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not kin)를 먹지 않기로 응답하기



허주영


1. 생존 은유

친구란 무엇인가? 아마 먹는 것은 아닐 것이다. 씹어 삼킨다는 의미에서 먹지 못할 것은 없겠지만 먹는 순간 나는 친구를 잃을 것이며, 세상 사람들에게 왜 친구를 먹었는지 해명하기 위해 평생을 소진해야 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친구라는 존재란 먹기엔 너무 소중하면서 동시에 참을 수 없을 만큼 거북하다.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 혹은 인간과 비인간 등 먹이 사슬의 계급을 뛰어넘는 우정에 대한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들을 전해 들은 바 있을 것이다. 어린이 대상 TV 애니메이션들은 많은 경우 동물이 조력자이거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떤 몬스터 형태의 동물들은 인간의 언어로 말을 했고 또 어떤 것들의 언어는 상상 가능한 동물 특유의 소리로 재현되기도 했다. <디지몬 어드벤처>의 디지몬 파트너들이 인간의 말을 하는 것이 말이 되는지, <포켓몬스터>의 몬스터가 인간의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 정확한 고증인지 친구들과 진지하게 싸웠던 것은 인간 동물이 비인간 동물들과 함께 위기를 헤쳐나가며 삶을 공존하는 모델을 그럴싸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매우 인간적으로 쌓아온 앎과 경험 속에서 나는 낯선 존재들과 친구로 혹은 친족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이글은 도나 해러웨이 D. Haraway의 아름다운 은유와 말장난, 특히 “아기가 아닌 친족을 만들자 Make Kin Not Babies”라는 구호가 만들어내는 촘촘하고 느슨한 생태 정치 속에서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한다.

해러웨이는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아기가 아닌 친족을 만들자”고 선언한다.1 이는 종차별에 대한 새로운 생태 정의를 위해 계통과 친족, 친족과 종으로 맺고 있는 끈끈한 연결들을 이종 간의 관계들로 확장하고자 하는 시도이다.2 공-산 논의를 관통하는 주요한 키워드인 ‘반려종’은 두 개 이상의 종이 공-산 sympoiesis3하는 새로운 관계성이다. 해러웨이는 출산과 혼인 등 계보 혹은 법률관계를 통해 묶이는 관계 너머 인간과 오랜 시간 가까운 거리에서 공진화해온 개, 고양이, 새 등 반려동물뿐만 아니라 미생물까지 포함하는 차원에서 생명들의 연결을 포착하고자 한다. 해러웨이의 생태정치는 『사이보그 선언』과 『반려종 선언』 이후 환경위기의 원인을 인간종 전체로 돌리며 미래에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하는 인류세 비판을 통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러한 심각한 환경파괴와 기후 위기 속에서 ‘아기가 아닌 친족 만들기’는 긴급 구호이자 요청이다. 개와 고양이와 같은 친밀한 동물들뿐만 아니라 만나본 바 없는,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다른 종과 어떻게 친족을 맺어야 하는 걸까? ‘친족 만들기’는 ‘응답력 response-ability’을 요구한다. 다종 간의 관계 맺기 과정에서 다른 종을 이해하기는 매우 관계적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므로, 응답하기 위해서 나에게 걸어오는 말들을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해러웨이는 인간과 비인간 모두에게 다종과 관계 맺을 의무가 있다고 간주하지만, 책임의 무게에 차이를 뒀다.4 인간은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응답력을 길러야 하고, ‘누가 어디에서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가?’라는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촉수 tentacular를 세워야 한다고 말이다.

불분명하고 모호하지만 방향의 의지를 가진 문장들은 느슨한 연결로 틈을 만든다.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새로운 관계 맺기는 매우 윤리적이지만, ‘친족’의 은유가 드러내고 동시에 숨기는 것들이 긴급성의 긴장을 유지하기 어려워 보이는 것은 왜일까? 나에게는 애를 낳을 힘과 인류를 지금보다 더 많이 사랑할 시공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아기가 아니라” 부분은 꽤 자신 있게 해낼 수 있겠다. 그러나 ‘친족 만들기’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상상은 먹고 사는 일상의 문제를 맴돌다가 생물 및 비생물에 대한 내가 읽고 자란 것들을 증오하도록 유인한다. 예컨대 반려종과의 관계를 가족 체계 안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어떤 종의 죽음에는 슬퍼하지 못하도록 길들여졌다는 점은, ‘친족’ 은유에 사회화된 냉소를 보내게 한다. 게다가 해러웨이가 백인 여성임을 고려할 때, 그의 상상력을 공평하게 배분받지 못했다는 피해의식이 발동한다. 나는 백인이 아니기에 이 웅장한 구호 속에서 ‘나’의 위치와 역할을 발견하는데 거듭 실패한다. 그러나 끈끈함을 넘어 끈적이는 친족이라는 관계에서 핏물을 빼내며 의미 구조에 환기와 트러블을 발생시키는 그의 문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가슴이 따뜻해지고 세상을 긍정하는 힘을 얻게 된다. 더불어 해러웨이의 논의는 상상력을 광범위하게 아우르면서 내가 놓치고 있거나 닿지 못하는 지점들에 나를 물리적으로 옮겨놓는다.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부터 내가 알아서 적용-실천-생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러웨이도 자신의 멋지고 아름다운 구호를 사랑하는 자들, 자신이 옮겨 놓은 새로운 지식의 장 안팎에서 미아가 된 자들에게 “아이가 아니라”와 “친족을 만들자”는 둘 다 좀처럼 쉽지 않은 일임을 경고하며, 차이를 넘는 “최고의 감정적·지적·예술적·정치적 창의성을 요구”5한다. 와이즈먼은 해러웨이의 생식학 중심의 글쓰기와 난해한 문장들이 오히려 자신이 옹호하는 노동 영역의 여성들을 소외시킨다고 비판한 바 있지만,6 이 글에서 나는 모호함을 빌미로 해러웨이의 글쓰기 방식, 그 자체를 비판하려고 드는 것이 아니다. 나는 오히려 1. ‘친족’이라는 은유가 지나치게 드러내는 것, 2. 위기로의 ‘응답’ 이전의 위기로부터의 말 걸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밀림의 왕 레오>의 한 장면. 



2. 친구 사이에 일어나는 일

  <밀림의 왕 레오> 여덟 번째 에피소드에서 사자와 표범 등 육식 동물들은 초식 동물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엉엉 울면서 풀을 뜯어 먹는다. 곧 자신의 입으로 들어갈 건초를 바라보는 육식 동물은 초식 동물 앞에서, 죽음을 앞둔 사냥감처럼 온몸을 벌벌 떨며 눈물을 흘린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풀을 씹어 삼킬 수밖에 없었던 것은 레오가 세운 밀림의 새로운 법 때문이다. 레오는 밀림의 왕으로서 경계 안에 사는 동물들이 서로를 잡아먹지 않는 방식으로 함께 살아가도록 한다. 규칙 아래의 시민들은 먹고 먹히던 서로에게 친밀해져야 한다. 하루아침에 육식 동물에게 건초를 먹고 살도록 하기가 쉽지 않은 과정임을 알게 된 밀림의 왕이 다른 방안을 모색하고자 하는 야망의 눈빛을 반짝이고 있던어느 날, 메뚜기 떼가 밀림의 식량들을 쓸어버리는 위기가 찾아온다. 레오의 지시하에 밀림의 동물들은 힘을 모아 메뚜기 떼를 동굴로 유인해 가둬두고 그들을 고단백 식량으로 삼는다. 메뚜기 에피소드는 폐허가 된 밀림을 이종 간의 협력으로 복구했다는 점에서 성취감과 감동을 준다. 하지만 밀림의 생명들과 함께 어울려 살고자 한 레오와 동물 시민들에게도 메뚜기가 지속 가능한 대체 식량이자 ‘뉴노멀’이 될 수 있었을까?

적어도 메뚜기 에피소드는 친구를 먹지 않는다는 교훈을 주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육식 동물이 사냥을 그만둔 이유는 초식 동물이 더 이상 먹이가 아닌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밀림의 공-산은 육식 동물들의 육식 욕망 참기로 유지되지 않는다. 이제 육식 동물은 초식 동물이 뭘 먹고 사는지, 입에 넣으면 눈물이 줄줄 나는 건초를 어떻게 먹을 수 있는지 알아가면서 서로의 삶에 대한 앎을 공유하고 개입한다. 밀림의 새로운 규칙은 동물들간의 영향 관계를 재배치한다. 동물들은 서로와 형제자매, 부모자식 관계를 맺지 않고서도 밀림에서 부분적인 동시에 집합적인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 반면 인간은 음식이 되는 동물과 친구가 되는 동물을 나누는 일에 이미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밀림에서는 육식 동물 전체와 초식 동물 전체가 서로 친구를 맺었지만, 인간은 하나의 종과 또 다른 종의 만남이 아닌, 각기 개별적인 상황 속에서 관계를 맺는다. 먹어도 되는 존재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존재의 구분은, 종의 차이가 아니라 경험과 지식에서 오는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내가 무당벌레를 사랑하게 된다고 해서 곤충의 모든 종과 풀에 사는 벌레 전체를 사랑한다는 의미로 귀결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먹을 수 있는 관계와 먹지 못하는 관계는 모두 가까운 사이를 유지하지만, 음식이 되는 동물과의 관계에서는 익숙함을, 친구가 되는 동물과의 관계는 친밀함을 느낀다.

잡식 동물이지만 매우 보수적인 인간의 식食영역은, 익숙한 것만 입에 넣어 왔다. 익숙하지 않은 관계에 놓인 종을 먹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뿐 아니라, 비위생적인 것, 오염원으로 인식된다. 예컨대 초기의 수렵인들은 곤충을 훌륭한 식량으로 여겼지만, 농업의 발달로 곤충을 해충으로 인식하면서 관계가 멀어진 역사가 있다. 한편 곤충식 문화가 발달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곤충을 익숙한 식자재로 사용해왔고, 지금은 다시 메뚜기, 밀웜, 누에 등의 곤충을 미래의 식량으로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곤충을 침입자이자 계절의 불청객으로 여긴다면, 곤충식은 익숙해지거나 친밀해질 수 없다. 낯선 실재들은 먹기엔 너무 낯설다. 먹을 수 있는 것은 일상적으로 마주칠 수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니 우리 인간들은 타임라인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귀여운 동물 ‘밈’을 보면서도 기꺼이 같은 종의 동물을 밥상 위로 올리는 일상을 보낼 수 있으며, 삼겹살을 보고 돼지를 떠올리지 못하고, 양갈비를 보고 양을 떠올리길 힘들어하는 것이다.

식량 혹은 고기로 인식되어온 동물들과 반대로, 개와 고양이는 인간과 오래 상호 의존 관계를 맺어온 서로의 반려종이다. 이들은 관계적 사유가 가능한 거의 유일한 비인간 동물일 것이다. 매우 가까운 과거에도 길거리에 보신탕집 간판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개고기를 먹어온 시간에 비해 그 수는 매우 빠른 속도로 줄어들고 있다. 한국의 중·노년층 남자들도 더는 개고기를 즐겨 먹지 않고, 이는 복날에도 마찬가지라 대부분의 가게는 주메뉴를 염소탕, 소머리 곰탕, 오리 백숙 등으로 바꾸고 있다. 인간과 친밀감을 쌓아온 생물종을 먹는 것은 염소, 오리 등을 먹는 것보다 야만적인 것이고, 심지어 오랜 친구인 개를 먹는 것은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인식이 퍼진 까닭이다. 반대로 인간과 공-산해온 역사가 짧거나 단절적인 종을 먹는 것은 잡식 동물로서 인간의 비애이며,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섭취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 역시 공고해진다. 즉 친밀한 종과의 공-산은 자연의 섭리이지만, 그러지 못한 타자에게 있어 인간은 먹이 사슬에 충실히 복종하는 무고한 동물이 된다는 것이다.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인구의 증가가 보신탕이라는 음식 문화의 강도를 약하게 만들었으나, 그것이 육식의 감소로 이어지지 않는 것은 인간이 종 안팎으로 관계 맺어온 방식이 매우 상황적이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해러웨이는 다종 간 친족 만들기는 보편적이고 개체의 연결이 아닌 부분적 연결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을 신신당부한다.7 일반화를 경계하고 응답에 실패하는 과정들에 찍은 방점들에 동의할 수 있지만, 이미 인간은 해러웨이가 말한 관계적 사고보다 더 좁고 분명한 의미에서 이종과의 관계 맺기를 상황적으로 인식해왔다. 과장하자면, 관계적 사고가 인간종이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 맺기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모든 관계의 단위를 친족으로 보는 버릇을 반려종에게도 적용해왔다. 비인간 반려종의 반려인은 엄마, 아빠, 언니, 오빠 등 부모가 되고 형제자매가 되고 친척이 된다. 각기 다른 반려종 사이도 예외가 아니다. 늙은 고양이는 강아지의 이모나 삼촌이 될 수 있다. 혼종의 정상 가족을 구성하는 장면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인간이 반려종과 함께 사는 이유란 책임감이라는 치유 행위 혹은 중독에 빠져들었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특히 귀여움이라는 감각은 반려종에게 무해한 이미지를 강요함으로써 힘의 불균형을 유지하려는 새로운 형태의 공격성일지도 모른다. 해러웨이는 엄마 노릇을 하고자 하는 버릇은 반려종을 미숙한 존재로 만들고, 반려의 의미인 존중과 신뢰를 퇴색시키는 실수라고 지적한 바 있다. 반려종을 아기와 같은 돌봄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버릇을 서툰 사랑 표현이자 서로에 대한 책임의 선언이라고 이해한다면, 두 반려종의 관계는 매우 개체적이면서 동시에 관계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가족 관계도 안에서 세워지는 다종 간의 관계 범위는 단절된 형태로 얽힌다. 즉 인간과 반려종의 관계를 가족이라는 은유 구조를 빌려 이해하면, 반려종은 어린 인간이 된다. 친족 만들기는 응답하기를 통과하면서 집합적 관계망을 확장하지만, 가족 관계도에 반려종을 초대하는 일은 응답이 아닌 말하기, 혹은 복종시키기에 가깝다.

다종 간의 ‘친족 만들기’와 반려종을 가족 관계도 안에 세우기는 매우 다른 방식의 관계 맺기를 수행하면서도 기원과 혈통과는 절연한다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즉 ‘친족 만들기’는 여전히 친족을 떠올리게 하면서 친족을 해체한다. 이러한 점에서 해러웨이의 논의는 현체제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긍정적으로 명명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익숙한 의미구조를 통해 새로운 의미구조를 설명하는 은유를 응원하고, 그러한 말장난을 좋아하는 것은 아마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 이렇듯 ‘친족 만들기’는 이성애 남성 중심의 정상 가족 재생산에 연루되기를 거부하는 맥락 속에서 탄생했지만, ‘친족’은 안락함 속에서 여전히 끈끈한 불쾌감을 품고 있다. 상호 보완적인 다종 간의 관계 맺기가 ‘친족’의 의미 구조를 통과하기에는, 친족은 보수적이며 폐쇄적인 사랑, 돌봄의 감각으로 점철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친족 만들기’가 아닌 ‘친구 만들기’라면 어땠을까? ‘친족’은 기존의 가족 구조의 의미를 빌려오면서 이성애 중심의 재생산을 해체하지만, 친구는 재생산의 정상성과 혈통 관계에서 벗어난 연대가 가능하고 ‘친족’보다 느슨하게 짜인 관계망 속에서 더욱 자유로운 부딪침과 관계 변이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게다가 이해가 쉽다!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해러웨이의 구호는 다종적 생태정치의 상상력을 제공하지만, ‘친족’의 은유가 강도 높은 연결의 감각을 앞세운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3. 위기는 누구에게 먼저 말을 거나?

‘친족 만들기’는 다종과의 응답력 기르기를 통해 실현된다. 인류세 논의가 인간종을 위기의 원인이자 동시에 구원자로 만든다면, ‘친족’ 개념은 타자에 촉수를 세우고 긴급한 위기에 ‘책임’이 아닌 ‘응답’을 통한 다종과의 관계 맺기를 도모한다. 질문이 있어야 대답이 가능한 것처럼, 응답은 말 걸기로부터 시작된다. 말을 거는 것은 무엇이고, 말 걸기의 수신지는 어디이며, 응답을 해야하는 쪽은 누구인가? ‘친족 만들기’가 긴급한 위기 상황의 구호임을 상기하면, 말을 거는 것은 위기, 그 자체이다. 위기에 ‘응답하기’는 언제나 위기의 말 걸기 속에서 가능하다. 인류는 위기에서 벗어난 적 없고, 말그대로 부풀어지는 위기 속에서 점점 최적의 응답 조건을 갖춰가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위기는 공평하게 수신되지 않는다. 가령 공평하게 수신되더라도 위기는 취약한 곳에 먼저 들러붙어 말을 건낸다. 이는 우리가 팬데믹의 한 가운데서 경험으로 얻은 일종의 지식일 것이다. 그런데 정녕 위기 속에서 ‘친족 만들기’는 가능한가? 해러웨이의 구호는 지구상에 함께 사는 모두를 향하지만, 인간종에게 더 많은 윤리적인 책임과 모호한 역할의 차이를 두었다. 세계 자본을 주무르는 큰 손들의 책임과 역할이 막중하겠지마는, 범주를 벗어난 ‘친족 만들기’는 지구상의 모두가 함께 만들고, 함께 되고, 함께 연대하고, 함께 구성하며 공-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공-산의 과정에서 실패는 중요하다. 다종 간의 응답력 기르기가 익숙한 삶의 방식을 뒤흔든다는 점에서 실패는 필요를 넘어 필수에 가깝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해러웨이가 기존의 구조를 (비판하면서 동시에) 긍정하는 중이라면, 이거 긴급한 거 맞나? 하는 의심의 눈알을 굴리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새로운 생태 정치의 제안은 인류세 논의의 비판 지점들(생태 문제를 분리시키고 인간 혹은 자본으로 단순화하는 점)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긴급한 위기의 수신자들을 응답의 강력한 주체로 내세우기 보다, 여전히 덜 긴급한 곳에 책임의 차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구호의 긴급성은 모호해진다. 인간종 사이에서도 응답력이 요청되는 강도는 다르다. 우리를 모두 “퇴비 compost”라고 한대도 토착민과 북반구의 백인들이 위기의 긴급성에 기여하는 바에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친족 만들기’는 위기가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과 응답력의 책임을 지고 있는 곳 사이의 시공간 차이와 물리적 거리를 크게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 즉, 위기가 가장 먼저 말을 거는 위치는 해러웨이가 응답력을 가장 강력하게 요청하는 위치와 다르다. 반복하자면, 위기는 공평하지 않고 취약한 곳에 가장 먼저 들러붙는다. 위기가 가장 먼저 말을 거는 위치와 위기에 적극적으로 응답해야 하는 자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긴박한 모습을 한 위기는 응답을 가만히 기다려주지 않는다. 위기 속에 사는 생명들은 화석 연료 등 이산화탄소 배출, 가축식 농장과 단일종 생산 농업 등 위기를 촉발하는 거대 자본과 세계 정상들의 응답, 그리고 유효한 응답을 위한 실패들을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일이다. 예컨대 공평하는 않은 관계들과 친족 맺기를 요청할 때, 밀림의 기후 위기와 식량 부족 문제 앞에서 동물들은 실패의 사치를 부릴 수 있을까?

여기서 다시 <밀림의 왕 레오>의 메뚜기 에피소드를 불러오자. 밀림의 왕이 구축한 문명화된 세계에서는 공동체로 맺어진 친구를 먹지 않고, 이웃을 해치지 않고, 나와 닮은 자를 죽이지 않으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 삶을 위협하는 강력한 외부 침입자로서 친구가 될 수 없는, 혹은 되지 못한 메뚜기떼를 대체 식량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밀림의 왕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레오는 메뚜기를 계속 먹고 살기 위해선 메뚜기도 함께 살아야 한다는 점을 놓친 것 같다. 메뚜기떼는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의 관계 완화와 공-산을 위한 매개자가 되기 위해 밀림에 도착한 것이 아니다. 메뚜기떼는 예고 없이 밀림의 하늘과 땅을 점령했고, 낯선 위기는 다종과 새로운 영향 관계를 생성한다. 생태계의 지속은 어떤 죽음을 불가피하게 만들지만, 밀림의 초원을 내어주지 않고 메뚜기를 모두의 대체 식량으로 삼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인간세계를 적극적으로 모방한 밀림에서 동굴을 곤충 양식장으로 만들낸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곤충 양식은 탄소 배출량이 비교적 낮지만, 메뚜기떼가 먹을 곡식을 동물과 어떻게 배분하고 공급할 것이며, 폐쇄적이고 밀집도가 높은 공간이 메뚜기떼의 번식에 적절한지 등 매우 단편적인 문제들만 떠올려보아도 이것이 지속가능한 모델이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메뚜기떼를 잡아먹는 것과 식량 창고인 동굴에 가두어놓는 것은, 메뚜기의 죽음이라는 결과에서 다르지 않다. 그러나 메뚜기떼가 먹이로서 식량 창고에 저장되는 것과 밀림의 초원의 공동체로서 사냥의 타깃이 되는 것은, 생명과 생태계 지속성에 있어서 매우 큰 차이가 있다. 밀림의 동물들은 자신들의 경계를 넘어온 메뚜기라는 낯선 침입자들을 동굴에 가두고 새롭게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지만, 위기는 먹어 삼키거나 가두어 놓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닐 것이다. 밀림의 실패는 유효한 응답을 불러올 수 있을까?  동굴 속에 저축해놓은 메뚜기가 모두 동이 나면 육식 동물들은 또다시 울면서 건초를 삼키거나, 친구를 맺은 초식 동물을 도로 식량으로 인식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메뚜기떼는 기후 위기를 알리는 지표이다. 구약 성경에서도 메뚜기떼를 10대 재앙으로 기록한 바 있다. 폭우와 강력한 사이클론, 사막화의 가속 등의 기후 변화로 개체 수가 급격하게 늘어난 사막 메뚜기떼는 작년과 올해 코로나 19로 살충제 수급이 어려워진 틈을 타고 전 세계 곳곳의 농장들을 덮쳤다. 동아프리카, 중국, 브라질 등 특히 식량 불평등 문제에 놓인 농업 지역을 휩쓸어 농작물을 초토화하고 기아 문제를 극대화하여 더욱 심각한 식량 위기를 초래했다. 동물들의 밀림과 인간의 농장을 휩쓸고 이미 땅의 주인들에게로 분배와 소유를 마친 식량을 강탈하는 메뚜기떼는, 자연재해의 연속성이자 그 결과로서 인식된다. 최근 케냐에서는 전례 없는 수의 메뚜기떼 습격에 이들을 포획해 단백질 비료로 만들어, 일종의 “계절 작물” 삼고자 시도하고 있다.8 사막 메뚜기를 검색하면 ‘메뚜기 관련주’가 연관 검색어에 뜨고, 같은 페이지에는 손바닥만 한 메뚜기들을 양팔로 쫓는 이미지들이 함께 나열된다.

메뚜기떼가 뒤덮은 검은 하늘 바로 아래에서 응답력을 기르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형태일까? 인간종의 끊임없는 분열에 결국 인간이 하나의 종으로 남게 되더라도,9 지금 여기에 사는 인간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 다른 강도의 재난을 겪는다. 전세계적 팬데믹 상황에서 누군가는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에 위협을 느끼고, 또 다른 누군가는 메뚜기떼 한가운데서 식량을 지키기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위기는 말 그대로 위기의 모습으로 말을 걸고, 어떤 응답은 기회의 모습으로 위기를 침묵시킨다. 위기 속에 놓인 자들에게 더 큰 책임을 지울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위기가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 위기가 가장 먼저 말 거는 자들의 역할을 강조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응답의 사유를 위해서 인간종의 역할을 약화시키는 일보다, 위기에 취약한 위치의 역할을 강화시키는 것이 시급해 보인다. 다시 말하면 인류세 논의에서 강조되듯 인간의 역할에 주어진 힘을 상쇄시키고 현체제에 트러블을 제공하는 일보다, 위기가 말 걸기를 시도하는 위치와 장소를 포착하는 일을 선행할 필요가 있다. 누가 어떠한 위기에 직면했는지, 혹은 얼마나 지속된 위기 속에서 어떻게 생존해왔는지 안부를 묻는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인간의 가장 끈끈한 의미 구조를 통과하는 일이 위기 속에서 종간의 관계를 조율하는 구호로 작동하는 방식에 질문을 던지고자 했다. 개입의 한계를 저변에 깔고있는 팽팽하면서 복잡하고 동시에 느슨한 관계, 변이할 수도 안할 수도 있는 준 안정성을 이루는 무리, 그것은 친족이라기 보다 오랜 친구, 새 친구, 친구의 친구, 절교한 친구, 늙은 친구, 커다란 친구, 온라인 친구, 죽은 친구, 친구가 아니었던 친구, 친족 같은 친구... ...에 가깝다. 친구(not kin)를 만들고, 친밀한 관계를 도모하고, 친구를 먹지 않고, 응답력을 기르고, 함께 살기 위해 아무튼 인간은 인간으로서 역할에 응답하며 위기 속에서 공-산해야할 것이다.






필자 소개
허주영.  시인, 문학 연구자. 쓴 책으로는 『계집애 던지기』(2020) 등이 있다.





1. D. Haraway(2016),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Duke Univ. Press, p. 102.
2. 도나 해러웨이,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툴루세: 친족 만들기, 169쪽.
3. 공-산은 함께-되기, 함께-만들기, 함께-세계짓기이다. sympoiesis를 공동제작으로 번역할 수 있겠으나, 공동 제작은 생명을 생산한다는 의미를 포함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산의 의미를 포함하는 최유미의 번역을 따른다. 최유미,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5쪽.
4. D. Haraway(2016),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Duke Univ. Press, p. 116.
5. 도나 해러웨이, 인류세, 자본세, 대농장세, 툴루세: 친족 만들기, 172쪽.
6. 주디 와이즈먼, 테크노 페미니즘, 궁리, 2009.
7. D. Haraway(2016), Staying with the Trouble: Making Kin in the Chthulucene, Duke Univ. Press, p. 13
8. https://www.asiae.co.kr/article/2021022520340208039
9. 디페시 차크라 바르티, 기후변화의 정치학은 자본주의의 정치학 그 이상이다, 박현선 이문우 옮김, 문화과학 97권, 2019, 1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