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의 생산적인 얼굴들: 엘스페스 프로빈과의 인터뷰






엘스페스 프로빈, 비비안 보자렉, 타마라 쉬퍼, 로넬 캐롤리센
번역: 양준호




수치심은 흔히 부정적인 감정으로 인식되어왔는데, 이 관점은 인간 경험에 대한 담론들을 심리학적으로 고찰하는 개인주의자들 사이에서 만연한 것이었다. 수치심에 대한 엘스페스 프로빈의 접근은 이들의 표현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있다. 인터뷰어로서, 우리는 교육과 학문에 대한 페미니즘 윤리와 생산적인 정동에 관한 공통된 관심사를 공유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의 구체적인 관심사는 프로빈의 저작 『홍조: 수치심의 얼굴들 Blush: Faces of Shame』에 있다. 『홍조』는 생산적이고 관계적인 과정으로서의 수치심의 정치학을 잘 보여주는 아주 탁월한 예시이다. 프로빈은 수치심이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과 연결에서 나온다고 제시한다. 이러한 연결은 자아에 대한 재평가를 통해 다른 이들과 공동체를 위한 관심을 구축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수치심은 포스트식민주의와 돌봄에 관한 페미니즘 정치 윤리학 및 조화를 시도하는 데 있어서 생산적인 힘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수치심에 대한 긍정적이고 관계적이지만 동시에 정치적인 관점을 주제로 하는 이번 특별호에 부합한다. 이 인터뷰는 『홍조』를 쓰던 중에 들었던 저자의 생각과, 이 책에 제시된 발상들에 영향을 미친 역사적이고, 이론적이고, 개인적인 영향들에 대해서, 그리고 이 책이 어떻게 과거와 미래의 생각과 실천에 관련을 맺는지에 대해 밝히는 설명을 제공한다.



비비안: 당신은 수치심의 생산적인 특성에 대해 쓰셨습니다. 생산적인 윤리적 실천으로서의 수치심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요?

엘스페스: 저는 윤리가 다른 사람에 대한 누군가의 행동, 말, 그리고 생각의 지속적인 성찰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수치의 쓰기, 혹은 수치에 대해 쓰는 것은 여러분이 글을 쓰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수치스럽게 하지는 않을지에 대한 깊은 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 윤리적인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홍조』에는 아직도 저를 부끄럽게 만드는 작은 조각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아마 제가 쓸 수 없는 것을 썼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글쓰기의 관점에서, 누군가는 그것이 진행 중인 대화이기를 바라야만 합니다. 저는 가장 순수한 형태로서 수치에 대해 쓰는 것은 매우 까다로운 윤리적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매 순간마다 여러분은 미리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군가의 사고, 글쓰기, 그리고 가르침에 계속해서 윤리적으로 동반되는 것입니다.


비비안: 마치 무구하지 않은 종류의 입장 같은 것을 떠올릴 수 있겠네요.

엘스페스: 정확히 맞아요. 『홍조』는 육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쓰기 굉장히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건 고통스러운 체현된 경험이었죠. 그리고 저는 10년 동안 다른 책을 출판하지 않았어요. 전엔 이런 적이 없었어요. 이 경험이 일으킨 진퇴양난의 상황은 때때로 괴로웠습니다. 저는 스토리텔링과 글쓰기의 실천에 많은 투자를 하는데, 사람들은 종종 제 글쓰기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곤 합니다. 하지만 저는 본능적으로 그 책에서 제 글이 진정시키는 접면interface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로넬: 다음 질문은 아마 당신이 방금 답했던 것의 연장선 상에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수 세기 동안의 식민지화와 수십 년간의 아파르트헤이트의 도전에 여전히 관여하고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상황과 같은 다양한 지정학적 맥락에 걸친 사회 정의와 변화의 노력에서, 수치심이 어떻게 생산적일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것이죠.

엘스페스: 저는 “생산적productive”이라는 용어를 푸코적인 의미에서 사용합니다. 즉, 생산적이라는 것은 좋거나 나쁜 것이 아니라 생성적인generative 것이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수치심은 맥락적이에요. 그래서 저는 여러분과의 대화를 준비하던 중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글을 읽었습니다. 물론, 제가 이것에 대해 이야기하리라고 예상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저는 그저 남아공에서 벌어지고 있는 특수한 충돌들 중 몇 가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을 뿐입니다. 호주나 캐나다에서 과거를 쓸어 없애는 것은 아마 비교적 쉬울 것입니다. 뭐, 다른 정부들이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해오기도 했죠. 저는 남아공 전체에 대한 지속적인 감정적 고통이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읽은 것들 중 일부는 수치를 주는 것shaming과 수치를 느끼는 것shame 사이의 차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저의 아주 제한된 관점에서 보자면 수치를 주는 일이 상당히 많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저에게는 수치를 느끼는 것과는 꽤 다른 일입니다. 누군가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무언가를 허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심오한 주체-내적인intra-subjective 순간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모든 면에서 생산적인, 깊은 심리적인 감정적 방해를 유발합니다. 수치심을 느끼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자아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생산합니다. 그것은 자아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생산하죠. 하지만 수치를 주는 행위는 조금 다릅니다. 그것은 누군가 또는 어떤 제도가 여러분에게 부끄러운줄 알아야한다고 말하는 것이지만, 만약 여러분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제도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도 자체를 수치스럽게 만들어서 그들이 실제로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매우 어렵죠.


타마라: 방금 전에 당신이 생산적인 수치심을 좋거나 나쁜것이기 보다는 생성적인 것을 의미하는 푸코적인 의미에서 사용한다고 명확히 하셨는데, 저는 이 점을 제 질문과 연결시키고 싶습니다. 백인 수치심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글들이 있는데요, 예를 들면 과거나 기억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글쓰기 서술 방식 속의 특권화된 수치심 같은 것들이요. 구체적으로 제가 참여했던 한 프로젝트가 있는데요, 아파르트헤이트 아카이브 연구 프로젝트가 바로 그것이지요. 이 프로젝트에서 연구팀의 멤버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고 나서 아파르트헤이트 하에서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적 이야기들을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젝트에는 백인들이 과거 아파르트헤이트로부터 자신들이 본 것에 대한 죄책감, 부끄러움, 불편함을 토로하는 이야기들이 꽤 많았습니다. 이 프로젝트의 연구원 중 한 명이자, 우연히 현재 당신이 있는 나라에 있는 질 스트래커는(예를 들어, 2011년 논문을 보라) ‘난잡한 수치심’에 대해 쓰면서 어떻게 수치심이 죄책감과 불편함을 지우고 저자를 자신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 긍정적인 시각으로 소개하기 위한 전략으로 배치될 수 있는지에 대해 논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어떤 것이 더 도움이 되는 수치심에 대한 생산적 이해이고, 또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수치심이 꽤 문제적인 방식으로 배치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러한 도전적인 이해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엘스페스: 네, 제가 읽고 있던 것이 바로 난잡한 수치심에 관한 그녀의 글과, 굉장히 흥미롭고 생산적이고 유용한 활동처럼 들리는 당신의 아카이브 프로젝트였습니다. 백인의 수치심은 다루기 어려운 것이죠. 제가 이 책을 썼을 때 말했듯이, 나/우리/비원주민들은 이 땅의 원주민에게 세대를 걸쳐 행해진 일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저에게는 제가 호주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 중요하진 않았죠. 문화적이고 육체적인 파괴의 거의 같은 관행이 캐나다에서도 일어났어요. 저는 호주의 심리학자인 그레이엄 리틀의 견해가 매우 유용하고 고무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치심을 없애기 위해 은유적으로 그들의 국가를 "유지"해야 할 지도자들의 의무에 대해 쓰고 있습니다.1 이와 비슷하게, 이브 세지윅과 아담 프랭크(2003)는 실번 톰킨스에게 있어 “공포스러운, 혹은 공포에 질린 아이디어나 이미지가 초반에 공포를 유발하지 않고 재발할 수 있을 때까지 ‘공포 반응을 소멸시키기 위해’ 어떻게 수집되어, 가능한 여러 단락에 걸쳐 보관되는지” 설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호주 원주민이 아닌 사람들이 겉보기에 자발적으로 그들의 수치심에 대해 말했을 때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수준에서 이 잠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순간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는, 바로 사라져버리죠. 우리에게는 정치적 의지가 계속해서 실패하는 사례들이 있고, 또 제도가 개입하고, 효과적으로 버티기를 시도하고, 그 강도의 일부를 출혈시키기를 시도하고, 이를 보다 생산적이고 색다른 방식으로 이끌기를 시도하는 사례들이 있어요.


비비안: 제 질문은 수치심과 죄책감에 관련된 것인데요, 저는 수치심을 느끼는 것이 당신에게 왜 더 생산적인 것인지, 그리고 당신이 수치심을 다른 정동들과 어떻게 구별하는지 질문하고 싶습니다. 예를 들면, 누스바움(2006)이 언급하는 죄책감과 역겨움, 그리고 분노는 모두 수치심과 어떻게 관련이 있을까요?

엘스페스: 죄책감을 회복적인 감정으로 특권화하는 누스바움(2006)의 논의는 제 주장 및 제가 의지하는 논변들과 상충합니다. 하지만 물론, 거기엔 뚜렷이 구별되면서도 연결되는 정동들도 있죠. 다만 저는 단지 죄책감이 사람들에게 회복을 가져다준다고 이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확신할 수 없을 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책감을 일상적인 방식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조직, 국가, 사람들은 종종 죄책감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그들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존 브레이스웨이트(1989)에 의한 회복적 수치심을 둘러싸고 다른 형태의 프로그램들이 등장했고, 이것은 때때로 효과가 있고 확실히 많은 기관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죠. 브레이스웨이트의 아이디어는 잘못을 저지른 개인을 소외시키거나 죄책감을 안겨주지 않는 마오리족 문화로부터 기인합니다. 오히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수치심을 느끼고 타인에게 저지른 일을 부끄러워하도록 장려됩니다. 죄책감이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을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버리는 반면에, 마오리족의 이런 조치는 그들을 공동체 안으로 다시 끌고 들어옵니다. 저는 정말로 죄책감이 누군가를 설득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비비안: 당신이 죄책감과 수치심을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해주실 수 있을까요?

엘스페스: 이론적으로 뭉뚱그려 말하자면, 죄책감은 그 자체로는 정동이 아닙니다. 혹은 최소한 제가 작업하던 톰킨스와 세즈윅의 패러다임에서는 그러합니다. 하지만 더 일반적으로는 죄책감은 특히 유대교와 크리스트교의 맥락에서 너무나 많은 짐으로 가득 찬 채로 유통되기 때문에 극도로 지저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앞서, 제가 푸코적 의미에서 생산적이 되는 것은 그것이 무언가를 생성하는 면에서 그렇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저에게 죄책감은 주체-내적인 측면과 상호주체적 측면 모두에서 그 어떤 시작 틈opening도 생성하지 않습니다.


비비안: 브라이언 마수미가 생산적이라고 내세운 정동에 대한 스피노자적 관점 또한 당신이 수치심을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인지 궁금합니다.

엘스페스: 네, 저는 마수미의 아이디어 몇 가지를 받아들였고, 특히 들뢰즈가 스피노자를 경유하여 제시하는 논변들을 더욱 깊이 받아들였습니다. 시드니 대학교의 제 동료 중 한 명인 모이라 게이튼즈는 아주 탁월한 스피노자주의 철학자입니다. 저는 마수미가 탁월하게 작업한 순수하게 추상적인 수준보다는 여러분 모두가 다루고 있는 사회 정의, 교육학 등의 이슈에 끌리고, 이런 이슈에 관한 이론적 작업을 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이러한 생각들이 어떻게 현장에서 작용하는지는 분명하게 집어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홍조』는 들뢰즈가 스피노자로부터 가져온 정동에 대한 이해에 굉장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제 초기 저작 중 하나인 『외부에 속하기 Outside Belongings』는 정말 들뢰즈적인 작업이었죠. 제 생각에는 제목이 그걸 요약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당신이 절대로 완전히 어딘가에 소속될 수 없을지라도 그러고 싶어하는 것 말이에요. 그리고 이건 조금 더 정신분석학적인 영역이나 주디스 버틀러의 아이디어(1993, 2006, 2015)의 일부로 가져올 수도 있을 겁니다. 제 작업에서 철학적인 아이디어를 탐구하게 하는 추동력은 어떻게 수치심이 현실 세계에서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실을 형성하여 우리 모두를 연결하고 있는지에 대한 사고의 외면성입니다. 저는 위트레흐트 대학교에서의 돌봄의 윤리에 관한 비비안의 동영상을 봤습니다. 저는 당신이 흑인과 백인 학생들을 함께 불러모으는 방식이 너무 좋았어요. 흑인 학생들이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상상도 못할 정도로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백했습니다. 반대로 백인 학생들은 그들의 특권에 걸려 넘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건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다양한 정동적인 움직임을 명확히 볼 수 있는 놀라운 순간입니다.


로넬: 그렇다면 수치심은 당신이 방금 말한 것에 있어서 항상 타자와 긍정적인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관심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사람들은 항상 건설적인 방식으로 수치심을 끌어들이나요?

엘스페스: 글쎄요, [웃음 소리] 누군가는 그걸 바랄지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렇진 않을 거 같네요. 다시 말하자면, 톰킨스의 이론적 틀은 잠재적으로 끊어진 것에 대한 긍정적인 연결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관심interest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알 수 있죠. 관심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 사이를 연결하는 작고 깨지기 쉬운 실 가닥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관심을 갖지 않던 어떤 것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수치심을 느끼지는 않을 겁니다. 예를 들어, 도널드 트럼프를 보세요. 여러분은 그를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주의자, 혹은 다른 많은 것들로 부를 수 있지만, 저는 그가 과연 이것에 대해 신경을 쓸지 의문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들의 측면에서, 저로서는 외부인인 제가 수치심이 생산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 창피하기도 합니다. 또한 작동 중인 다양한 형태들을 보는 것 또한 중요해요. 강간의 경우에는 여성들은 수치심을 느끼지만, 그것은 누군가에게 수치심을 강요하는 수치심의 힘입니다. 강간의 경우에 여성이 느끼는 것은 물론 분노, 격분, 그리고 수치의 혼합물이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구조적/문화적 환경을 고려해볼 때, 분노는 수치심만큼 목소리를 얻지 못합니다. 여성들은 우리가 수치심을 느꼈다고는 말할 수 있지만, 분노를 느꼈다고는 말할 수 없도록 계속 주입당해 왔습니다. 하지만 여성들이 강간당하는 것에 대해 수치스러워해야 한다는 불쾌한 생각에 대항하기 위해 분노가 다시 방패로 동원되는 많은 정치운동들이 있습니다.


로넬: 분노에 대해서 조금 더 이야기 해주실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제 생각에 분노는 많은 면에서 충분히 표현되지 않은 정동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사람들이 이것에 대해, 그리고 이것이 수치심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엘스페스: 저는 연구를 하면서 감정을 인식하는 방법, 감정과 함께 작업하는 방법 등 감정에 대해 꽤 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리고 제 글의 전체를 통틀어 저는 광범위하게 다양한 감정들을 이용했어요. 몇 년 전, 저는 분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야 했고, 이는 “유리 자아: 감정, 주체성, 그리고 연구 과정”(2011)으로 출판됐지요.

이 논문은 제 동료와, 소아과 병원에서 거식증 치료하는 소아과 의사와 함께 진행한 연구 프로젝트의 경험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저는 포커스 그룹에서 제가 어떻게 소녀 환자들에게 말했는지에 대해 다시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제가 여러분 나이였을 때 저는 거식증 환자였고 병원에 있기도 했었습니다." 그들은 매우 밝아 보였지만 동시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소녀들이기도 했죠. 소아과 의사는 제 행동이 극도로 전문가답지 않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저는 소아과 의사와 의료기관에게 화가 났고, 여자 아이들을 위해서 화가 났습니다. 하지만 마치 거식증을 앓은 제 경험이 더러운 비밀로 만들어진 것 같아서 또한 부끄럽기도 했습니다(할스 외, 2010). 이 장면은 숀 갤러거(2011)가 편집한 『옥스포드 핸드북: 자아』라는 책에 있는 ‘유리 자아: 감정, 주체성, 그리고 연구 과정’이란 제목의 제 글의 한 챕터 속 문장과 공명합니다. 글에서 저는 “제 자신이 유리 같이 느껴져요. 모든 사람들이 제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너무 화가 납니다.”라고 말한 인터뷰 대상자를 인용했어요. 이 젊은 거식증 환자들이 항상 마치 주체성이 없는 것처럼 [타인에 의해] 꿰뚫어 보여진다고 느낀다는 사실은, 제 글을 격분과 분노로서 북돋아 주었습니다. 또한 저는 엘리자베스 스펠만(1999)의 ‘분노: 일기’ 라는 멋진 작품과도 함께했습니다. 스펠만(1999)은 분노와 격분이 페미니즘 내에서 얼마나 중요한 감정인지, 그리고 계속해서 그래야하는지 상기시켜줍니다. 중견 여성 연구자로서, 여러분이 화가 나거나 또는 화를 내면, [빙그레 웃음] 창피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우린 모두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렇죠. 분노와 수치심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타마라: 엘스페스 씨, 페미니즘 행동주의와 사회 변화를 위한 학술적, 물질적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에 대해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조금 얘기해주실 수 있나요? 이론과 실천 모두에서, 페미니즘 운동은 거의 틀림 없이 가부장제와 젠더화된 폭력에 대항하며 분노와 얽힌 수치심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촉발되었습니다. 수치심과 수치 주기는 여성 운동과 행동주의의 분노를 표현하기 위한 메커니즘이자 정치적인 주장을 펼치기 위한 전략으로 배치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견해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 수치 주는 실천에 관여하지 않고 어떻게 사회정의 정치, 페미니즘 운동 또는 탈식민지 운동의 정치를 할 수 있을까요? 혹은 수치를 주는 실천이 도움이 되기도 하나요?

엘스페스: 확실히 좀 어렵긴 하죠? 저는 우리 모두가 같은 경험적 배경은 아니더라도, 같은 세대에 걸쳐 있다고 추정하는데요. 우리는 정치적인 배경에서 행동주의의 물결들과 다양한 형태의 페미니즘 정치학을 통과하며 살아왔죠. 『홍조』에는 수치를 주는 사람과 수치를 당하는 사람에 대해, 정확하게는 어떻게 수치심이 특정 페미니즘과 다른 진보적으로 추정되는 형태의 정치학 속에서 사용되어 왔는지에 대한 챕터가 있습니다. 저의 예전 박사과정 학생 중 하나인 케이트 오할로란은 캠퍼스 내의 퀴어 학생들의 활동가 집단들이 어떻게 수치심을 항상 이용하는지에 대해 아주 훌륭한 학위 논문 작업을 했습니다. 수치심은 어떤 행동들을 ‘충분히 퀴어하지 않은’ 것으로 소환하는 데 사용됐죠. 저는 오늘날의 학생들 자체가 변했고, 캠퍼스에서 만들어지는 정치 또한 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저희 대학은 점점 더 특권화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사립 학교에서 아름답게 모조된 일류대학으로 직행하는 길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여성학 센터에서 학과를 시작하고 발전시켰을 때, 우리는 성숙한 나이의 학생들과 문화적으로 다른 배경을 가진 많은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서로 매우 다른 인생 경험을 가짐으로써 좀 더 미묘한 차이의 정치를 더 정교하게 하는 학생들이었습니다. 이제는 우리는 “이성애규범성”과 같은 단어를 벗어던져버리는 조금 더 동질적인 조직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들이 페미니즘으로부터 배운 것이지요. 그럼에도, 이것은 또한 “충분히 퀴어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는 것들을 수치스럽게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모든 “소환”의 정치를 굉장히 문제적으로 생각합니다. 여기서 판단하는 자는 누구인가요?


비비안: 지금 여기에도 그런 일들이 많이 있어요.

엘스페스: 저는 ‘젠더와 문화 이론’이라는 이름의 석사 과정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걸 1980년대 후반부터 계속되고 있는 논쟁의 역사로서 가르칩니다. 과정생들은 예를 들면, 권력과 국가의 구조적, 주체적 매커니즘과 페미니즘이 어떻게 인종, 종족성, 계급 등에 관한 질문들과 고군분투해왔는지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알튀세르와 푸코에 대한 테레사 드 로레티스의 글들을 읽습니다. 몇몇의 학생들에게, 특히 중국 유학생들에게 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지만, 다른 학생들에게 이것은 문화적 기억 상실과 같은 것을 바로잡는 작은 방법이 됩니다. 학생들은 이것을 좋아하는 것 같고, 또 지금처럼 당시의 다른 견해들이 얼마나 뜨겁게 논쟁을 벌였는지에 대한 역사를 점차 이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비비안: 하지만 지금은 좀 바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본질주의적 정체성 정치가 부흥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제 딸은 남성들이 과연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젠더 연구 프로젝트를 막 마쳤습니다. 몇몇 남성들은 그들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혼란스러워했다고 제 딸이 말하더군요. [소리내어 웃음] 제 가족들은 이런 종류의 대화를 합니다.

로넬: 저도 굉장히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프로빈: 네, 그건 여러분이 고리타분하다고 느끼기에 충분해요! 그리고 네, 저는 여러분이 웨스턴 케이프에서 하는 같은 선상에 있는 몇몇 코스들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이건 쉬운 독해가 아니기 때문에 어려워요. 제 말은, 흠, 심지어 저도 제가 이전에 쓴 것들을 읽을 수가 없어요. [인터뷰어들 웃음] 하지만 이것들이 새로운 질문이 아니란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페미니스트의 진정한 풍성함을 이해하려면 당신은 이 역사의 일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명백하게 그 역사에 참여했고, 또 실제로 그러한 논쟁들을 부추겼던 유색인종 여성 작가들의 역사를 펼쳐보려 시도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당시의 쟁점이 오늘날과 같은 방식으로 틀지어졌다거나 우리가 그 당시에는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연결들을 인식한다면 우리와 더 젊은 학자들이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로넬: 만약 당신이 수치심에 관한 다른 책을 써야한다면, 당신이 지금까지 해왔던 이야기들을 고려해봤을 때 당신은 어떻게 그 논의를 끌고 갈 것인가요? 최근 당신의 작업들이 다른 방향을 취했다는 걸 고려했을 때 이 질문이 조금은 불공정한 질문일 수는 있겠지만요. 하지만 뭐, 그냥 사고 실험 같은 거죠.

엘스페스: 저는 제가 수치심 그 자체에 대한 다른 책을 쓸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요. 비록 분명한 방식으로는 아닐지 몰라도, 제 저작들은 그 다음으로 연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과 성교하기 Sexing the Self』(1993)는 『외부에 속하기』(1996)로 이어지고, 『육욕적 식욕 Carnal Appetites』(2000)로 이어지고, 『홍조』(2005)로 이어지고, 그리고는 『바다를 먹기 Eating the Ocean』(2016)로 이어지죠. 저도 이게 저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장담할 수 없어요. 『바다를 먹기』에는 수치심과 수치 주기에 대한 내용이 조금 있습니다. 혹은 적어도 제 주장은 우리가 지속가능성의 정치를 단순화하고 도덕화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일부 NGO들이 “당신은 이것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은 그걸 해선 안 됩니다”와 같은 측면에서 취하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수치를 주는 자리이죠. 그리고 제가 수산업에 대해 좋아하는 것은 여러분이 “아니요, 저는 생선을 먹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논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전세계 어획량의 25%는 오메가 3로 보강된 흰 빵이나 야채용 유기농 비료와 같이 여러분이 알지도 못하는 것에 동원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랜 시간동안 정체성의 정치학과 끊임없이 씨름해왔고, 식품 정치학에서는 “저는 비건이고, 따라서 제가 어떻게 식품을 둘러싼 세계적이고 지역적인 북반구-남반구의 권력 순환에 연루되어 있는지 그 복잡성에 대해 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입장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제가 과장해서 말하긴 했지만, 저는 식품 정치학이 바로 당신이 최근의 일부 본질주의적 버전의 페미니즘에 대해 말했던 것과 같이 꽤 본질주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글은 SAGE 출판을 통해 정식으로 아래의 글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Elspeth Probyn, Vivienne Bozalek, Tamara Shefer, et al, Productive faces of shame: An interview with Elspeth Probyn, Feminism & Psychology 29, issue 2, (2019), 13p.






필자 소개 
엘스페스 프로빈 Elspeth Probyn는 현재 호주 시드니 대학의 젠더와 문화 연구 학과의 교수이다.
비비엔 보자렉 그리고 타마라 쉬퍼 Vivienne Bozalek and Tamara Shefer는 남아프리카 웨스턴 케이프 대학 소속이다.
로넬 캐롤리센 Ronelle Carolissen는 남아프리카의 스텔렌보쉬 대학 소속이다.


역자 소개
양준호.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며 과학기술학, 페미니즘 이론, 퀴어 이론 등에 관심을 갖고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정확히 뭘 공부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계속 뭔가를 읽다 말다 반복하고 있다.





1. 슬프게도, 그가 몇 년 전에 세상을 떴다는 것을 밝힌다(캐시, 200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