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육식과 동물해방운동



채효정


상품을 먹다


한 끼 한 알 삼시세끼 알약 세 알로 때웠으면 했던 시절이 있다. 밥이란 건, 하는 시간도 먹는 시간도 아깝다 생각한 젊은 날. 밥 하는 시간에 한 자라도 더 읽고, 더 쓰면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을 하자. 그 때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은 아니다. 텃밭 농사부터 매일 밥상 삼시세끼를 ‘내손내만’1 해먹는 사람이 되었다. 흙과 불과 물을 다루는 이 노동이 내 하는 일 중에 제일 근본이라 생각한다. 물론 귀찮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간단히 먹는다. 식사공동체의 협동 규칙도 중요하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한 사람에게만 독박으로 씌워진 의무라면 그건 강제노동이 되고 만다. 반대로 지루하고 반복적인 노동이라도 그 노동을 자기의 생활리듬 속에서 자율적으로 조절할 수 있고, 같이 나눠 할 사람이 있고, 자연의 절기에 맞춰 변주하고 음미할 수 있으면 그것은 무의미한 반복이 아니라 예술적이고 창조적인 노동이다. 


그런데 현대 사회에선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게을러서가 아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시간도, 공간도,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밥을 먹는 데는 소화기관만 필요한 게 아니다. 건강한 음식을 제대로 해 먹으려면 돈도 필요하고 마음의 여유도 필요하다. 날마다 일에 치여 녹초가 되고 안팎으로 가부장제 문화가 이토록 견고한데, 임금으로 돌아오는 노동의 기쁨도 느끼기 힘든 마당에 대가 없는 돌봄의 기쁨을 어떻게 느낄 수 있겠는가. 그러다보니 창조적 활동으로서의 ‘요리’란 것은 돈 많고 시간 많은 유한계급의 과시적인 취미활동이 되어버렸다. 트렌드에 따라 유행하는 식문화는 계급적으로 ‘하류화’하면서 부유층의 미식 탐사부터 ‘프로페셔널 주부’의 중산층 집밥을 거쳐 정크푸드 먹방까지, 각종 상품 선전의 도구가 되어 인스타와 유튜브, 홈쇼핑으로 이어지는 푸드 포르노 산업을 떠받친다. 다들 이 음식 포르노의 관람자가 되어버린 것 같은 슬픈 풍경을 볼 때마다, 가끔 우스갯소리로 하는 ‘남이 차려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는 말은 남의 밥을 차리느라 자기를 돌보지 못하는 이들의 채워지지 않는 또다른 허기를 표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풍요가 넘치는 사회에서 만성화된 배고픔은 위장의 허기가 아니라 돌봄의 허기가 아닐까 하고. 지금 그 허기를 채워주는 것은 대부분 외식산업과 식품산업, 그리고 먹방과 음식 사진으로 채워진 문화적 소비생활이다. 그리고 반대편에, ‘그렇게 먹고 살고 싶지 않은’ 이들의 거부와 저항도 나타난다. 채식주의에도 그런 저항적 반(反)문화의 성격이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비거니즘’은 먹거리의 시장화와 상품화가 극단화된 서구의 선진산업국가에서 탄생할 수밖에 없는 사상이다. 풍요로운 문명에 대한 반성 또는 지루함의 반응으로.


알약 먹고 사는 세상이 정말로 도래한 곳, 북반구의 선진국에선 ‘알약’처럼 편리한 음식들이 날마다 쏟아진다. 정성과 시간을 쏟지 않아도 돈만 내면 차려주는 밥상을 어디서나 받을 수 있고, 마트에 가면 물만 붓고 끓이면 되는 반조리 식품, 냉동식품, 1인용으로 소분된 식재료를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깨끗하게 세척·절단·가공된 채소와 육류들은 손님들의 눈길을 끌도록 포장되어 신선식품 코너 진열대에 놓여있다. 하지만 이 신선한 진열대에는 계절이 없고, 관계가 없으며, 전체는 없고 부분만 있다. 우리가 먹는 ‘알약’의 본질은 ‘상품’이다. ‘상품화’는 상품을 생산한 노동자의 노동도 자신이 만든 생산물로부터 소외시키지만 동시에 그것을 최종적인 상품관계로만 만나고 소비하는 소비자에게서도 생산의 전 과정에서 맺고 있는 모든 존재와의 관계를 지워버린다. 가뭄에도 홍수에도, 산지의 농산물이 타죽고 농민이 병들어도, 마트 진열대의 ‘신선식품’들은 항상 신선하고 건강하다. 삶도 노동도 지워진 상품으로서의 음식은 맛과 가격, 영양성분과 유통기한 따위로만 표상된다. 하지만 매끈한 포장지 속 먹음직스런 음식에는 비밀이 숨겨져 있다. 화학비료와 살충제, 항생제, 방부제 등으로 뒤범벅이 된 재료와 생산과정의 노동착취 같은 추악한 비밀. 우리가 아름다운 그릇에 담아 멋진 풍경을 배경으로 찍어 올리는 사진들은 알약이 만들어낸 판타지일 뿐이다. 어디서 본 듯한 수많은 복제 이미지들의 원본이 ‘광고’라는 건 또 다른 비밀이겠다.





진실을 마주하기


얼마 전 영화 ‘매트릭스Matrix’를 패러디해서 만든 ‘미트릭스Meatrix’란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원작 속에서 진실을 알리는 저항군 대장으로 등장했던 모피어스는 이번엔 소가 되어 빨간 약과 파란 약을 들고 공장식 축산농장에 갇힌 돼지 네오를 찾아온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소, 돼지, 닭으로 바뀌어 동물해방군을 조직한다. 돼지 네오는 빨간 약을 먹고,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비로소 직시하게 된다. 영화 속 거대한 인공자궁, 생명의 공장인 매트릭스는 생명으로부터 이윤을 빨아먹고 성장하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원형을 상징한다. ‘미트릭스’는 인간을 착취하는 구조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살아있는 존재로서 인간 동물과 비인간 동물이 모두, 자본주의가 만든 지옥에 함께 갇혀있음을 보여준다. 그 지옥은 생명의 존재들로부터 ‘살아가는 힘’을 박탈하고 ‘살아있기만 하도록’ 하는 생명자본주의의 지옥이다.


진실을 직면하는 건 고통스럽다. 리얼리즘의 세계는 판타지를 깨뜨린다. 하지만 만나야 한다. 부리가 잘리는 닭과, 수평아리라는 이유만으로 태어나자마자 선별장에서 분쇄장으로 직행하는 병아리와, 마취 없이 꼬리와 성기를 절단당하는 돼지들과, 피고름이 섞인 젖을 짜며 울부짖는 젖소들과, 방금 죽은 동료의 뜨거운 피가 낭자한 도살장에 들어가며 터질 것 같은 붉은 눈으로 눈물을 흘리는는 소들을. 젖과 알과 고기의 생산 기계가 되어버린 몸들을. 그걸 보는 순간, 식품 광고와 푸드 포르노가 만들어낸 도착적 감각은 깨어진다. 자기 살덩이를 들고 농부 같은 차림새로 행복하게 웃고 있는 동물들의 모습과, 그걸 보면서 마치 건강하고 행복한 ‘한돈’과 ‘한우’가 ‘나를 먹어주세요, 그러면 행복할 거예요’라고 말하고 있는 듯 느끼며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신선육’에서 식욕을 자극받는 포르노적 도착 말이다.


포르노가 어떤 서사도 맥락도 관계도 없이 오직 성행위 자체만을 감각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푸드 포르노도 먹는 행위 그 자체의 쾌락만을 자극적으로 극대화 한다. 이 현실과 극단적으로 분리된 미각과 식욕 위에서만 ‘고기 산업’이 성장할 수 있기 때문에, 자본은 집요하고 철저하게 우리가 먹고 있는 것이 누구이며 어디서 왔고 어떻게 살고 죽었는지에 대한 서사를 은폐하면서 ‘살’로 환원된 존재가 자기 삶을 가진 고유한 존재로 보이지 않도록 철저히 비가시화 한다. 포르노에서는 ‘살’만 보여야지 ‘삶’이 보이면 안되는 것처럼, 삶에 대한 물음이 생기는 순간 진짜 감각이 살아나고 ‘맛’이 사라져버리니까. 쾌락을 방해하는 물음이 생기지 않도록, 우리의 식욕과 도덕감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기업은 광고와 마케팅으로 감각을 왜곡시키는 동시에 대량사육시설과 도축장을 우리의 시야로부터 철저히 차단 분리시킨다. 그 결과 식량으로 사육되는 동물은 한편으로는 절단된 스테이크나 갈아진 소세지 덩어리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인화된 소, 돼지, 닭의 브랜드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현실 속의 그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 판타지 속에서 실재 세계는 완전히 암전되어 있다. 나는 그 무감각과 무사유의 ‘암전’ 상태가 도착적 판타지가 만들어내는 이성과 감각의 마비상태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마비상태에서 각자가 알아서 깨어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행복한 꿈은 누구라도 깨고 싶지 않으니까. 살기가 힘들고 팍팍할수록 짧은 행복의 감각은 더 소중하고, 일시적 도파민으로 망각되는 고통은 반복될수록 더욱더 강력한 감각자극을 요구한다. “우울할 땐 고기를 먹으세요, 슬픈 날도 기쁜 날도 고기를 먹으세요, 고기는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야, 오늘 고기 먹자!” “오늘은 고기 먹는 날!” 의례화된 육식문화 속에서 우리가 ‘고기 먹는 낙’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런 종류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여기에는 의도적 기억상실 같은 것도 결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진실을 알면 먹지 못하게 되니까. 그래서 ‘빨간 약’이 필요하다.


탈육식은 마약중독이나 도박중독에서 벗어나는 과정과 비슷하다. 단약과 단도박 과정에서 행복 도파민의 자극 물질이 끊기는 순간 찾아오는 고통처럼 ‘탈육식’도 고통스럽다. 육식중독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그동안 행복하다 믿었던 세계가 송두리째 부정되고, 미가 추로 뒤바뀌며, 자기 존재까지 부정당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인간의 본성과 미각이 ‘고기를 먹고 싶어 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육식산업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우리를 ‘고기에 중독되도록’ 만들어놓았기 때문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고기 끊기’가 수월했던 건 중독이 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육식을 즐겨하지 않은데다, 시골로 이주한 뒤로는 자연스레 마트도 멀어지고 음식 배달이나 외식도 쉽지 않아, 편리와 식욕을 자극하며 지갑을 낚아채는 상품의 유혹에 쉽게 걸려들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약이나 알콜, 도박 중독과 달리 육식은 개인적 중독이 아니라 사회적 중독이며, 나아가 어떤 규제도 없이 허용될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많은 고기를 먹도록 국가적으로 장려되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홀로 벗어나기 힘든 ‘문명의 중독’이다.





불편하고 불쾌한 운동이 필요한 이유


그래서 운동이 필요하다. 깨고 싶지 않은 꿈에서 깨어나려면 현실을 일깨워주는 ‘빨간약’이 있어야 하니까. 나는 동물해방운동 활동가들의 직접행동이 그런 ‘빨간약’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나에게도 그 동물해방군이 찾아왔던 것 같다. 그들의 직접행동은 마치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 것처럼 프로그래밍 된 판타지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버그와 같은 것이다. 즐겁게 보고 있던 드라마가 잠시 중단된 사이에 보고 싶지 않은 전쟁 뉴스가 나와서 처참한 주검들을 여과 없이 보여준 ‘방송사고’ 같은 것처럼, 잠깐 동안의 버그가 일으킨 소음과 소란은 잘 작동될 때는 볼 수 없었던 다른 세계를 작은 틈새를 통해 일시에 충격적으로 드러낸다. 아주 작은 틈새가 일순간 열리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통증을 느낀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방식이 진실을 알리는데 효과적이지 않으며 불쾌를 자극할 것이 아니라 감동을 주는 운동을 하라고 충고한다. 고발과 증언은 거부감을 심어주지만 감동적인 호소는 마음을 움직일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이 불쾌가 아니라 감동을 느끼도록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돌고래를 살리는 일에 기꺼이 돈을 내고, 플라스틱으로 가득 찬 죽은 새의 뱃속을 보며 참회하며, 얼음 위에 위태롭게 서있는 북극곰을 보면서 불타는 지구를 식혀야겠다고 다짐하듯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향의 마음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종종 우리의 관용은 직접적 이해관계 밖의 대상에 대해서는 무한히 관대하다. 아프리카에 있는 난민은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고, 그곳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칭찬받지만, 한국에 입국하려는 난민들은 경계의 대상이고 그들을 도우려는 이들은 의심받는다. 자신의 삶에 난입할 가능성이 없는 북극의 곰과 남극의 펭귄은 보면 마음이 아프고, 산에 있는 멧돼지나 동물원에 있는 곰은 보호대상이지만, 그들이 인간의 동네에 출현하면 즉각 사살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 동물은 인간을 위협하지 않을 때만 보호받을 권리를 갖는다. 식량동물은 어떤가. 우리가 오랫동안 ‘가축’이라고 불러왔던, 집에서 키우는 동물은 더이상 없다. 여전히 관행적으로 ‘가축’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그들은 이제 인간과 함께 살지 않는다. 신종플루에서 코비드19까지 인간과 바이러스를 공유하는 이 동물들은 야생동물과 다른 방식으로 인간을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죽어서 음식이 된 소, 돼지, 닭은 그토록 좋아하면서도, 살아있는 동안의 그들은 기피와 혐오의 대상이다. 분뇨, 오물, 사체, 냄새, 폭력, 착취 속의 비프, 포크, 치킨은 아무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누가 어떤 일을 당하는지 모르면서 그를 구하려는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까? 첫 번째 시작은 진실을 아는 것이다. ‘목격자’가 되는 것만큼 강력한 동기는 없다. ‘비질’2은 폭력의 목격자와 증언자가 되는 활동이었다.


야생동물이나 반려동물에 대한 ‘동물보호운동’은 대중적 지지를 쉽게 얻는 반면, 고기로 사육되는 식량동물에 대한 진실을 알리고 감금과 학대 학살을 중지시키려는 ‘동물해방운동’은 진보적 환경운동 내에서조차 소수적이다. ‘동물해방’이란 용어는 ‘너무 급진적’이라거나 ‘취지는 알겠으나 방법론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지적을 받기도 한다. ‘동물보호’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지만 ‘동물해방’은 어떤 이들에게 불온한 사상이 되는 까닭은 기득권 집단에서 ‘노동존중’이나 ‘여성존중’이란 용어가 거부감 없이 수용되는 반면 노동해방이나 여성해방이란 용어는 거부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유다. 그러나 동물을 보호하고, 여성을 보호하며, 노동을 존중하는 주체는 지금까지 동물을 학대하고, 여성을 차별하며, 노동을 착취해온 주체와 동일한 주체가 아닌가. 이들에게 ‘우리도’ 존중해달라고 하는 것은 현존하는 권력관계를 그대로 인정하면서 주체/주인들에게 좀 더 나은 대접과 처우 개선을 호소하는 것이다. 반면 해방이란 용어는 권력관계와 지배관계를 뒤집는다. 권력을 쥔 지배자에게 권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권리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이들의 운동은 지배자들에게 위협이 된다. 그래서 노동해방, 여성해방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하에서 용인될 수 없는 것이며, 지배체제를 위협하는 불온한 사유인 것이다. 동물해방운동도 마찬가지다.


동물에 대한 학대라는 점에서 똑같이 인간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장면이라고는 해도, 고통 받는 야생동물이나 반려동물을 구출하고 보호하는 인간의 모습에서는 ‘휴머니즘’과 종적 우월감을 느끼지만 식량동물의 경우에는 그럴 수 없어진다. 소, 돼지, 닭은 자연세계의 동물과 달리 취급된다. 자연의 동물들은 신의 창조물이지만 소, 돼지, 닭은 인간이 만든 인공물이며, 무엇보다 사유재산으로 취급된다. 그러니 이들을 구출하는 것은 사유재산에 대한 침해이며 영업방해가 된다. 인간과 동물 간에 설정된 보호-피호, 지배-피지배의 일방적 관계만 아니라 생명의 상품화를 용인하는 자본주의적 상품생산관계에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그 관계를 전복시켜 상호적이고 평등한 관계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식량동물’을 상품의 원료가 아니라 동물존재 자체로, 즉 살아있는 생명 존재로 대하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삶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부정할 때에만 가능했던 일, 즉 지금까지 허용되어온 감금, 학대, 학살을 더 이상 정당화할 수 없게 만든다. 동물해방론이자 새로운 생명사상으로서의 비거니즘은 육식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시스템 자체에 대해 근본적 문제를 제기한다. 자본과 권력은 시장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친환경 소비자로서의 채식주의자는 환영하지만 자본주의적 식품생산 체제에 맞서는 동물해방의 실천론으로서의 채식주의는 억압한다.





시장과 기술이 인도하는 대체상품이 탈육식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마음먹을 때, 자본주의 시장은 그것이 체제에 대한 저항이 되지 못하도록 소비실천으로 전환하는 루트를 재빨리 만들어낸다. 비건을 위한 다양한 대체 상품도 그중 하나다. 편의점에서 다양한 비건 김밥, 비건 도시락, 비건 라면이 출시된다는 소식은 육식사회의 소수자로 살면서 서럽게 채식하던 이들을 기쁘게 한다. 한국에도 유럽의 도시들처럼 더 많은 비건 레스토랑과 비건 샵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축산업의 잔혹함이나 환경오염 때문에 육식을 거부하는 이들을 위해선 ‘인공배양육’을 ‘대체육’이라며 대안으로 제시한다. 거대자본과 거대기술의 결합체인 인공배양육의 상품화를 허용하는 건 식량주권을 완전히 식품대자본에게 넘기는 것이다. 글로벌 육류 시장의 가장 큰 투자자이면서 소비자인 식품 기업들이 정크푸드와 친환경 유기농 제품을 함께 생산하며 육식과 채식 상품을 동시에 개발하고 투자한다. 이런 모습은, 석탄발전 핵발전으로 돈을 버는 다국적 기업들이 기존의 발전 사업을 계속 유지하는 동시에 재생에너지에도 투자하면서 시장 확대와 다변화를 위한 노력을 마치 ‘기후위기’를 걱정해서 그러는 것인 양 홍보하는 모습만큼이나 모순적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채식으로 기후위기를 극복하자고 말하는 것 또한, 산업 발전부문의 이산화탄소배출량이 가장 크고 상위 10%의 에너지 소비와 온실가스 배출이 전체 배출량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도 그 부분은 건드리지 않은 채,저마다 탄소를 내뿜는 78억 인구가 각자의 에너지 절약으로 기후위기를 극복하자고 하는 주류 환경운동의 주장 만큼이나 탈정치적이고 몰계급적인 말이 될 수 있다. 더구나 그 채식이 지금까지의 동물착취 주범인 기업과 시장을 통해, 여전히 착취적인 ‘상품화’에 의해 가능한 것이라면 더욱 더 그렇다.


그동안 자본은 개인들에게 각자의 선택권을 주면서 구조적 문제를 개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속이고, 생명의 권리를 소비자의 권리로 치환하는 논리로 끊임없이 우리를 속여 왔다. 친환경 상품에도 ‘레벨’이 있고 계급적 차이가 있듯이 비건 소비도 마찬가지다. 정크 비건을 하든 에코 비건을 하든 시장은 각자의 형편에 따라 얼마든지 다양한 선택지를 줄 것이다.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건 진열대의 상품을 선택할 권리가 아니라 제대로 먹고 살 수 있는 시간과 관계에 대한 권리다. 채소도 공장식으로 생산하는 자본주의적 농업생산체제에선 채식도 폭력 없이 평화로운 것만은 아니다. 한겨울의 신선 채소를 키우기 위해 비닐하우스엔 밤낮없이 전기가 흘러야 하고, 하우스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은 겨울에는 얼어 죽고 여름에는 쪄죽는다. 자본이 생명으로부터 이윤을 짜내는 데는 동물과 식물을 가리지 않는데, 각자가 식단을 동물성을 식물성으로 대체하는 것이 과연 생명을 쥐어짜서 이윤을 추출하는 폭력의 사슬을 멈출 수 있을까? 그건 현재의 생산체제와 성장의 경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고도 에너지원을 화석연료에서 재생에너지로 바꾸는 것만으로 기후위기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하는 녹색성장론과 마찬가지 논리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시장주의적 문법과 축산업 동물착취에 대응하는 시장주의적 문법은 자본과 기술에 의존하며 현재의 성장체제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닮았다. 시장주의적 기술주의적 관점은 육식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탈육식’을 ‘채식 대 육식’의 식단 선택의 문제로 전환시키고, 식물성과 동물성의 에너지원 문제로 논쟁으로 축소시킨다. 기후위기 시대 갑자기 ‘너무 많은 소’들이 온실가스 배출원으로 지목되면서 기후위기 주범이 되었다. 소 한 마리가 내뿜는 메탄가스가 자동차 한 대가 내뿜는 이산화탄소와 맞먹는 양의 온실가스를 배출하기 때문이다. 이 과학적 진술은 ‘객관적 사실’이지만, 그 너머의 ‘진실’은 그렇게 많은 ‘소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시스템’을 누가 만들었는가에 있다. 자동차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를 줄이는 시장주의적 기술주의적 대안은 연료를 교체하는 기술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내연기관만 전기배터리로 바꾸면 된다는 생각은 소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소의 입에 메탄가스를 흡수하는 마스크를 씌운다든가 육상동물인 소의 사료를 해조류로 대체한다는 발상은 소의 내장기관과 자동차의 내연기관을 똑같이 기계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어떤 항공사는 ‘탄소중립’ 좌석을 친환경 상품으로 내놓기도 한다. 비행기 여행은 탄소배출량이 가장 큰 이동수단인데, 이를 상쇄하는 탄소흡수 비용을 요금에 반영하여 비싼 탄소중립 좌석을 상품으로 개발한 것이다. 승객이 구입한 항공권에는 탄소배출권 비용이 포함되어 있고, 항공사는 당신이 앉은 좌석에는 탄소를 흡수하는 나무 몇 그루가 깔려 있는 셈이니 실질적 탄소배출량은 제로가 된다고 홍보한다. 승객은 자신의 비행기 여행이 가중시킬 기후위기에 대한 죄책감을 요금지불로 상쇄할 수 있다. 얼마나 혁신적인 발상인가. 채식 시장의 상품들 역시 이와 유사한 ‘소비 실천’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마치 우리가 식단의 재료들을 식물성과 대체육으로 바꿀 때마다 동물의 고통도 줄어들고 ‘상쇄’의 효과가 나타날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시장의 처방은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통증을 감각하지 못하도록 하는 진통제 처방일 뿐이다. 육식산업 체제 안에서 고작 생산라인의 극히 일부를 할애하여 채식상품을 생산하면서, 소비자의 선택권을 옹호하고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선전하는 기업에 속아서는 안된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적 식품 생산 시스템과 그걸 만들어낸 기업이야말로 인간과 비인간동물, 동물과 식물, 생산자와 소비자를 동시에 죽이는 주범이다. 비거니즘은 인간의 에너지원을 동물성에서 식물성으로 바꾸는 ‘연료 대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비거니즘을 채식주의라는 말보다 ‘탈육식’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채식은 정치적 실천 보다는 사적 선호와 취향의 문제로 이해되기 쉽지만 ‘탈육식’은 육식, 특히 육식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에 대한 비판과 적극적인 반대와 저항의 의미를 전달하는데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동물해방 없이는 노동해방도 인간해방도 없다


비건이 된다는 것은 나에겐 식단의 전향보다 관계의 전향이다. 채식이냐 육식이냐 라는 선택적 질문은 무엇을 먹을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먹을 것이냐의 문제로, 나아가 먹는 자와 먹히는 자의 관계에 대한 물음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사람마다 채식을 시작하는 계기는 다르지만 내가 ‘탈육식’하게 된 동기는 ‘먹을 수 없게 된 마음’이 가장 컸다. ‘동물해방군’을 만났고, 이름과 얼굴을 아는 돼지 친구가 생겼고, 더이상 잔혹한 폭력성에 동참할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채식도 하다보면 점점 익숙해지고, 나의 텃밭과 밥상이 아무리 평화로워도 그 바깥에서 일어나는 세계의 폭력에서 홀로 평화로울 수는 없다는 것도 점점 알게 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진실을 알면 알수록,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혼자서는 이 폭력의 사슬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는 또다른 진실의 벽에 부딪치기도 한다. 그런 채식은 너의 마음을 평화롭게 할 뿐 이 폭력을 끝낼 수는 없어, 라고 말하는 진실의 벽은 잔인하다.


어떤 이들은 이런 구조적 폭력을 말하면서 개인적 채식이 답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극단적 채식보다는 그냥 조금 덜 먹는 육식을 하자고 하기도 하고, 공장이 아니라 농장에서 생산된 ‘착한 고기’를 먹자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어정쩡한 타협론이 양심의 알리바이를 충족시킬 뿐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급진적 채식 소비보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관계의 근본적 전환이 아니라 계속 소비의 방식만을 변경하는 이런 절충론은 자본의 ‘지속가능한 발전’같은 개념만큼이나 우리를 마비시키는 ‘파란약’이다. 이런 주장은 현재 글로벌 식품 시장에서 유통되는 육류의 90% 이상이 글로벌 대기업들에 의해 독점된 상태고, ‘농장에서 식탁까지’ 수직계열화한 식품산업체제의 농가들도 이미 하청생산기지로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지금 어디서 좋은 농부가 생산한 좋은 고기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캘리포니아 경작지대의 지하수를 고갈시킨 주범은 아몬드 나무도 아니고 우유 대신 아몬드를 먹는 채식주의자도 아니다. 주범은 ‘아몬드 기업’이다. 아마존에서는 콩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있지만, 숲을 태우고 원주민을 내쫓는 건 콩도 아니고, 콩을 먹는 소도 아니고, 소 대신 콩을 먹겠다는 이들도 아니다. 주범은 ‘소고기 기업’이다. 또 그 뒤에는 아몬드 산업과 소고기 산업에 투자하는 금융자본이 있다. 노예해방이 노예산업을 중단시킴으로서만 가능했던 것처럼 동물해방도 자본주의적 육식산업을 해체할 때에만 가능하다. 노예해방을 위해선 노예제 하에서의 착한 노예주가 필요한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을 노예로 만들어 사고 파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필요하듯이, 동물해방도 마찬가지다. 지금과 같은 육식산업체제를 유지하면서 그 속에서 착한 생산자와 착한 소비자가 되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고 답이 될 수도 없다. 여기까지 도달하면 독자들은 허탈감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난 뭘 위해서 이렇게 힘들게 채식을 하고 있는가도 싶을 것이다. 하지만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에 빠지진 말자.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상의 실천이 지닌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유하자면 그건 매일 먹는 ‘빨간약’ 같은 것이라고 할까. 육식이 주류이고 채식이 소수인 사회에서 채식을 한다는 건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 불편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회의 관행과 계속 부딪치는 과정은 끊임없이 자신에게 이 행위의 의미를 묻게 한다. 그리고 날마다 깨닫게 한다. 망각의 힘은 강하고, 소비의 유혹은 더 힘이 세다. 진실을 보고 나서 몇 날 몇 달 ‘고기’를 끊었다가도 다시 먹을 수 있는 건, 꼭 인간이 비루하고 나약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육식자본주의의 중독 메커니즘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는 밥상의 실천은 그 거대한 벽을 향해 작은 물결을 계속 일으키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고통과 슬픔의 존재들로 이어지는 해방의 통로를 조금씩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그런 한에서 탈육식 운동은 일상 저항의 생활정치가 될 수 있고, 결국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상과 실천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풍요를 거부하고 불편을 선택하는 이 일상의 실천이 다른 해방 운동과 연결되어야 하고, 내가 먹고 있는 것이 어떤 사회적 생산을 통해 온 것이며 타인의 삶과 어떻게 관련되는지 알아야 한다.


오늘날 육식자본주의는 ‘음식에 대한 무절제한 탐욕과 과잉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최정점에 있다. 이 문화자본주의의 이면에는 생명자본주의가 있다. IT산업이니 스마트산업이니 하는 ‘창조경제’의 물질적 토대가 여전히 광물자원을 캐내는 광산업의 갱도에서 시작되듯이, 문화산업과 서비스경제의 외형을 띈 ‘푸드 산업’도 그 시작은 생명의 갱도가 된 농축산업이다. 공장식 축산 이전에는 어떤 농부도 자연의 시간을 압축하거나 앞지르며 생산하지 못했다. 육식자본주의는 생명의 자연적 원리에 개입하고 조작하는 기술을 통해 이윤의 축적이 자연의 순환과 재생 시간을 초월할 수 있게 만들었다. 생명자본주의는 생명의 번식력과 생장력을 극대화해서 지구의 유한성과 자연의 성장 속도를 초월한다. 초기 자본주의가 오랜 시간 축적된 과거의 에너지, 지하에 매장된 화석에너지를 동력으로 급발진 할 수 있었다면, 후기 자본주의의 동력은 지금 ‘살아있는 동물’로부터 실시간 추출하는 에너지다. 그런 점에서 경쟁을 통해 인간 노동에 강도를 높여 생산력을 더 뽑아내는 기술과 동물의 몸을 더 빨리 더 크게 자라게 해서 생존주기를 극단적으로 단축시켜 이윤을 뽑아내는 기술은 근원적으로 동일하며, 육식자본주의는 생명자본주의와 결합한 신종 채굴주의의 형태를 띈 신자유주의적 착취 산업이다.


나는 나의 채식이 지구를 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자의식보다는 ‘한계 속의 실천’이지만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보자는 포기하지 않은 마음이 더 소중하다 여긴다. 지구를 구하는 건 채식이 아니라 사회 운동이다. 죽임의 산업으로 성장하는 자본주의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체제 안에서부터 그 체제에 길들여지지 않을 수 있는 기초 체력이 필요하다. 더 큰 우리가 되어가기 위해 함께 할 동지도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일상의 실천을 반자본주의 운동의 저항 근육을 키우는 맨손 체조라고 말하곤 한다. 우리들의 탈육식의 실천도 그런 일상의 저항 훈련이자 먼저 온 해방자들의 함께 추는 춤이 되길 바란다.








필자 소개
채효정.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해직 강사. 2011년부터 경희대에서 ‘대안 사회 구상하기’, ‘예술과 정치’ 등 인문 사회 과목을 강의해 오다 2016년 해고되었다. 이후 부당 해고와 차별적 강사 제도의 시정을 요구하고, 대학의 기업화와 비민주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수요 집회와 잔디밭 강의 등으로 학내 투쟁을 하고 있다.
대학에서는 서양 정치사상을 전공했다. 하이데거의 ‘테크네techne’와 포이에시스poiesis’ 개념을 토대로 기술·예술론에 대한 석사 논문을 쓴 것이 계기가 되어 이후 몸의 정치, 생명정치, 정치미학 등 정치에서 생명과 감각과 감정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연구해 왔다. 박사 수료를 마치고 고대 ‘오이코노미아oikonomia’ 개념을 재해석함으로써, 여성과 노동을 중심으로 고대 민주주의와 생명정치론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1999년 교육 운동 단체인 ‘학벌없는사회’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여 활동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학교 밖 청소년과 함께 하는 인문학 교실 - 삶은 달걀?’, ‘거리의 청소년들과 함께 하는 떡볶이 교실’이란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했는데 이것이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 만난 선생님들과 청소년들에게서 배운 것이 큰 힘으로 남아 있다.
정치, 인문·예술, 교육 분야에서 이론과 현실, 사유와 실천을 잇는 ‘현장 연구자’가 되고 싶다. 지배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배당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식인이 되고 싶고, 함께 싸우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 고통에 대해 공명하는 존재인 인간과 민주주의가 희망이다. 함께 쓴 책으로 《학교를 버리고 시장을 떠나라》, 《상상하라 다른 교육》, 《교육 불가능의 시대》 등이 있다.







1.  내 손으로 내가 만들어 먹는다. ‘내 돈으로 내가 산’의 변용. (편집자주)
2. 비인간동물이 처한 진실을 목격하고 증인이 되는 일. 도살장, 농장, 수산시장 등을 방문하여 육식주의 사회에서 은폐된 장면을 목격, 기록하여 다른 인간과 공유하는 활동. (편집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