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과 반달리즘: 예술 노동자 그 미만에서




뚜이부치


1.
  「페미니즘, 예술, 그리고 역설Feminism, Art, Contradictions」에서 안젤라 디미트라카키(Angela Dimitrakaki)는 "페미니스트 정치와 투쟁을 불신용하고 배제하는 것을 여성 예술가의 작업들을 포함함으로서 보상하려는"1 영미권 현대 미술의 경향성을 살피고, 예술 노동자란 규정이 집약하는 전문가 정체성을 획득하기 위해 여성 예술가들이 맹렬히 투쟁해온 역사가 도리어 급진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페미니즘 실천을 방해하게 된 역설을 분석한다. 2010년대 테이트 미술관이 체계적인 노동자 착취, 자연 파괴와 아파르트헤이트의 기여로 악명이 높은 석유 회사 BP의 후원을 받으면서 흑인 여성 예술가와 노동자 계급 출신 여성 예술가들 중심의 기획 전시를 열었던 것이 대표적이다. 디미트라카키에 따르면, 테이트 전시 당시 페미니스트 예술 공동체가 보였던 제도 비판적 공동 행동에 대한 소극성은 아주 소수의 모범적이며 성공적인 여성 예술가만을 긍정하며 경쟁을 부추기는 시스템의 문제인 동시에 예술 노동자라는 "공적인" 정체성으로부터 배제당한 역사가 긴 여성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애착에 기인하기도 한다. 디미트라카키는 전문화된 예술계 안에서 여성 예술가의 기여와 경력을 인정받기를 중시하던 "포섭"(inclusion) 중심의 70년대 투쟁의 유산을 극복할 필요성을 주장한다. 그러한 극복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이미 정립된 이분법 차원에서 더 많은 여성들이 공공의 영역에 참여하는 것을 넘어 이분법의 근거가 되는 제도 자체를 부인하고 바깥을 찾는 새로운 공공성을 향해감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다.



  영미권 중심의 페미니즘 예술사에 근거한 진단은 "70년대 미국에서 다 끝난 이야기"의 진부함과 절실함을 여전히 동시에 의식할 수밖에 없는 탈식민의 맥락과 여건을 안은 한국인에게는 늘 그렇듯이 충분히 만족스럽지 않게 들린다. 한국에서 예술인을 유사 고용 관계 하에 있는 노동자로서 바라보는 시선은 미투 운동, 예술인 노조의 활동, 신자유주의적 노동자에게 강요되는 "열정 페이"에 대한 비판 담론을 통하여 2010년대는 들어서야 낯설지 않게 되었다. "예술 노동자"란 자기 선언은 예술계 또한 성별화된 권력과 자본의 장이란 것을 노출하며, 저작권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예술인의 권익을 보호하라는 법제적 요구를 위한 조직화에의 유의미한 지향을 담는다. "예술은 노동이다"라는 명제는 예술인의 가난을 보도하는 고발성 르포기사의 부제를 넘어서고, 더 나아가 예술은 노동이고 언제나 노동이었으며 노동이어야만 한다는 인식이 노동을 정상화하길 원하는 젊은 진보가 마땅히 가져야 할 입장으로 대두되기도 한다. "불운한 천재 신화 주인공 대신 근면한 예술 노동자 고흐"2... 이와 같은 탈신화화는 더 이상 예술을 광기, 범죄, 나태, 마땅한 가난, 남성적 천재성 혹은 사적인 취미의 고립된 영역에 남겨두지 않을 것이고, 예술의 생산 과정과 물적 토대를 응시할 것이라는 의지를 동반한다.



  그러나 예술 노동자란 자기 규정이 불러 일으키는 껄끄러운 불협화음은 예술을 무정치적이고 자율적인 행위로 남겨두고자 하는 반동적 고집이 일으키는 것만은 아니다. 생산과 재생산의 논리로는 환원 불가능한 무엇이 예술 안에 자리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에게 "예술은 노동이다"라는 널리 퍼진 명제는 예술의 탈신화화에의 자축으로 이어지기 보다는 문제 상황이자 역설로 남는다. 예술이 제도권 내에서 저평가받고 소외된 노동임을 호소할 때, 그 예술은 컨텐츠를 통해 잉여 가치를 산출하는 공적인 활동성으로 자리매김한다. 오늘날과 같은 컨텐츠 과잉 공급의 시대에 예술 활동이 노동으로서 여전히 건재하다고 말함은 독점적인 저작권이 벌어들이는 수익, 근면하고 창의적인 직업인의 심상, 문화 자본에 근거한 전문성, 한류와 오스카상 등이 오랫동안 함축해 온 문화 산업의 자본주의적이며 국가주의적인 공공성에 더욱 기대어 예술의 잉여 가치를 해명하는 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어떤 예술은 예술의 꼬리표가 붙지 않은 다른 디자인, 서비스, 컨텐츠 그리고 오락보다는 제작 공정에 '조금 더' 창조적이고 비판적인 취미를 첨가했다고 까다로운 소비자들에게 호소하는 공정무역 상품 생산임에 만족하고 말이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즘 기획이 정부 기금 경쟁과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에 얽혀 그러한 공정무역의 새로운 지표로 추가된 것 마냥 뭉뚱그려 회자되는 풍경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실제로 여성 예술가의 이름들을 제도권 예술계 기획 속에서 전에 없이 많이 찾아볼 수 있게 되기도 했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올해의 작가상 후보들이 모두 여성인 것을 보았을 때 고무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예술의 생산성을 가늠하는 자의 눈금에 성심 쓰듯 페미니즘이 추가된 것처럼 보이는 건에 대하여 기뻐하기를 넘어서,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음험한 신자유주의 기획으로의 포섭이자 “짐승의 체내에 흡수” 그 이상일 수 있을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라도 이 기쁨은 소화 불량 환자의 불만족이 되어야 한다. 무엇을 사고 무엇을 사지 않으며 무엇을 불매할지의 기준을 제시해주는 KC 인증 마크처럼 ‘여성 서사’가 소재주의적으로 소용되며 여성 예술가에게 이중의 억압으로 작동하는 상황은 예술가의 노동자성에 대한 일면적 긍정을 거부하는 여성, 예술, 그리고 노동의 관계에 대한 더 많은 말하기를 요구한다. 공적으로 마땅히 재현할 수 있는 것과 사적으로 간직해야 할 욕망 및 터부의 경계를 분명히 가지고서 무엇이 페미니즘 예술 내지 문학이 될 수 있는지 규정하는 시선들은 "예술은 노동이다" 운운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이미 예술을 노동으로서, 즉 공과 사의 구분을 혼란케 하기 보다는 정립된 공적 가치로 설명되는 생산적인 활동성으로서 가장 잘 수용한 시선이기도 하다.



  현 체제에 대한 그럴싸한 대안은 지구온난화가 가져올 지지부진한 사멸 밖에 없다고들 할 때, 예술이 자본의 생산주의적 언어로 기술될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는 데서 오는 만족은 분명 현실적이고 책임감 있는 종류의 만족이다. 자본주의적 전체성은 그 현실주의자의 만족을 통하여 여성화된 노동력에 대한 최악의 착취를 불가피한 운명으로 마술처럼 변신시키며 불멸을 얻는다. 동시대 페미니즘 예술이 현실주의자의 언어를 적대하기 위해서 예술가는 노동자 규범과의 긴장 관계를 놓아서는 안 된다. 예술 노동자란 호명은 99%를 위한 예술에 다가가기 위한 보편적 권익 보장의 차원에서 정책적으로 또 전략적으로 요구될지 모른다. 그러나 "되는 이야기"로서 페미니즘을 넘어서 "99%를 위한 페미니즘"으로 나아가고자 할 때, 디미트라카키가 말한 "실용적인 차원에서의 수정주의와 혁명적 의식 사이의 변증법"에의 역점은 시기 적절하고 유효할 것이다.



  제도권 내의 "예술 노동자"의 예술이 있는 만큼이나, 예술 파업 참여자, 예술 월급 루팡족, 예술 삐라 배포자, 예술 태업, 예술 러다이트 족, 카피레프트로 대표되는 예술 공산주의자와 같이 노동자 규범에의 반달리즘을 유용하며 "여성 예술가"로서 저자성을 심문해온 예술의 계보도 찾을 수 있다. 그 반달리즘의 계보가 증언하는 바는 예술이 노동과 무관하며 무정치적이란 안이한 주장의 반대항에 차라리 자리하며, 소외의 형태로서 노동, 불식되어야 할 적의 이름으로서 노동을 자유와 창조성의 미명 아래 사라지게 하는 기제와 싸우려 든다. 상업화에 저항하기 위하여 삶과 예술, 공과 사를 구분 짓지 않고 때론 삶과 함께 침몰하는 행동주의 예술에서 자주 발견되는 그것은 흔히 지속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치기, 구제불능의 반항심, 철 지난 이상주의, 붕괴가 예정된 대안 공동체, 희/비극적인 공격성과 마이너스로 치닫는 비생산성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계보에 속한 자들은 근본적으로 실패자들이기도 한데, 그들이 극단을 자처하며 부인하려고 노력한 제도권 예술에 의해 다시금 기록되고 비평되지 않았다면 방에서 인터넷을 좀 많이 할 뿐인 나로선 그 존재를 알 턱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을 현재적인 투쟁의 일환으로 계보화하기 위해 필요한 태도는 그들이 그 실패에도 "불구하고" 의미가 있다고 하거나, 어떠한 면에서는 성공적이었다는 식으로 고고학적인 복권을 완수하는 것이 아니다. 스톤 부치와 네모바지 스펀지밥의 예찬자인 잭 할버스탬(Jack Halberstam)에게 실패는 "자본의 초고속도로망 사이의 샛길들"이자 "아직 발 닿지 않은 길의 초입들"이었다.3 그들이 여전히 실패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만이 자본주의적 성공의 논리, 차곡차곡 포개진 시체들을 가뿐히 밟고 서는 낙관의 논리가 긋는 선명한 교통망을 거슬러 가는 미결의 초안들을 다시금 그려 나가게 해준다. 변증법을 들먹였지만 솔직히 나는 변증법적 통합을 거의 염두에 두지 않은 채로, 노동과 동일시한다면 노동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노동을 능멸하는 일이 될 것만 같은 그런 예술들에 단순 무식하게 끌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지만 실패의 지도가 더 많이 길을 잃기 위해 제작되고,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아닌 더 많은 실패의 어머니가 되는 것에서 급진성의 식량을 얻는다면, 나는 좀 더 지면을 할애해 이 매혹에 대해 떠들어도 될 핑계를 얻은 것일테다.






2.
  "나는 이제부터 스스로를 예술 노동자가 아니라 예술 몽상가라고 칭하겠다"4라고 선언했던 리 로자노(Lee Lozano)의 마지막 작업, <드롭아웃 피스Dropout piece>는 그와 같은 지도의 출발 좌표가 되어준다. 로자노에 의해 "여태껏 한 일 중 가장 어려운 작업"이며 그럼에도 그녀에게 있어 "불가피한"5 일이었다고만 설명된 드롭아웃은 그녀의 ‘삶-예술’(Life-Art) 프로젝트의 일환이다. 중퇴자, 낙오자, 인습거부자, 혹은 탈퇴 등으로 해석될 수 있을 ‘드롭아웃’(Dropout)은 화랑과 경매시장을 거부하기를 넘어서 예술 공동체로부터 서서히, 그리고 완전히 종적을 감추고 예술계를 통해 구성되는 그녀의 저자성을 철회하는 실천이다. 그것은 대략 70년대 초에 시작해서 그녀가 1999년 텍사스의 암병동에서 죽는 날까지 이어진다. <드롭아웃 피스>의 프로토타입인 <전반적 파업 피스General Strike Piece>는 "개인적이고 공적인 혁명의 탐색을 전면적으로 뒤쫓기 위해서, 점진적으로 하지만 결연히 공식적이거나 공적인 '부유층 동네' 기능 혹은 '예술 세계'와 관련된 모임을 피할 것”이란 좀 더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가지고 있다.




Figure1.  Lee Lozano. “Pages from Private Notebook 8.” 1970.  © The Estate of Lee Lozano. Courtesy of Hauser & Wirth.



Figure2. Lee Lozano. General Strike Piece. 1969. © The Estate of Lee Lozano. Courtesy of Hauser & Wirth



  상업화된 화랑 시스템을 거부하며 "파업"의 차원에서 예술가이기를 그만두는 움직임은 70년대의 정치적 아방가르드 속에서 적지 않게 발견된다. 로자노의 특이점은 예술가를 예술가로 만드는 현행 제도로부터의 철수를 그녀가 지향해온 "삶-예술" 프로젝트의 체계에 있어서 최고난이도 예술 작업으로 의미 짓고 있다는 점이다. 로자노에 따르면 드롭아웃은 감정과 일, 야망의 “소모”(consumption)를 감축함을 통해서만 가능해지는데, 이 모든 통찰은 “술 기운이 거의 사라진 상태”(Near-Sober State)에서 떠오른 것이다.6 “술기운이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 설명되길, 이 작업은 자본의 언어로 회자되지 않을 예술, 예술 노동자의 것이 아닌 예술 몽상가의 예술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면 그것은 이미 상업화된 예술계로부터 철수하고, 브랜드로서 자신의 저자성까지 지워버리는 철저한 ‘예술 파업’이 될 때만 가능하다는 타협 없는 비관에 기반을 둔다. 그렇지만 술과 약 기운에서 완전히 깬 상태가 아니라 “거의”(near) 깬 상태임에 유의하라. <드롭아웃 피스>는 자본의 언어로 기술될 수 없는 부재마저 그 자체로 예술 "작품"(piece)으로 구제될 수 있는 공동체, 차라리 최후의 심판 심급에 자리할 공동체에 이미 속한 것처럼 굴고 있다는 점에서 대책없이 유토피아적이기도 하다.



  삶-예술 프로젝트는 무슨 무슨 작품(piece) 혹은 무슨 무슨 부품(piece), 무슨 무슨 한 점(piece) 이라고 제목을 지은 말장난같은 글들을 담은 육필의 노트들을 통해서만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부분(piece)으로 드러난다. <금연하기 작품Stop Smoking Cigarettes Piece>,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서 만화책 보기 작품The Lie-In-Bed-All-Day-And-Read-Cosmic-Books Piece>,<살찌고 게을러 지기 작품The Get-Fat-And-Lazy Piece>, <똥구멍은 처녀로 남겨두기 작품Keep Your Asshole-Virgin Piece>, <통화를 하지 않고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는지 알아보기 작품The See-How-Long-You-Can-Go-Without-Making-A-Call piece> 등등은 일상적 기술에 piece라는 캡션을 붙인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7 예술적 산물에 흔히 붙는 접미사인 piece는 떨치기 어려운 입버릇이나 농담처럼 남용되면서 하찮고 취약하고 비생산적이며 때론 자멸적인 삶의 갖은 국면들을 모조리 예술로 전환시키려 든다. 로자노의 몇몇 주변인들은 그녀에게 예술이란 변덕스러운 삶을 정당화하거나 충동적인 “모험”을 감행할 "핑계", 방어막, 혹은 알리바이이기도 했음을 지적한다.8



  로자노는 자신의 존재론을 빚어 나가며 예술의 존재론만큼 과학의 존재론도 탈취해오려 했다. 양자 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 대한 아마추어 물리책들을 탐독하던 로자노는 관찰되기 전까지 생과 사가 확정되지 않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심상에 크게 고무되어 있었고, 그 관찰의 대상을 자신의 삶으로 삼았을 때 자신이 무엇으로 변모할지 알고 싶어했다. 삶-예술은 자기 관찰의 형식을 띈다. 30일동안 매일 대마초를 피우고 변화를 살피는 <대마초 작품Grass Piece>, 같은 기간만큼 대마초를 피우지 않고 금단 현상을 기록하는 <대마초 없이 작품No Grass Piece>, 자전거 페달, "섹시한 당근", 깃털 등 다양한 사물을 이용해 자위를 하는 <자위 탐색Masturbation Investigation>, 누군가를 오로지 대화할 목적으로 집으로 초대하고 그 대화의 분위기를 날짜와 간략히 기록하는 <대화 작품>(Dialogue Piece) 등은 기니피그 과학자의 실험 보고서를 모사한다.




Figure3. Lee Lozano. Masturbation Piece. 1969. © The Estate of Lee Lozano. Courtesy of Hauser & Wirth.



  <여성 보이콧>(women boycott)은 개중 "극단을 찾아라, 그곳이 모든 행동이 있는 곳이다"9 라는 그녀의 계명에 가장 충실했던 실험 중 하나일 것이다. "남자들은 서로 싸우고 여자들은 서로 지루하게 한다(bore)" 혹은 "남자들은 서로 싸우고 여자들은 서로 뚫어버린다(bore)"10라고 투덜거리며 성별 이분법적 동성사회의 내부자보다는 그 바깥의 관찰자 내지는 부외자를 자처하던 로자노는 1971년 8월의 첫째 날 여성을 불매하기로 결심했다고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쓴다. 이 여성 불매의 실천이란 여자들과 일절 말하지 않고 여성 예술가들이 보낸 우편은 쓰레기통에 쳐박아 버리는 것이다.



  여성 구획을 통째로 ‘불매’될 수 있는 상품으로 격하시키고 자신은 그 규정 바깥으로 뚝 떨어트리는 식의 뻔뻔스러운 태도는 로자노의 초기 페인팅들에서 발견되는 의식의 연장선에 있다. 육체와 무기물의 경계를 일그러뜨리는 페티시즘적 사물들의 테마를 변주하는 "정물화"들은 상품화된 성에 얽힌 조잡하고 폭력적인 환상들을 악랄한 농담의 자원으로 과잉 긍정하면서 그야말로 욕망의 본질이며 전체라고 이죽거린다. 그 정물화의 대상들은 딜도를 닮은 스패너, 딜도를 닮은 길쭉한 코, 코가 되어버린 딜도, 자위기구로 유용되는 트럼펫, 동전 투입구가 된 보지, 콘센트 구멍이 된 보지, 제 이빨을 부숴 먹을 듯이 웃고 있는 시뻘건 입술, 조각조각 나 도넛 상자에 포장된 젖가슴, 그리고 사전에서 성기라는 단어를 찾아보는 것만으로 흥분하는 애새끼가 희열에 차 휘갈겨 쓴 듯한 "자지! 보지! 젖꼭지! 불알!" 등이다.




Figure4. No title. Drawing 1962




  "~하지 않기"로 기술되는 행동은 초기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과잉 재현과 결별하는 승화이며 축소 지향주의로 언뜻 읽힐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드롭아웃 피스>와 마찬가지로 평생동안 이어진 로자노의 <여성 보이콧>은 과잉의 불화와 격화되기 십상인 적대를 예술의 안과 밖의 구분을 허물어뜨리며 양산했다. <여성 보이콧>은 한편으로 공기와 같이 번져 있는 성별 이분법 앞에서 숨을 참는 것으로 시비를 걸어 대는 일로 보인다. 실험에 말려들었던 주변인들의 갖가지 증언에서 그녀가 자신의 숨 참기 운동에 얼마나 진지하게 임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로자노가 웨이트리스를 완전히 무시하며 남자 서버를 끈질기게 요구했다는 한 증언을 읽는 동안, 서비스직 종사자를 향해 반사적으로 이입하며 분노를 느끼는 동시에 그토록 치사스럽기를 감수할 수 있는 고집을 향한 복잡미묘한 감동을 받게 된다.11 결국 로자노에게 삶을 예술화한다는 의미에서 "삶-예술"은 보편적인 미의식이나 보헤미안적 자유를 일상 속에서 추구하는 것과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습관에 일체 되어 있던 자신의 몸을 폭력적으로 통제하며 감시하는 "독재자"(dictator)의 자의식을 가지는 것이었고 12  때론 그녀의 삶에 우연히 연루된 면면들에게도 불쾌한 감각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빅브라더인 동시에 기니피그인 그녀는 가장 사적이고 육체적인 반응으로 여겨지는 습관마저 개인적이지 않은 것으로서 벌거벗겨 세우는 관음증 환자였고 본래의 습관을 파괴당하거나 새로운 습관을 이식 당하기를 원하는 실험체였다.



  ‘삶-예술’에서 특히 죽기 전까지 무기한 지속된 <드롭아웃 피스>와 <여성 보이콧>은 시장성에 근거한 예술과 매매되고 교환되는 여성성에 근거한 성별 이분법이 약속하는 생산주의의 낙관과 편안하고도 불가피한 의존을 끝없이 기각하려는 시도였다. ‘삶-예술’은 관념적인 비판 의식을 갖추고 자기 바깥을 바라보는 주체를 구성하는데 머물기를 거부하고, 사회적 몸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습관의 차원에서 스며 있는 생산과 재생산의 논리를 제 살갗과 함께 박박 벗겨낼 때 남게 되는 것을 끝까지 응시하길 고집하는 작업이었다. "사적인 동시에 공적인 전면적 혁명"에만 참여하겠다는 의지의 연장으로서 <드롭 아웃 피스>는 자본의 언어로는 개인적인 파멸이며 자기 말살이었고, 무수한 여성의 경력 단절 사례 중 한 가지로 기술될 수밖에 없었다. 로자노의 생전까지는 말이다.



  로자노는 60년대 개념 미술을 대표하는 얼굴들 중 하나였으나 작업의 일환으로서 예술계로부터 종적을 감추고 사망한 뒤 십 수년이 흘러 2010년대에 들어서야 비평적으로 재발굴되기 시작했다. <드롭아웃 피스> 도중 그녀가 살았던 무명의 예술-삶에 대한 기록의 발굴도 함께 이루어지는데, 그것은 어머니를 최소한 한 번은 때려서 기절하게 만들고, 옛 예술가 친구들과 남자친구들의 집을 전전하고, 자신의 그림들을 창밖으로 쓰레기와 함께 집어 던지며, 집세가 밀리고 방화를 할 위험이 있어 강제 퇴거를 당하는 등13의 반사회적이고 병리학적인 낙오자(dropout)의 것으로 읽힐 일화들을 포함한다. 예술 노동자가 되기를 거부했던 로자노는 보통의 노동자로 기능하는 것도 실패한다. 자필로 쓰인 기록물 없이 타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무성한 소문과 추측의 건더기로 졸아든 "낙오자"(dropout) 국면은 병적인 과격성을 소거했을 때 믿을 만하게 나타난다는 주체적 의지라는 것이 얼마나 개입되었는지 따져보는게 무의미해지는 지점이다. 애초부터 로자노는 모든 선택을 능히 해낼 수 있는 신과 같이 전능한 주체적 의지를 말하는 대신 그녀의 작업들이 그녀를 몰아 간 불가피한 도착점으로서 <드롭아웃 피스>를 말했다. "내가 드롭아웃 피스를 하는 것은 불가피했다. 왜냐하면 나는 과정들의 묶음 속에서 작업하기 때문이다. (...) 나는 정말로 내게 힘이 있다는 것을 믿기를 원하며, 나 자신의 운명을 완성하길 원한다." "과정들의 묶음"으로서 삶-예술은 눈덩이를 산비탈을 타고 굴러 떨어트리며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게 하는 중력이었다. 로자노는 그 눈덩이가 예술가 브랜드이자 노동자로서 리 로자노를 철저히 깔아뭉개도록 방조하는 것에서만 변혁의 힘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의 ‘독창성’을 재조명하는 사후 평가와 망각된 여성 예술가들을 복원하려는 페미니즘 담론에 맞물려 생전 리 로자노의 이름이 경매 시장과 미술관에서 활발히 오르내리는 동안, <드롭 아웃 피스>와 <여성 보이콧>은 여전히 유토피아적 전망의 연장된 실패를 재생하고 있다. 노동과 자본, 여성 구획의 교차로부터 해방된 총체적 혁명 이후의 공동체를 향한 소속감은 가상적이며 독창적일 정도로 어리석은 것으로 남아있다. 이 어리석은 기획이 불가피했다고 “거의 술에서 깬 상태”(Near-Sober State)의 예술 몽상가가 남긴 마지막 기록과 뒤 이은 기록의 실종 속에서 <드롭아웃 피스>는 노동할 수 없는 시간이 뚫는 모든 외상적 공백에의 안팎 없는 재현이기도 하다. 그것은 노동할 수 없는 시간을 최저 시급, 초과 근무, 원산지로만 아는 이들에게서 피를 빨아 다음의 출근을 예비하는 휴식, 로또를 기다리지 않으며 기다리는 한 주, 가족 계획의 연보, 생산과 재생산의 시간으로 구획되는 시간 바깥의 시간, 아직 시간인 적 없는 시간을 향한 불가피한 열망이 발현된 열병이자 파업으로 전환한다. 





3.
  러시아의 좌파 행위 예술가들이 누리는 대중적인 인기가 “록 스타”에 비견할 만하다는 비유는 여러 모로 정확하다.14 대안적 세계를 향하는 반 권위적인 충동을 공연장 안팎을 가리지 않고 삶 전체로 옮겨 놓는 독보적인 개인, 한 때 서구에서 록스타들의 역할이라고 여겨졌던 그 역할을 러시아의 행위 예술가들은 러시아의 전통과 맥락 속에서 현재적으로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LGBT 및 페미니스트 운동과 좌파 정치에 대한 지속적인 탄압 속에서, 러시아의 행위 예술은 적극적인 연대와 저항의 차원에서 미술관을 거부하고 슈퍼마켓, 지하철, 길거리와 광장, 경찰서로 향한다. 경찰 폭력과 정교회, 푸틴이 함축하는 남성적 권위와 그에 순응적인 자본에 대한 반감을 폭력적으로 분출하는 러시아 행위 예술은 “극단적인”, “반체제적”, “펑크적인” 그리고, “무정부주의적인”과 같은 수식어들에 연계되어 공격받거나 찬양 받으며, 실제로 행위 예술가들은 망나니 짓(hooliganism) 죄목으로 빈번히 투옥된다. 펑크 페미니즘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악명 높은 록 그룹, “푸시 라이엇”(Pussy Riot) 또한 <펑크 기도Punk Prayer> 작업으로 인해 이 망나니 짓 선고를 받았다.15 알록달록한 복면을 뒤집어쓴 채 모스크바의 정교회 성당을 기습 점거하고 올려 진 <펑크 기도>는 “홀리 쓋”(Holy Shit)이란 후렴구를 반복하는 <성모여, 푸틴을 제거해 주십시오Virgin Mary, Put Putin away>를 부르고, 제단 위에서 허공을 향해 주먹질하며 성모에게 페미니스트가 되라고 악다구니 쓰는 목소리로 재촉하는 것이었다.16




Figure5. 푸시 라이엇(Pussy Riot) 사진 출처: http://animalnewyork.com/2012/how-pussy-riot-started-a-religious-revolution/



  푸시 라이엇(Pussy Riot)이 분파로서 속해 있던 행위 예술가 그룹 “보이나”(Voina)는 당신들은 예술가가 아니라 깡패 무리일 뿐이란 국가의 목소리를 과잉 긍정하며 2000년대부터 2010년 초반까지 활발히 활동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테러리스트나 게릴라에 동일시하고 미술관과 큐레이터의 후원 일체를 거부해왔다. 보이나는 러시아어로 ‘전쟁’을 의미한다. 중세 슬라브의 카니발 문화와 20세기 초 미래주의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보이나는 그들의 전쟁이 “영혼 없고 상업적인 개념 미술”과 “예술-쓰레기” 사이의 위계를 생산하는 예술 시장으로부터 현대 예술을 해방시키고, 가부장적인 이념과 상징들의 전복과 파괴를 향할 것이라고 호기롭게 선언한다.17 그렇게 무결하고 정당해 보이는 기치 아래에서 보이나는 다음과 같은 작업들을 진행했다. <FSB에서 포착된 좆Dick Captured by FSB>(2010)에선 KGB의 후신인 FSB 청사 맞은편의 도개교가 올라가기 전, 교통 통제 중인 경찰들을 자전거를 타고 따돌리고 20초만에 거대한 페니스 그래피티를 그려서 FSB를 향하여 “기념비적인 엿”을 날렸고, <연회Feast>(2007)에선 지하철 한 량을 불법 점거해 부조리 시인을 추모하기 위한 뷔페를 차려 놓고 폭식과 폭음을 벌인 뒤 치우지도 않고 떠났다. <데카브리스트를 기념하며In memory of Decembrist>(2008)에선 모스크바 시장의 인종 차별과 반 동성애 정책에 항의해 백화점에 들이 닥쳐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이주민 노동자들과 드랙퀸을 목매다는 쇼를 벌이고, <친위 쿠데타Palace Coup>(2010)에선 대여섯 명씩 짝지어 경찰차들을 보이는 족족 전복시켰다. 사유 재산과 공공 기물의 훼손, 절도 행각, 허가 받지 않는 시위, 외설죄로 넉넉히 처벌받을 만한 작업들을 예술이란 ‘핑계’, ‘방어막’ 혹은 ‘알리바이’ 아래 진행한 그들은 말 그대로의 반달리즘을 미학적 이상향으로 삼아 버린 듯하다. 그들의 공동 작업은 물질적인 흔적을 남기지만 그 물질성은 차라리 범죄 행각의 증거나 되지, 상업화되기에는 무리가 있음이 꽤나 분명하다. 도개교에 그려진 페니스는 소방차가 와서 수고스럽게 씻겨내야 했고, 지하철의 음식물 쓰레기들은 철도 공무원들에 의해 버려져야 했으며 전복된 경찰차는 다시 본래의 위치로 돌려놓아져야 했다. 불법 행위 자체인 작업 과정은 저화질의 캠코더로 잽싸게 촬영되고 저렴하게 편집되어 유투브에 올려진다. 보이나의 이름으로 활동한 예술가들은 작업이 끝난 후에도 빈 집에서 무단으로 주거하는 스쿼터(squatter)이자 상습적 절도범으로 살아가며 쓰레기통에서 중고 옷을 주워 입고 이러한 삶의 방식 또한 “예술”이라고 주장한다.18




Figure6. Voina Art Group. FSB에서 포착된 좆 Dick Captured by FSB. 2010. 출처: https://yadi.sk/a/Z8bWO0pu3XGMhz



  보이나 안에서 “전투적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행동주의자들에게 반계몽주의를 타파하는 것은 가부장제와의 전쟁에서 중요한 관문이다. 그러나 계몽을 내세운 그들의 행동주의 예술은 실상 계몽에 철저히 무관심한 게 아니냐는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과잉의 연극성을 띄고, 이 연극성은 예술 제도 상의 합의와 안전 장치에 근거하지 않아 자주 범죄적이고 폭력적이다. 그들에게 있어 통상의 계몽하는 자와 계몽되는 자의 구도는 만인의 타산지석인 “망나니들”에게 오용되었을 때만 유효하다. 페미니스트 행동주의자들의 작업은 극단적인 선정성이 특징인데, ‘충격 실화’나 여자들의 ‘엽기 행각’ 운운하는 식으로 표제를 만들기 딱 알맞아 하이에나처럼 황색 언론이 몰려든다. 이 여자들의 존재 자체가 보편적인 도덕관에 호소하기 즐기는 우파들이 페미니스트 정치를 폄하하는 빌미로 소용되기도 한다. 그녀들의 부도덕함을 비난하는 정상 가족과 정교회 옹호자들이 작업을 크게 오해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 예술가들은 노동력이 묵묵히 조율되며 매끄럽게 굴러 떨어지는 일상을 엉망으로 만들고 하나의 봉변이며 재난으로서 출몰하기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2010년 7월 10일 시연된 <어떻게 닭을 훔치는가? 한 년이 보이나 그룹 전체를 먹여 살리는 방식에 대한 일화How To Snatch A Chicken? The Tale Of How One Cunt Fed The Whole Group>가 대표적인 ‘충격 실화’로 인용된다. 이것은 “얼간이들의 영부인”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보이나 예술가가 우아하게 차려 입은 채로 슈퍼마켓에 그녀의 “시녀들”과 “하인들”을 대동하고 나타나 닭 한 마리를 성기에 통째로 쑤셔 넣어서 훔치는 작업이다. 영부인이 치킨을 훔치는 동안 다른 운동가들은 “BEZBLYADNO”라고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CCTV를 가린다. “매춘을 집어치워라” 정도로 번역되는 이 어구는 “공짜로”(бесплатно)라는 유사한 발음의 단어를 활용한 말장난이기도 하다. 영부인의 대변인은 창녀(блядовать)가 옛 러시아어에서 기만과 망상을 의미하기도 했다는 맥락을 되살리며, “아파트, 여름 별장, 자동차를 꿈꾸는 현대의 평신도 남자들”이야말로 오늘날의 창녀라고, 세계에 거주하는 “모든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창녀”라고 답한다. 닭은 “상품”이 아니라 “권리”라는 공산주의적 논리로 말하는 그들에게 노동으로 벌어들인 떳떳한 돈으로 닭을 구매하는 것보다 닭을 성기에 넣어 훔치는 것이 더 고상하다. 영부인은 페미니즘의 승리를 합창하던 슈퍼마켓 바깥의 운동가들에게 돌아가 “황금 불알이여, 엿먹어라”고 외친다.19 “나는 왜 이렇게 지혜로운가”,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운운하던 니체처럼 자찬하기를 즐기는 보이나는 이 작업이 “러시아의 혁명가들이 음식을 훔치는 관행을 채택하도록 촉구”했으며, 마침내 다 함께 “불매의 날”을 기념하기 시작했다고 회고하면서 절도 혁명의 가상적인 역사에 자신들을 집어넣는다.20




Figure7. Voina Art Group. 어떻게 닭을 훔치는가? 한 년이 보이나 그룹 전체를 먹여 살리는 방식에 대한 일화 How To Snatch A Chicken? The Tale Of How One Cunt Fed The Whole Group. 2010. 출처: https://plucer.livejournal.com/




  2011년 보이나 소속 푸시 라이엇 멤버들이 진행한 <쓰레기에게 키스하라Лобзай мусора> 혹은 <키스 트레이닝> 작업은 레즈비언 차별과 LGBT 운동가들을 향하는 빈번한 증오 범죄에 대항하는 시위였다. 그들이 이 시위에서 취한 역할은 권리를 주장할 정당성을 꼼꼼히 갖춘 동성애자 시민이 아니라 1호선의 레즈비언 치한이었다. 행동주의자들은 길거리와 지하철에서 마주 치는 여성 경찰관들에게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는 작업을 진행했다. 쓰레기(мусора)는 경찰을 이르는 속어이기도 하다. 보이나 멤버들은 자신들의 작업이 성추행임을 인식하며, 성추행이란 것을 혹시나 못 알아볼까 봐 한 번 더 자신들의 행동의 부적절함을 강조한다. 두 달간 대략 백명의 경찰에게 키스를 시도했다고 주장하는 톨로코니코바(Толоко́нникова)는 “놀란 경찰관들에게는 업무를 재개할 힘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고, 그래서 모든 활동가들은 구속되지 않은 채 잠복할 수 있었다”고 자랑스럽게 경과를 보고한다.21 그들은 동시에 이 강압적인 키스가 자신의 성적 지향을 고민하는 어떤 여성 경찰관에게는 유익한 훈련이었을 거란 대단히 반여성주의적으로 들리는 주장을 펼치기에 이른다. 편집해 올린 작업 영상 속에서 몸싸움을 벌이거나 충격으로 경직된 경찰관들의 모습은 일련의 동성 키스 습격이 유쾌하거나 최소한 황당한 농담으로만 수용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22 지하철에 앉아 있거나 광장에서 순찰을 서다 난데없이 키스를 당하는 경찰들의 초상권은 전혀 존중을 받지 못한다. 차르에 반하던 유대계 러시아인들이 저항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불렀던 노래가 영상의 배경 음악으로 재생되며 “파업하라! 동지여, 자신을 해방시켜라! 경찰을 타도하라!”라는 가사를 담고 있다. 그들은 폭력적 노동 착취에 대항하는 폭력적 파업의 논리를 국가적 이성애 규범 장치에 대항하는 정치적 예술에 차용한다. “쓰레기에게 키스”한다는 목표는 또한 침입하는 몸, 습격하고 들러붙으며 매달리는 몸 전체를 활용해 금기시된 권위주의를 향한 레즈비언적 매혹을 표명하고 있다. 모든 것은 아주 손쉽게 자유주의적인 저항의 언어로 쓰일 수 있을 수도 있었을 정당화로부터 떨어져 나가고 벗어나 버린다.



Figure8. Voina Art Group. 쓰레기에게 키스하라Лобзай мусора 중. 2011.  



  성기를 주머니 삼아서 닭을 절도하는 여자가 페미니즘의 개선 장군으로서 슈퍼마켓을 나서는 동안 아파트를 꿈꾸며 성당을 다니고 번듯한 일을 하는 남자들이 “창녀”로 비난을 받고, 레즈비언 치한들은 자신들을 체포할 수도 없을 만큼 놀란 여성 경찰관들을 쓰레기라고 부른다. 슬라브 광대 예술가들의 신성 모독과 인신 모독 전통을 적극적으로 계승한 위의 두 가지 작업들은 저급한 쾌락의 언어로 휘갈겨 쓰고 미완으로 완성한 희극의 대본을 난데없이 공연하며 페미니스트 카니발을 개최하려 든다.



  바흐친은 사제들과 부르주아들이 혐오를 한 몸에 받는 돼지를 예찬하기를 주저하지 않던 카니발을 저급과 고급의 이항 대립이 뒤집히는 비-공간, “거꾸로 선 세계”이자 민중의 유쾌함을 통해 탈영토화된 공간 등으로서 유토피아적으로 읽어냈다. 그러나 앨런 화이트는 카니발이 민주주의적 시공간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사태가 좀 더 복잡했음을 지적한다. 역사적으로 카니발은 돼지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을 돌팔매질하고 발에서 땀이 날 때까지 뛰어다니게 만드는 “인종주의적 폭력 의례”를 포함했다. 돼지는 찬미 받는 만큼이나 “악마화된 타자의 상징적 비유”이기도 했다. “저급한 집단이 더욱 저급한 집단에게”, 즉 민중이 여성, 인종적 타자, 장애인, 동물에게 적대를 돌리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웃음은 자주 기득권의 안정적인 체제 유지에 봉사하는 웃음이었다.23



  보이나의 페미니스트들과 푸시 라이엇은 분명 그들의 공연 속에서 카니발의 절대적인 악마화의 폭력성을 활용하고 환기시키면서 소위 ‘당해도 싼’ 희생양이며 ‘부역자’인 이 전쟁의 적을 서슴없이 지목한다. 그리고 적의 이름은 경찰, 사유재산을 존중하는 양심적인 소비자, 푸틴, 대단히 자랑스러운 삶을 산다는 자본주의-걸레-남자들이고, 국가주의적 이성애 규범성이다. 불법 점거와 습격을 애용하는 페미니스트들은 자신의 공연에 참가하지 않을 권리를 박탈하고 모두를 합의한 적 없는 배우로 전락시키는데, 임의의 인간 가죽을 입은 경찰 제복은 그들의 고정 객원이나 다름없는 지위와 인기를 누린다. 경찰들에 의해 맞거나 끌려 나가거나 쫓기며 이 카니발에서 퇴장을 당하길 의도하는 그들은 사실 그들 자신의 공연에서 가장 비천한 존재, 내쫓기고 돌팔매질 당하는 암퇘지들이기도 하다. 서류 없이 살아가는 수배자인 것을 자랑스럽게 밝히는 어머니 실격자이자 보이나의 지도자 나탈리아 소콜(Наталья Сокол)은 예술가이자 반달리스트로서 행한 작업들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으로 변모했는지 선언조로 답한다.



“우리는 공공 장소에서 섹스를 했고,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찰서를 침입했고, 더 이상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리를 두렵게 할 만한 게 또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죽음을 미래에 다뤄 볼 것이다. 곧 우리는 완전히 두려움을 모르게 될 것이다.”24 



  불가피한 생물학적 공포로서 죽음이 경찰서에의 침입과 공공 장소에서의 섹스의 연장선에서 위치 지어진다. 생물학적 죽음은 사회적인 죽음과 단절되어 파악되지 않으며, 스펙트럼 상의 저편에 놓인다. 소콜에게 있어 예술은 모든 종류의 사회적 권위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고 인간 미만으로 떨어진 정치적인 짐승이자 니체적 초인으로 예술가를 서서히 변형해가는 방법론이었고 대안적 삶을 선택할 가능성이 아닌 대안적 죽음의 가능성을 조금씩 육화해 나가는 일이었다. 그들의 웃음은 신성 불가침의 노동과 상품 경제의 영역, 국가주의와 법제화된 권익 담론의 이율배반 아래 억눌린 대안에의 상상력, 언제나 무책임의 오명을 벗을 수 없다는 그 상상력을 무차별적으로 구토해 놓는 것에서 온다. 상상력은 상품 경제와 임금 노동을 완전히 붕괴시킬 때까지 장물을 꾸역꾸역 삼킬 수 있는 공포스러운 여성기의 심상과 경찰들을 모조리 레즈비언으로 “교정”시켜 업무를 마비시키겠다는 정치적 치한의 포부에 기반을 둔다. 재판, 투옥과 감형 내지는 석방을 반복하며 흩어지거나 또 새롭게 충원되기도 하는 푸시 라이엇과 보이나의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은 실패한 농담 같은 진담을 지향하며 삶 전체를 극화했다. 그들의 작업은 분명 러시아 시위 예술의 계보와 푸틴 장기 집권 시대의 고도의 정치적 맥락에 입각해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그들의 작업과 삶을 오로지 러시아적인 것이라고 한정 짓는 시선의 한계는 “독재 정부에 반하는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시위의 한 판본”인 한에서 “전투적 페미니스트들”을 대견하게 바라보고 지지하던 유럽과 미국의 열광 속에서 잘 드러난다.25 그들의 예술-죽음은 자본, 국경, 가부장제와 섹슈얼리티의 그늘 없는 지도 뒤편에 드리운 범죄적인 응달에 걸쳐 살아가는 암퇘지들을 향하는 연대, 이미 실패했거나 앞으로도 실패할지 모르는 연대의 카니발적인 차원을 향한다. 






필자 소개
뚜이부치. 레즈비언 유튜브는 못 보는 유튜브 애청자.  

1. Dimitrakaki, A. (2018, June). “Feminism, Art, Contradictions”. Retrieved July 11, 2020, from https://www.e-flux.com/journal/92/205536/feminism-art-contradictions/  

2. 허희 (2019년 12월 29일), 「‘불운한 천재’ 신화 주인공 대신 ‘근면한 예술 노동자’ 고흐」, 서울신문, 2020년 7월 11일에 확인함.

3. Halberstam, J. (2011). “The Queer Art of Failure”. Duke University Press. pp.19

4. Lozano, L. “Art Workers Coalition Statement”, reproduced in A. Szymczyk (ed.), the complete archive of the Open Hearing statements made available by Primary Information, Retrieved July, 11, 2020. http://primaryinformation.org/files/FOH.pdf. pp.139

5. Lozano, L. (2017). “Lee Lozano. Private book 8”. New York: Karma, 5 April 1970, pp.114

6. Lozano, L. (2017). “Lee Lozano. Private book 8”. New York: Karma, 5 April 1970, pp.120

7. Lehrer-Graiwer, S. (2014). Lee Lozano: dropout piece. Afterall Books, pp. 19

8. Lozano, L. (2017). “Lee Lozano. Private book 2”. New York: Karma, pp.82

9. Lozano, L. (2017). “Lee Lozano. Private book 6”. New York: Karma, c.14 February 1970, p.205


10. Lozano, L., Mangold, S. P., Semmel, J., &amp; Molesworth, H. (2008). “Solitaire: Lee Lozano, Sylvia Plimack Mangold, Joan Semmel”;. New Haven, Conn.; London: Yale Univ. Press. pp.32

11. Aron, N. R. (2017, September 29). This radical artist ignored women for a project, but then kept up the boycott her whole life. Retrieved July 11, 2020, Medium. https://timeline.com/lee-lozano-boycott-women-20d7e892e6b

12. Lozano, L. (2017). “Lee Lozano. Private book 2”. New York: Karma, pp.12-13

13. Lehrer-Graiwer, S. (2014). Lee Lozano: dropout piece. Afterall Books, pp. 92-93

14. Whalley, Z. (2017, November 20). “7 Russian Performance Artists Who Have More Fans than Hollywood Actors”. Retrieved July, 11, 2020. https://theculturetrip.com/europe/russia/articles/7-russian-performance-artists-who-have-more-fans-than-hollywood-actors/

15. Narizhnaya, K. (2018, June 25). Pussy Riot Trial Nears Verdict in Moscow. Retrieved July 13, 2020, from https://www.rollingstone.com/music/music-news/pussy-riot-trial-nears-verdict-in-moscow-100993/

16. Pussy Riot - Punk Prayer "Virgin Mary, Put Putin Away" 영상 및 영문 자막 링크 https://youtu.be/lPDkJbTQRCY

17. free_voina_en. What is Voina? Tumblr. https://en.free-voina.org/about

18. Peter, T. (2012, August 16). Photographer's blog: Witness to Pussy Riot's activist beginnings. Reuters. Retrieved July 11, 2020, https://www.reuters.com/article/us-blog-pussy-riots/photographers-blog-witness-to-pussy-riots-activist-beginnings-idUSBRE87F0PW20120816

19. Chernyshevsky, N. G. (2010, July 24). Новая акция группы Война "Пошто пиздили Куру?" или "Сказ о том, как Пизда Войну кормила". LiveJournal. https://plucer.livejournal.com/281211.html 

20. Free-Voina-En. (2015, September 28). In memory of Leo the Fucknut, the VOINA's President. Retrieved July 11, 2020. Free Voina. https://en.free-voina.org/post/130058793416

21. публикации, время. (2011, March 1). Девушки из арт-группы "Война" насильно целуют женщин-милиционеров (ВИДЕО). Retrieved July 11, 2020. https://www.newsru.com/cinema/01mar2011/voina.html

22. <쓰레기에게 키스하라> 영상 기록. Группа Война зацеловывает ментов, Retrieved July 11, 2020, https://youtu.be/l0A8Qf893cs

23. Stallybrass, White & White, Allon. (2019). 『그로테스크와 시민의 형성: 경계이월의 정치학과 시학』. 이창우 옮김. 서울: 커뮤니케이션북스 pp. 109

24. Jones, T. (2017, December 26). The Art of "War": Voina and Protest Art in Russia. Retrieved July 13, 2020, from https://museumstudiesabroad.org/the-art-of-war-voina-and-protest-art/


25. Žižek, S. (2013, November 15). Nadezhda Tolokonnikova of Pussy Riot's prison letters to Slavoj Žižek. Retrieved July 13, 2020, from https://www.theguardian.com/music/2013/nov/15/pussy-riot-nadezhda-tolokonnikova-slavoj-zize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