 넓히기를 요구한다. 우리를 마주하고, 우리의 말을 듣고, 우리를 똑바로 보도록 요구한다.
5.
아픈 여자 이론은 대부분의 정치적 저항 방식은 내면화되어 있고, 생활화되어 있으며, 체화되어있고, 고통이며, 그리고 의심할 여지 없이 비가시화 되어있다는 주장이다. 아픈 여자 이론은, 주디스 버틀러의 불안정성과 저항성에 관한 최근의 연구를 따라서, 신체에 깃든 존재를 주로 그리고 항상 취약성을 지닌 것이라고 재정의한다. 버틀러의 전제는 신체가 단지 취약성에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취약성 자체로서 정의된다고 주장하므로, 이는 그 신체가 취약성을 견뎌내기 위해서 지지의 구조체에 지속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세계는 이를 바탕으로 재구성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아픈 여자 이론은 신체와 정신이 압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압제란, 특히 우리의 현 지배체제인 신자유주의, 백인우월주의, 제국적 자본주의, 시스-이성애-가부장제를 의미한다. 이는 우리 모두의 신체와 정신이 이 압제로 인한 역사적 트라우마를 안고 산다는 것을,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이 세상 자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업의 주제 대상으로써 “여자”라는 용어를 쓰는 이유는 전략적인 선택이며, 모두를 아우르는 포용성을 위함이며, 보편이 아닌 특정한 집단에 헌신하기 위해서이다. 비록 “여성”의 정체성이 여러 사람들(특히 유색인종 여성과 트랜스젠더/논바이너리/젠더플루이드)을 지우고 배제하지만, 여전히 여성이라는 단어는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 부차적인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해당 사항이 없는 사람들, 아닌 사람들, 부족한 사람들을 대표하기 때문에 나는 이 단어를 쓰기로 선택했다. 이 용어의 사용에 따르는 많은 문제적 상황은 항상 비평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나는 아픈 여자 이론이 나름의 방식으로 이들을 해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21세기에 여자가 된다는 것이 어떻게 아직도 급진적일 수 있는지 목격한 바가 있어 “여자”라는 단어를 쓰고자 한다. 나는 작년에 젠더플루이드로 커밍아웃한 내 소중한 친구를 기리기 위해 “여자”라는 단어를 쓴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것을 그 자신을 “여자”라고 부르고 대명사 “그녀”를 사용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호르몬이나 수술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과 커다란 성기를 사랑했으며, 이들을 바꾸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단지 단어를 원했을 뿐이다. 단어 자체가 힘(empowerment)을 실어줄 수 있다는 정신을 배경으로 아픈 여자 이론의 이름을 지었다.
아픈 여자는 특권적 존재, 혹은 특권적 존재 가 되리라는 몹시 낙관적인
기대를 부인하는 자라면 누구든 속할 수 있는 정체성이자 신체이다. 특권적 존재란 백인이며, 이성애자이고, 신체와 정신에 병이 없고, 상류층이거나 중산층이며, 비트랜스젠더이고, 장애가 없는 사람으로서 부유한 나라에서 가정을 지키는 사람이며, 건강보험이 없어 본 적이 없고, 그의 중요성이 사회 전반적으로 명확히 인지되어 있으며, 그의 중요성과 그를 위한 보살핌의
지배적인 위치가 다른 모두의 희생으로서 유지되고 있는 존재를 의미한다.
이러한 보살핌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아픈 여자라고 할 수 있다.
아픈 여자는 이 사회에 있어서 그를 위한 보살핌, 심지어는 그의 생존마저도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듣는 사람이다.
아픈 여자는 “기능 장애가 있는”, “위험한”, “위험에 처한”, “버릇없는”, “미친”, “불치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장애가 있는”, “질병이 있는”, “만성적인”, “보험 가입 자격이 없는”, “비참한”, “바람직하지 못한” 모든 이들이며, 이처럼 “기능 장애가 있는” 신체들은 여성, 유색인종,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신경 비전형성을 띄는 사람, 신체적으로 남들과는 다른 능력을 갖춘 사람, 퀴어, 트랜스, 그리고 젠더플루이드에 속한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병리화되었고, 입원되었고, 시설로 보내졌으며, 잔혹한 일을 겪었으며, “관리하기 힘든” 존재로 취급받았으며, 그 결과 문화적으로는 부적절한 존재가 되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비가시적인 존재가 되었다.
아픈 여자는 자신에게 가해질 폭력을 예감하여 공중화장실에서 공황발작을 일으키는 흑인 트랜스 여성이다.
아픈 여자는 역사가 지워진 채로 폭력과 식민화의 시대로 인한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부모를 두고 있는 자식이다.
아픈 여자는 온갖 병을 다 앓고 있는데도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하며, 받을 수 있는 정신과 의료 지원이란 주립병원의 72시간 응급입원뿐인 노숙자이다.
아픈 여자는 정신질환이 있는 흑인 여성이다. 그의 가족들은 그가 정신병증으로 고통스러워하자 도움을 받기 위해 경찰을 불렀고, 경찰에 구금되어있는 도중에 그는 살해당했으며, 이 이야기는 백인우월주의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에 의해 그런 일이 없었다는 부인을 당했다. 그의 이름은 타니샤 앤더슨이다.
7
아픈 여자는 50세의 게이 남성으로, 10대 때 강간을 당했으나, 남자는 강간을 당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에 함구하고 수치심을 품으며 사는 사람이다.
아픈 여자는 장애인 인권에 대한 강의가 장애접근성이 없는 공간에서 열렸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장애인이다.
아픈 여자는 성적 트라우마로 발병한 만성 질환으로 인해 침대에서 나서기 위해서는 진통제를 복용해야 하는 백인 여성이다.
아픈 여자는 우울증에 걸린 이성애자 남성으로, 사춘기 초반부터 약물 복용을 하며 관리해왔지만, 지금은 주당 60시간 근무가 요구되는 직장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아픈 여자는 만성 질환으로 진단받았는데,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그러게 운동을 했어야지 하며 지속적으로 핀잔을 듣는 사람이다.
아픈 여자는 유색인종 퀴어 여성으로, 백인 사회로부터 그의 사회운동, 지성, 분노, 우울을 그의 인격적 단점으로 평가받는 사람이다.
아픈 여자는 경찰에 구금된 흑인 남성이다. 그의 사인이었던 척추 손상은 공식 발표상 그가 스스로 일으킨 것으로 되어있었다. 그의 이름은 프레디 그레이이다.
8
아픈 여자는 재향 군인국의 의사에게 진찰을 받기 위해 몇 달 동안 기다리고 있는 PTSD를 앓고 있는 참전 군인이다.
아픈 여자는 싱글맘으로, “자유의 땅”으로 불법이민 해왔으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쓰리잡을 하고 있으며, 점점 숨을 쉬기가 힘들어지는 사람이다.
아픈 여자는 난민이다.
아픈 여자는 학대 아동이다.
아픈 여자는 자폐인이다. 세상이 그를 “치료”하려 든다.
아픈 여자는 굶고 있다.
아픈 여자는 죽어간다.
그리고 잔인하게도, 아픈 여자는 자본주의가 영속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사람이다.
왜일까?
왜냐면 자본주의가 돌아가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는 우리를 보살피는 데에 책임을 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착취 논리는 우리 중 몇몇은 죽을 것을 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질병”이란 자본주의의 구조하에 있으며, “질병”의 대립쌍은 “건강”이다. 그리고 “건강”한 사람이란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 “아픈” 사람은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건강을 보편적인 것으로, 기본적인 존재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생각이 파괴적인 부분은,
질병을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아프다는 것을 정상성에 따라 혐오로서 받아들일 때, 이는
보살핌과 지지 또한 일시적인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구성에서는, 보살핌이란 단지 가끔만 필요한 것이다. 질병이 일시적인 것이라면, 보살핌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지금 바로 실습을 해보자. 거울 앞으로 가서, 자신의 얼굴을 보며, 크게 소리내어 말해보자. “너를 돌본다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 아니다. 일시적으로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스스로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세상이 매 순간 반복해서 말하는 것의 메아리일 뿐이다.
6.
나는 이제 남아있는 반 자본주의적인 제스처라고는 사랑과 관련 있는 것, 특히 연애시가 뿐이라고 생각해왔다. 연애시를 쓰고, 사랑하는 이에게 전하는 행동은 급진적인 저항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는 것을 안다.
가장 반자본주의적인 저항은 다른 이를 보살피고 스스로를 보살피는 일이다. 그동안 역사적으로 여성화되고 그에 따라 비가시화되었던 역할인 간호, 양육, 보살핌을 자신의 일로서 맡는 것이다. 서로의 취약성과 섬세함, 불안정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지지하고 존중하고 힘을 싣는 일이다. 서로를 보호하고, 커뮤니티를 꾸리가 가꿔나가는 일이다. 급진적인 가족관계, 상호적인 사회성, 보살핌의 정치학.
왜냐하면, 만약 우리가 모두 아프게 되고, 그래서 침대에만 갇혀있게 되어서, 서로 위안을 나누고 치료 경험을 나누며, 지지그룹을 형성하고, 서로의 트라우마적 경험에 대해 증인이 되며, 우리의 아프고, 고통에 차 있으며, 비싸고, 민감하고, 환상적인 신체들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을 가장 우선으로 여기게 된다면, 일하러 갈 사람은 아무도 남지 않게 될 것이므로, 아마도 그때가 되면, 그제서야, 자본주의는 그토록 필요했고, 오래 지체되었으며, 존나게 영광스러운 정지로 인해 단말마를 지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는 원래 2016년 1월자 마스크 매거진 Mask Magazine에 한나 허 Hanna Hurr와 리플리 소프라노 Ripley Soprano의 편집으로 실렸다. 이 글은 미국 로스앤젤레스 WCCW(Women's Center for Creative Work)의 후원으로 미술관 휴먼 리소시스(Human Resources)에서 이루어진 2015년 10월 7일 자 강연 “내 몸은 고통의 감옥이므로 나는 신비롭게 떠나버리고 싶지만 나는 내 몸을 사랑하기도 하고 정치적으로 문제를 일으키고도 싶어”를 각색한 것이다. 영상은 이 곳9 에서 볼 수 있다.
필자 소개
요한나 헤드바
Johanna Hedva. 헤드바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작가이자 미술가, 음악가, 점성술사이다. 헤드바는 '마녀 집안'에서 자랐으며 현재는 LA와 베를린에서 살고 있다. 헤드바는 분노와 황홀을 통해 마법, 강령술, 예언을 창조하는 작업에 관심이 있다. 그러한 작업에 있어 헤드바의 과제는 언제나 몸이다. 몸의 급진적 침투성, 의존성, 연결성이 필연적으로 실패할 때, 어떻게 그것을 능가하고, 분무하고, 대처할 것인가? 궁극적으로 헤드바의 작업은 그것의 장르와 상관 없이 한 페이지에 적힌 단어들이거나, 방 안의 비명이거나, 물 사이로 손을 잡아 끄는 다른 종류의 쓰기다. 헤드바는 소설 “온 헬
On Hell”
(2018)의 작가이고, 현재 2020년 9월 출판 예정인 소설 “미네르바, 뇌의 유산 Minerva the Miscarriage of the Brain“을 집필 중에 있다. 자세한 정보는 다음의 웹사이트를 참조하라. (http://johannahedva.com)역자 소개
허지우. 법학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공부하려 했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
chihiro88@outlook.kr)
*이 글은 필자의 동의를 받아 다음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Sick Woman Theory”, 2016,
http://www.maskmagazine.com/not-again/struggle/sick-woman-theory
각주
1.
https://www.youtube.com/watch?v=fbYOzbfGPmo
2.
http://www.anncvetkovich.com/
3.
https://www.theatlantic.com/health/archive/2015/10/emergency-room-wait-times-sexism/410515/
4.
https://www.nydailynews.com/new-york/exclusive-woman-held-psych-ward-obama-twitter-claim-article-1.2159049
5.
http://www.cultistzine.com/2014/06/19/cult-talk-audrey-wollen-on-sad-girl-theory/
6.
https://www.amazon.com/Heroines-Semiotext-Active-Agents-Zambreno/dp/1584351144
7.
https://www.cleveland.com/metro/2014/11/cleveland_woman_with_mental_il_1.html
8.
http://data.baltimoresun.com/news/freddie-gray
9.
https://vimeo.com/144782433
더 읽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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