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양과 같은 느낌과 코뮤니스트 정동






재키 왕
번역: 양준호




재키 왕의 연구 관심사는 매우 넓다. 첫째로, 가장 중요하게는 감옥 폐지론(prison abolitionism)이 있고, 감금 시스템(carceral system)과 부채 경제(debt economy) 사이에 존재하는 (인종 불평등과 위태로움을 영속화하는) 연결고리가 이에 속한다. 하지만 그녀의 작업은 또한 함께하기에 관한 시를 탐구하기도 한다. 이 작업은 “나”의 경계를 초월하는 개체성(individuality)에 관한 연구이다. 이것은 “대양과 같은 느낌”의 경험으로, 이는 예를 들면 앨리스 콜트래인의 음악과 같은 음악이나, 명상을 통해 달성될 수 있다. 로맹 롤랑부터 줄리아 크리스테바까지, 마리온 밀너부터 프레드 모튼까지 다양한 저자들의 이론을 논평하면서, 재키 왕은 사회성의 다른 형태의 지평을 그려나간다.
 



어제, 나는 뤼실 하지할릴러비치(Lucile Hadžihalilović)의 신작 영화 <진화 Evolution>를 보았다. 로라 컨은 이 영화에 대해 쓴 리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지할릴러비치가 많은 성숙한 젊은이들이 벗어나기 어려워하는 ‘모성적인 물’을 재현하며 말한 것과 같이, 물은 도처에 존재한다”. 영화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 Black Sun: Depression and Melancholia』의 치명적인 바다를 묘사한다. 나는 트위터에서 “모성적인 것과 대양과 같은 것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는 오늘 그 주제에 대해 쓴 에세이를 공유하겠다고 약속했었다. 자, 여기 있다. (내 지도교수가 이 글을 선집으로 출판하길 원해서, 나는 결국 이 글을 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 에세이는 대양과 같은 느낌(oceanic feeling)에 창조적으로, 사회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함축된 의미에 대한 글이다. 이 글은 신비주의에 관한 정신분석학, 종교에 관한 정신분석적 논의들, 프레드 모튼(Fred Moten), 스피노자, 정동 이론, 그리고 비판 이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흥미로울 것이다. 이 글에 더 다루고 싶었던 내용들이 있었다. H. D.가 『프로이트에게 바치는 헌사 Tribute to Freud』에서 쓴 대양과 같은 경험(oceanic experience)에 대하여. 창조성에 관한 정신분석에 대하여. 윌프레드 바이온과 마이클 에이겐, 그리고 신비주의에 관해 저술한 다른 정신분석가들에 대하여. 트라우마와 황홀한 경험, 그리고 괴물성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신비주의의 정치적 차원에 대하여…

슬프게도, 우리는 모든 에세이마다 모든 내용을 다 말할 수는 없다.

이제, 뛰어들어보자…



***



1923년에서 1936년 사이, 프랑스 소설가이자 신비주의자인 로맹 롤랑(Romain Rolland)은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스무 통의 편지를 주고 받았다. 롤랑과 주고 받은 편지를 통해 영감을 받아 프로이트는 그의 1930년 책 『문명과 그 불만』에서 “대양과 같은 느낌”이라는 개념을 정교화했다. 프로이트는 이 책에서 “대양과 같은 느낌”을 유아가 스스로를 어머니와 구별하지 못하는 유아기의 전-오이디푸스적 존재 방식으로의 퇴행을 표시하는, 한계와 경계가 없고 광대한 느낌으로 묘사한다. 하지만 롤랑은 “대양과 같은 느낌”을 누군가가 우주와 교감(commune)할 수 있도록 하는 신비한 느낌으로 묘사한다. 롤랑에게는 “대양과 같은” 것은 모든 종교적 경험에 근본적으로 깔려 있는 정동적인 상태였다.

이 글은 정신분석학적 담론과 철학적 담론 속에서 “대양과 같은 느낌”이라는 개념을 검토한다. 첫째로, 나는 대양과 같은 느낌과 신비주의적 경험에 대한 프로이트와 줄리아 크리스테바, 그리고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논의를 추적한다. 다음으로, 나는 영국의 정신분석가인 마리온 밀너의 창작 과정에서의 대양과 같은 상태에 대한 익살스러운 고백을 살펴볼 것이다. 그런 다음, 나는 롤랑의 스피노자주의적 개념으로서의 대양과 같은 느낌을 검토하고 그것의 사회적인 함의들에 대해, 특히 코뮤니스트적인 사회적 모드의 정동적 토대를 제공하는 대양과 같은 상태의 잠재성에 대해 논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프레드 모튼의 흑인성에 대한 이론화가 “대양과 같음”을 흑인성과 중간항로의 트라우마와 연관시킴으로써, 어떻게 “대양과 같음”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이해를 수정하는지 논할 것이다.

프로이트, 롤랑, 크리스테바의 작업 속에는 대양과 같음에 관해 두 가지의 구분되는 관념이 작동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대양과 같음을 방어적이고, 유아적이고, 분리적인 개념으로 간주하고, 다른 쪽에서는 대양과 같음을 기쁨으로 가득하고, 연결되고, 통합시키는 개념으로 간주한다. 나는 이 글에서 코뮤니스트 정동 프로젝트를 정교하게 할 목적으로 대양과 같은 느낌에 대한 후자의 이해 방식을 채택할 것이다. 특별히, 나는 자아(ego)의 분열이 어떻게 세계 및 다른 것들을 향한 지향을 바꿔내는지에 관심이 있다. 대양과 같은 것이 주체성을 불안정하게 할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 나는 대양과 같은 것이 새로운 사회성과 개별화된 자아에 의존하지 않는 정치적 모델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양과 같은 느낌의 사회적인 함의들에 대한 나의 분석은 퍼포먼스 연구와 흑인 연구 분야의 학자인 프레드 모튼의 흑인성과 병렬적 존재론(paraontology)에 대한 논의를 끌고 올 것이다. 비록 일부 정신분석 사상가들이 대양과 같은 것을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최선의 경우 대양과 같은 느낌은 제라르 드 네르발의 말처럼 “세상을 덮는 투명한 네트워크”를 조명하고, “모든 것이 살아있으며 움직이고, 모든 것이 일치하는” 방식에 대해 우리를 민감하게 만들 수 있다.1





퇴행: 프로이트와 크리스테바

1930년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2는 그의 책 『문명과 그 불만』에서 “대양과 같은 느낌”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대중화했다. 2장에서 그는 그의 1927년 텍스트인 「어느 환상의 미래」가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은 신비주의자와 성인들의 “종교적 감정의 원천”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인생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역할이라고 말한다. 프로이트에게 있어, “위인”들은 종교적 감정을 잘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책의 서문에서 한 “위인”의 언급을 논하며 종교에 대한 그의 분석을 전개한다. 그 위인이 바로 종교적인 학자이자, 소설가이자, 신비주의자인 로맹 롤랑이다. 롤랑은 「어느 환상의 미래」를 읽은 후 프로이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종교에 대한 프로이트의 비평에 동의하지만, 프로이트가 어떤 의미에서 모든 종교는 “대양과 같은 느낌” 혹은 신비로운 경험에 기인한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쓴다.

“그런 소수의 예외적인 위인 중 한 사람은 친구를 자처하며 나에게 편지를 보낸다. 나는 종교를 환상으로 다룬 내 글[「어느 환상의 미래」]을 그에게 보낸 적이 있다. 그러자 그는 답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종교에 대한 내 견해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내가 종교적 감정의 진정한 원천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은 점이 아쉽다고. 그의 말에 따르면 종교적 감정의 진정한 원천은 어떤 독특한 느낌에 있다. 그 자신은 한시도 이 느낌에서 벗어난 적이 없고, 그 밖에도 많은 사람이 이 느낌을 확인했으며, 수많은 사람에게 이 느낌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 느낌을 한계와 경계가 없는 ‘영원’에 대한 감각, 말하자면 ‘대양과 같은 느낌’이라고 부르고 싶어 한다. 그는 이 느낌은 신앙상의 교의가 아니라 순전히 주관적인 사실이라고 덧붙인다. 이 느낌은 개인의 불멸을 약속해 주지는 않지만, 종교적 에너지의 원천이다. 여러 교회와 종교 체계는 이 종교적 에너지를 포착하여 각자의 경로로 끌어들이고, 에너지를 고갈시키기도 한다. 모든 신앙과 모든 환상을 거부하는 사람도 이 대양과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자신을 종교적이라고 불러도 좋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11; 243-244)

프로이트의 기술에 따르면, 롤랑의 관점에서 체계화된 종교가 영원성의 주관적 경험에 대한 바람직하지 않은 왜곡(perversion)일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대양과 같은] 근원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그리고 나서 프로이트는 “대양과 같은 느낌”에 대해 감정에 관한 “과학적” 연구를 착수하기 어렵다고 주장함으로써 “대양과 같은 느낌”을 정신분석적 주제로 연구하기를 미묘하게 기각한다. 그런 다음, 프로이트는 “그런 대양과 같은 느낌의 일차적 본성”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롤랑의 주장에 대한 프로이트의 기각은 그의 대양과 같은 경험의 본성에 대한 무시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는 “나 자신에게서 이 ‘대양과 같은’ 느낌을 찾을 수가 없다”고 쓰지만, 다른 사람들이 대양과 같은 느낌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진 않는다고 인정하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대양과 같은 느낌에 대한 롤랑의 견해를 “외부 세계 전체와 결코 풀 수 없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다는 느낌”(12; 245)으로 묘사한다. 정신분석학적 측면에서 프로이트는 이 “느낌”을—프로이트가 언급하기를 이 “느낌”은 순수한 감정적 색채(feeling-tone)가 아니라 학술적 개념이 투사된 감정적 색채이다—자아의 경계를 불안정하게 하는 방해로 이해한다. 자아가 적절히 기능할 때 그것은 자율적이고 통일된 자신에 대한 확고한 감각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주장에 따르면, 대양과 같은 감정은 과거 유아기의 젖먹이 아이가 어머니나 외부 세계로부터 자신을 구별해낼 수 없었던 때로 거슬러 올라도록 한다. 이 단계의 자아는 모든 것을 자신에 포함시킨다. 프로이트는 로마와 같은 고대 도시들이 남긴 (비)자취에 대한 묘한 이설(異說)을 통해, 이러한 [외부로부터 자신을] 구분짓지 못하는 태고의 경험이 정신의 영역에 보존될 수 있으며, 대양과 같은 느낌은 이 단계로 퇴행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대양과 같은 느낌의 경험을 뒷받침하는 심리적 과정에 대한 프로이트의 비종교적인 설명에서, 롤랑의 주장과는 반대로 대양과 같음은 종교의 필요성의 원천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대양과 같은 느낌이 종교의 원인이기보다는 오히려 나중에 종교와 연관되는 것이라고 본다. 바로 대양과 같은 느낌이 유아기의 무력감을 직면한 무력한 주체에게 일종의 위안을 제공할 때가 그렇다. “대양과 같은 느낌”에 대한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개념화는 “대양과 같은” 단계를 유아기로의 퇴행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유사하다.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에서 크리스테바는 대양과 같은 느낌을 우울증적 부인(denial), 상징적 자살의 한 형태, 그리고 “마치 몹시 기쁘고 ‘대양과 같은’ 만큼 치명적인 태곳적의 [통합된 자아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비통합(non-integration)과의 재결합(reuniting)처럼, 주체의 와해로 인한 극심한 고통 없이 주체로 하여금 자살을 범하게 만드는” “나무랄 데 없는 충만함의 환상”(19-20; 33)으로 묘사한다. 한편, 프로이트는 “대양과 같은 느낌”을 여성적이거나 남성적인 것 어떤 것으로도 특징짓지 않은 반면, 『검은 태양』에서 대양과 같은 느낌에 대한 크리스테바의 서술은 그것이 여성의 정신적 구조로부터 나온다고 암시한다. 책 전체에 걸쳐 크리스테바는 여성적 우울증을 “치명적인 대양”과 연관시킨다. 크리스테바가 “대양과 같은 감정”의 황홀한 측면—주이상스—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그녀는 그것이 “환각적인 충만함”을 성취하기 위해서 “강요된 비애를 제한 없이 펼침으로써”, 여성으로 하여금 일종의 방어적 전지전능함을 얻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상처입은 나르시시즘의 한 형태라고 일축한다(74; 98). 어떤 의미에서, 크리스테바의 대양과 같음은 역설적으로 죽음에 대한 선제적 방어인 이른 죽음의 일종이다.

[…]

크리스테바와 프로이트 둘 모두에서 대양과 같은 감정은 위협적이고, 유아적이고, 전오이디푸스기—혹은 심지어 출생 전 단계의—에서 기인하는 차이화하지 않는(non-differentiation) 경험이다. 대양과 같은 것이 위협적인 이유는 그것이 개개인의 주체의 경계를 융해시키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에게 있어서 대양과 같은 느낌은 여성의 정신적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 프로이트가 왜 음악과 신비주의 모두를 무시했는지에 대해 생각하며, 크리스테바는 그가 비록 “여성성의 ’검은 대륙’의 용감한 탐험가”일지라도, 모성적 여성성의 위협을—아마 무의식적으로?—회피하기를 시도했다고 쓴다.3 여기서 “여성성”은 일종의 익명의 땅으로 형상화되는데, 왜냐하면 여성성이 기호화에 저항하는 한 그것은 지도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크리스테바의 작업 전체에서 어두움이 대양과 같은 느낌 및 모성성의 은유로 사용됐음에도 불구하고, “대양과 같음”은 그녀의 이후 저작인 『믿을 필요가 있는 믿기지 않는 것들』에서 더욱 미묘하게 다르게 다뤄진다. 이 책에서 크리스테바는 “믿을 필요성이 있는 종교 이전의 것”을 진지하게 고찰하기를 시도하는데, 따라서 그녀는 종교와 신비주의, 그리고 대양과 같은 느낌에 관한 프로이트의 입장으로부터 거리를 둔다. 크리스테바는 믿음이 주체의 말할 수 있는 능력의 초석이 된다는 대담한 주장을 펼친다. 그녀는 “믿음은 비록 그것이 애처롭더라도 그 자체로 말하는 행위의 열쇠를 쥐고 있다. (나는 괴로워한다, 남자들은 거짓말을 한다, 등등.) 왜냐하면 내가 믿는다면 나는 말할 것이고, 믿지 않는다면 말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것을 믿는 것, 그리고 말하기를 지속하는 것은 타자를 믿을 수 있는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지 실망스럽게도 실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4 말을 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정신분석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존재를 알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크리스테바에게 지식은 이성이나 “계산된 의식(calculated conciousness)”에 국한되지 않으며 오히려 정신분석학적 맥락에서 의미화의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내적 경험에 대한 지식이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주는 기표라는 선물의 구명 뗏목이 없다면, 대양과 같은 느낌은 대상을 말살할 수 있다. 그러나 대양과 같은 느낌이 확신과 진실의 느낌을 동반하는 한, 그것은 알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함으로써 대상을 정박시킬 수 있다.

크리스테바가 『검은 태양』에서 대양과 같은 것을 치명적인 것으로 다루는 반면, 이후의 작업에서 대양과 같음은 종교 이전의 믿음에 대한 표현으로 나타난다. 크리스테바가 대양과 같은 느낌을 그저 부성적 기능과, 모성적 대양의 “파괴력”을 규제하고 “말할 수 없는 트라우마”에 “의미를 부여하는” 언어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그녀의 입장을 그렇게 많이 바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5 경험에 “이름을 붙이는” 능력은 대양과 같은 느낌이 “재앙과 같은” 자아의 해체가 되지 않도록 보증한다. 따라서 글쓰기는 또한 대양과 같은 느낌을 다루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 크리스테바가 제안하는 것은 프로이트가 했던 것처럼 대양과 같은 느낌을 유아적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대양과 같음이 의미화에 대한 정신분석적 실천의 중재와 관리를 받는 한 예술적인 영감의 재능(gift)이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방식으로, 대양과 같은 느낌을 새로운 방향으로 다루는 것이다.

크리스테바에게 있어서 종교 이전의 믿음을 확인하는 것은 종교와 대양과 같은 느낌과 마찬가지로 매우 중요한데, 그 이유는 세속화와 믿음의 폐지는 중대한 사회적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크리스테바는 세속화가 홀로코스트와 인과적 관계에 있다고 말하며, 도가 지나치게 멀리 나아간다. 어쩌면 대양과 같은 감정의 “트라우마적 자극”을 제거하거나, 거부하거나, 피하거나, 제어하려는 시도보다는, 그 안에 거주하고, 모성적 질식의 역겨운 두려움을 진정시키고, 정신분석이나 예술적 창작과 다른 승화의 행위를 통해 경험의 다른 면에서는 자아를 초월한 공간과 자아 밖의 공간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에 관한 재능을 처리하고 이름을 붙임으로써 동화시킬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 그 느낌(충만하고 행복해지는 것) 속에서 살아 가는 것이 더 이치에 맞을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발산하는 정동적 공간들 사이를 오가거나 서로를 강화하도록 할 수 있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창조성과 살아 있음: 마리온 밀너

아이 같은 상태로 “퇴행”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나쁜가? 대양과 같은 느낌을 무력감에 대응하여 전능감을 회복하려는 유아기의 요구로 생각하기보다는 창조성의 순환 속의 단계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유아기로의 복귀는 정신에서 특정 종류의 지식을 깨끗이 지우고 주체를 다시 태어나도록 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창조성에 관한 정신분석에서 창조적 단계는 종종 어린이의 몰입된 놀이 경험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유아기는 미숙하거나, 방어적이거나, 현실에 대처하지 못하는 주체의 무능력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실험적이고, 회복적이고, 기쁨 가득하고, 활기를 띠는 것으로 생각될 필요가 있다.

영국의 정신분석학자 마리온 밀너의 연구6에서, 창조성은 주체가 집중된 의식이 간간이 새어나오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세계”로 내려가는 시기를 포함하는 변증법적이고 순환하는 과정이다(156). 이것을 다른 방식으로 말하자면, 밀너가 안톤 에렌츠바이크의 작업을 끌고 오면서 말하는 “심층적 정신”과 “표층적 정신” 사이에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1956년 그녀의 에세이 「정신분석과 예술」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분석가들이 어머니의 품 안에서 유아가 반복해서 느끼는 것으로 묘사한 심리 상태, 즉 프로이트가 대양과 같다고 부른 그 상태는 따라서 예술에 관한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창조적 과정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간주되고 있다. 하지만 대양과 같은 감정이 그 자체로 신비주의적인 상태인 것은 아니다. 대양과 같은 상태는 오히려 에렌츠바이크가 말하는 표층적 정신의 활동과 함께 순환적인 진동 속에 있는 것으로, 마리테인(Maritain)의 표현에 따르면, 그 표층적 정신의 활동은 ‘사물’과 자아를 함께가 아니라 분리하여 파악한다. 그리고 순환적인 진동은 그저 수동적으로 경험되기보다는 무언가를 만들고 생산하려는 의도와 함께 능동적으로 사용된다.”(159)


크리스테바와 같이 밀너는 대양과 같은 느낌을 이용하여 “무엇을 만들” 수 있을 가능성을 확인하지만, 대양과 같은 상태를 미학적인 대상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예술가가 다른 형태의 인지와 인식 사이에서 진동해야 하는데, 이는 대양과 같은 상태가 꿈의 상태와 마찬가지로 의미화에 저항하기 때문이다.7 다른 말로 하자면, 작가나 예술가는 반드시 “잠수”해야하고, 그런 다음에야 숨을 쉬기 위해 표면으로 나와야한다. 나는 또한 대양과 같은 상태가 작가와 예술가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은데, 왜냐하면 그것은 바로 대양과 같은 상태는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만약 주체의 욕망은 결여에 의해 생동하게 된다는 라캉의 주장에 동의한다면, 대양과 같은 상태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의 불가능성은 역설적이게도 그 상태를 기호화하고 싶어하는 주체의 욕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대양과 같은 상태를 통해 열린 이 틈새는 긴장감, 좌절감, 심지어는 슬픔까지도 만들어낼 수 있다. 대양과 같은 상태가 종결되고 예술가들의 의식이 되돌아올 때, 그녀는 이미 그것을 잃어버린 상태이다. 하지만 예술 창작 그 자체는 예술가가 언제나 주체를 이룰 수 없는 대리물을 찾는 데 성공할 때, 그 잃어버린 상태와 그 상태에 수반되는 충만함을 애도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라캉과 크리스테바가 의미화 과정에 중점을 두기를 기대하면서, 밀너는 다음과 같이 쓴다.


“분석가들은 가장 심한 장애가 있는 환자들에게서 기호 형성 과정이 간섭받았거나 제대로 확립되지 않았음을 발견한다. 두 가지 생각이 이로부터 도출된다. 첫째, 본질적으로 대체물로 간주되는 기호의 성취는 대체물인 기호의 상실에 대한 애도를 수반한다. 둘째, 대체물을 찾는 과정은 본래의 아이디어와 대체물의 아이디어를 일시적으로 병합하기를 요구한다.”(175)


여기서 상실은 모든 기호적 과정의 전제조건이다. 많은 작가들, 특히 시인들이 언어 그 자체와 극도로 걱정스러운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기표를 얼마나 내뱉든지 간에 그들이 지나온 감정적인 상태를 결코 충분히 담아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 사뮈엘 베케트8가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아무도 실패해 본 적 없는 방식으로  실패한다는 것이다.”(118)라고 쓰면서 의미한 바와 같을 것이다. 밀너의 글은 산만하게 이 “실패”를 수행한다. 「정신분석과 예술」에 걸쳐서 그녀는 창조적인 상태와 대양과 같은 상태에 관한 어떤 것이든, 그것에 대해 쓰는 것이 그녀에게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적는다. 밀너는 그녀가 그 주제에 접근하려 할 때마다 그녀의 머리속이 텅 비어버린다는 것을 인정하며 에세이를 시작한다. 밀너는 “나는 논리적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만큼 우리 자신을 분리하는 순간,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상태가 되기를 멈추는 마음의 상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고 언급한다(175). 그런 상태들을 기호화하려 시도하기 위해 그런 상태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하는 것은 종종 정신적으로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초기의 모성적 분리와 닮아있을지도 모르는 고통스러운 분리는 상실된 것의 대체물을 만들어내기 위해 아주 중요하다. 만약 누군가가 대양과 같은 상태에 무한정 머물러 있다면, 그 사람은 역설적으로 기호화를 작동시킬지도 모르는 그러한 고통스러운 분리를 결코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우주적 유대감: 롤랑과 스피노자

프로이트와의 편지에서 롤랑은 “대양과 같은 느낌”이라는 개념을 17세기의 네덜란드의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로부터 끌어왔다고 언급한다. 스피노자9는 “실체의 본성에는 존재가 속한다”며 존재의 모든 것이 그가 신 또는 본성이라고 지칭하는 하나의 무한한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제안했다(160). 롤랑의 용법에서 “대양과 같은 느낌”은 유아기의 방어나 전오이디푸스기로의 퇴행이 아니라 성숙한 되기의 과정의 일부이다. 이는 세계에 대한 자신의 지향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방식으로 존재의 “실체”와 교감(commune)할 수 있게 하는 자아 상실의 경험이다.

프로이트와의 편지에서 롤랑은 조직화된 종교와 종교적 느낌을 구별한다. 그는 “나는 그대가 자발적인 종교적 감정, 더 정확하게는, 엄격한 의미에서 종교와는 전혀 다르고 내구성이 훨씬 강한 종교적인 느낌에 대해 분석하는 것을 보고싶네.”라고 쓴다(172).10 롤랑에게 종교적 느낌은 그가 프로이트와의 편지에서 서술한 “단순하고 직접적인 사실인 ‘영원’에 대한 느낌(정말로 영원할 수는 없지만, 단순히 지각할 수 있는 한계 없이, 마치 대양과 같은)”인 대양과 같은 느낌을 통해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다(173).

롤랑은 가톨릭 신자로 자랐지만, 가톨릭의 부패와 억압적인 면으로 인해 결국엔 가톨릭 교회를 떠났다. 하지만 영성은 그의 인생에 중심적인 부분으로 남았고, 그는 대양과 같은 경험이 주는 영원성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종교와의 연결을 유지할 수 있었다. 앙리 베르모렐11은 롤랑을 인용하면서 “그가 가톨릭적 믿음을 잃고 얼마 지나지 않은 1887년의 어느날, 홀로 책상에 앉아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던 그는 ‘깨달음’, ‘실체의 흰 태양’(34)을 얻었다. 그는 신 안으로의, 우주 안으로의, ‘대양적 존재’ 안으로의 몰입으로 그것을 경험했고 그것은 그에게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고 언급한다(1237). 따라서, 롤랑이 그의 종교를 “잃어버린” 후, 그는 스피노자주의와 동양의 종교 전통이 혼합된 것을 채택하기 시작했고, 유시 A. 사리넨(Jussi A. Saarinen)12은 "특히 아드바이타 베단타(Advaita Vedanta) 철학, 톨스토이, 라이프니츠, '유럽의 크리슈나신(神)'인 스피노자에서 파생된 범신론적 일원론"이라고 설명했다(201).

롤랑이 “대양과 같은 느낌”이라는 개념을 발전시키는 데 스피노자가 미친 영향은 과소평가될 수 없는데, 스피노자는 대양과 같은 느낌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철학적 체계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롤랑이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으면서 체험한 신비주의적 경험으로부터 대양과 같은 느낌에 대한 영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대양과 같은 느낌에 대한 롤랑의 스피노자주의적 이해는 그 경험을 뒷받침하는 정동적 상태에 대해 특징화하는 방식에서 정신분석적 이해와 확연히 구분된다. 크리스테바가 대양과 같은 느낌을 우울증(특히 여성적 우울증)과 연관시킨 반면, 롤랑은 스피노자의 정동에 관한 철학을 끌어들이면서 대양과 같은 감정을 기쁨과 연관시킨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차이인데, 왜냐하면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슬픈 정념’(우리가 암울함이나 우울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신체의 활동 능력을 감소시키는 반면 기쁨은 그것을 증가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크리스테바의 병적인 대양과 같음과,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에게 "활력적인 상승"을 일으키는 롤랑의 활력 넘치는 대양과 같음을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파슨스, 174). 나는 스피노자의 사유에 뿌리를 둔 대양과 같은 느낌에 대한 활력 넘치는 이해가 대양과 같은 느낌에 대한 특정한 반사회적 정신분석적 이해보다 더욱 사회적, 정치적으로 유용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최근 몇년 간, 질 들뢰즈의 사유에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그리고 미국의 포스트-맑시스트들이 집단적 저항과 정동 정치의 특성을 이론화하기 위해 스피노자를 이용해왔다.13 공산주의가 교착상태에 빠졌다고 느끼는 포스트-맑시스트들이 스피노자의 기쁨을 가장 힘을 북돋우는 감정으로 위치시키는 정동적 철학과 급진적인 생태학적 사유로 선회하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14 스피노자에게 만약 신이 무한하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 안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생물과 사물은 본성 또는 신이라고 다양하게 불리는 하나의 실체의 일부이다. 따라서 때때로 합리적 신비주의라 불리는 스피노자의 철학은 일종의 이미-존재하는 공산주의를 드러내는 반면, 다른 차원에서는 우리는 20세기의 주류 공산주의적 정치적 투쟁이 실패한 포스트 공산주의로 여겨지는 역사적 환경에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공산주의가 실패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조직의 가장 좋은 사회적, 경제적 방식을 파악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차별성보다 연결성 중심의 존재 방식을 구상하기 시작할 정동적이고 상상력 있는 자원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스피노자에 대한 동시대의 포스트-맑시스트들의 전개 양상이 스피노자의 형이상학의 사회적 의미를 명확히 표현하려는 첫 번째 시도인 것은 아니다. 롤랑은 신화적 경험이 주체를 사회 속으로 옮길 수 있다고 느꼈다. 사리넨은 다음과 같이 쓴다. “롤랑은 세속적인 문제에서 지속되는 모든 신비주의적인 이탈을 특히 경계했으며, 대신 대양과 같음을 지향하는 것이 주는 활기를 북돋우는 효과가 사회적, 정치적 행동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했다.”(213)





대양과 같은 느낌의 사회적 의미


“∙∙∙ 무한과의 한 순간의 접촉은 모든 '구별 지어진' 자아, 우리 자신과 다른 인간들의 자아에 대한 환상을 즉시 사라지게 하기에 충분하다.”
-로맹 롤랑, 『라마크리슈나의 생애』


이제껏 논했듯이, 프로이트와 크리스테바와는 달리 롤랑은 대양과 같은 느낌을 “세계로부터의 퇴행적-방어적 철회”로 보는 관점을 거부하는 대신, 대양과 같은 느낌이 자아의 경계를 사라지게 함으로써 세계로 향하는 존재를 강화한다고 주장한다(사리넨, 201). 이러한 관점은 질문을 유발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 경계 지어진, 이산적 자아로서의 경험은 자아의 속임수에 불과한 것일까? 그것은 차이화와 명명(命名)을 통해 작동하는 언어의 효과인가? 아니면 자아는 계몽주의, 정신분석학, 그리고 (개개인의 선택과 행위주체성 속에 자유를 위치시키는)자유주의의 담론 안에서 표현된 “개인” 개념에 의해 조건화되는 인식의 구성이나 방식인가? 그 기원이 심리적이든, 담론적, 언어적, 혹은 이데올로기적이든 간에, 우리를 자아의 경계 너머로 데려가고 “세계를 덮는 투명한 네트워크”를 밝히는 정동적 상태는 단순히 개인적인 형성적 경험 이상의 것일 수 있다. 이 경험들은 새로운 관계성의 방식을 열어 젖힐 잠재성을 가지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대양과 같은 느낌은 단지 자아의 오작동이나 망상적 환각으로 축소될 수 없다. 대신, 이는 이미-존재하는 공동체 의식(communalism)과 세계 속에 내재된 우리의 직접적인 경험을 비추는 계시로 여겨질 수 있다.

유아기적이라는 이유로 대양과 같은 느낌을 거부하는 것은, 더 큰 세계나 네트워크 내에 새겨진 배치(assemblage) 혹은 접속점(node)의 일부로서 주체를 개념화하는 능력과 관계 없다. 오히려 이러한 거부는 타자로부터 자아를 구별 짓는 “성인(adult)”의 주관성과 암묵적으로 관계 한다. 이런 식으로 틀을 짜게 되면, 일부 정신분석학자들이 대양과 같은 느낌을 폄하하는 것 또한 주체에 관한 특정한 견해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정동적 상태로서의 대양과 같은 느낌은 일시적으로 주체의 경계를 융해시킴으로써 주체를 개방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비록 이러한 잠재력은 우리가 주체성을 어떻게 정의하고 이해할지에 대한 흥미로운 암시를 담고 있긴 하지만(나는 모튼에 대해 논하면서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흥미로운 사회적 함의도 지니고 있다.

대양과 같은 느낌을 사회화한다는 것 (혹은 공유communize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대양과 같은 느낌이 새로운 세계를 공(共)-구성할 경험적 토대를 제공하는 공통-감각(feeilng-in-common)으로 기능할 수 있을까? 만약 자아 상실의 경험과 외부세계와 우주적으로 연결되는데 수반되는 느낌이 “개인”을 탈자연화하고 잘 경계 지어진(bounded) 주체에 대한 환상을 해체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대양과 같은 느낌은 새로운 종류의 사회성을 열어젖힐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작업에서, “리좀”—측면으로 자라고, 간격을 두고 뿌리를 뻗는 근계(根系, root system)—은 종종 네트워크화된 형태의 사회적 얽힘의 시각적 은유로 사용된다. 리좀적인 식물은, 말하자면, 개개의 식물들로 이루어진 대나무 숲이 사실은 하나의 뿌리 체계로 연결된 한 다발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리좀 개념을 통해 우리의 시각을 재조정하고 우리의 사회를 여과한다면, “나”가 멈추고 다른 것이 시작되는 지점을 명확하게 경계짓는 일은 매우 어려워질 것이다. 2013년에 열린 사랑에 대한 타르낙15 세미나에서, 르 러브 강16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작업 속에서 “’나’는 객체에 둘러싸인 모나드가 아니다. ‘나’는 하나의 세계이고, 기계적 배치(assemblage)이고, 특정한 결합[맺기](nexus[nouage])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폐쇄된 자아를 다른 자아를 향해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두 부분으로 구성된 합일(two-part unity)을 이루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이것은 절합하는 것이고(assemble[agencer]),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이고, 탈주의 새로운 노선(new lines of escape[lignes de fuite])을 계획하는 것이다.”라고 언급한다.(51)

최근 몇 년 간 ‘우정’을 이론화하는 익명의 이론가들의 그룹은 들뢰즈, 가타리, 티쿤(Tiqqun)17, 그리고 스피노자가 ‘별자리’를 그들의 사회적 모드를 시각화하는 방법으로 사용하는 작업들을 끌어온다. “우리는 별자리들을 형성한다. 우리의 몸은 결코 고립되지 않고, 항상 관계의 변화하는 패턴에 휘말린다. 우주를 가로질러 흩어져 있으면서, 우리 자신은 패턴을 형성하고 윤리적이지만 보이지 않는 연결들을 추적한다. 그것들은 우리의 고독을 벗어나 일관성과 형태를 준다. 우리가 우리의 연결들을 물질적으로 만들어낼 때, 우리의 별자리들은 모양이 생기고, 촉각적으로 변하고, 세상을 만든다.”(62)

사회적 관계를 상상하는 데 별자리를 사용하는 것은, 사회적 상상력(사물들을 관계 내에 위치시키고 새로운 형태를 실험하는)과 별자리를 만질 수 있도록 만드는 물질적 행위 모두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친구들이 단체로 함께 살고, 서로를 돌보고, 함께 생각하고, 새로운 삶의 형태를 창조해낼 때 별자리는 손에 만져질 듯이 뚜렷해질 수 있다. 따라서 친화성은 단순히 개인적이거나 정치적인 믿음을 공유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서로 얽히는 문제가 된다. 별자리가 더욱더 물질적이게 될수록, 자아가 “고립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64)고 상상하기는 매우 어려워진다. 또한, 별자리의 생성은 우리의 관계망에 의도와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우리의 사회 세계를 매혹시킨다.

최근에 나는 크리스테바가 네르발을 인용하며 대양과 같은 느낌을 “세상을 덮는 투명한 네트워크”의 불빛으로 묘사한 것을 읽고, 별자리의 이미지가 갑자기 떠올랐다. 산재한 천체(天體)들 사이를 연결하여 더 큰 몸통을 형성하는 선들의 빛이 별자리가 아니라면 무엇인가? 형태가 굳어지게되면, 대양과 같은 느낌이 새로운 별자리를 설계하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아마도 [자아와 타자를] 구별지으려는 마음이 침묵할 때, 즉, '대양과 같은 느낌'을 경험하는 그 순간 동안, 별자리 속에 박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다.





집단성과 경계지어지지 않은 자아: 모튼의 해상 수송적 사회성 


“대서양의 오른편에 있지 않다는 것은 정착되지 않은 느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정착되지 못하도록 하는 느낌이다. 만약 당신이 그 느낌을 타고 간다면, 그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스스로를 결정하고, 확고한 역사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는 정착민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만들어낸다. 수송된다는(shipped) 것은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움직인다는 것이다. 수송된다는 것은 고향을 잃은 자와 함께 고향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고, 도망자와 함께 편안함을 느끼고, 쫓기는 자와 평화를 만끽하는 것이며, 하나가 되지 않기로 동의한 사람들과 함께 안식을 취하는 것이다.”

—스테파노 하니, 프레드 모튼, 『언더커먼스: 도망자들의 계획과 흑인 연구 The Undercommons: Fugitive Planning &Black Study


대양과 같은 느낌은 프로이트에 의해 대중화된 후 정신분석학자들에게 계속해서 사용된 용어인 반면, 흑인성(blackness)에 관한 프레드 모튼의 이론화는 프로이트와 롤랑의 대양과 같은 느낌에 대한 이론 둘 모두와 현저하게 유사하다. 모튼에게 흑인성은 문자 그대로 대양과 연결되고, 대양에 의해 생산되는 병렬-존재론적(paraontological) 존재 방식이다. 프로이트와 모튼의 담론에서, 흑인 존재와 대양과 같은 느낌은 모두 크리스테바와는 다른 방식으로 모성적인 것과 연결되어 있다. 모튼은 모성적인 것을 위협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으며, 모성을 모든 것을 애워싸고 있는 것이나 부성적 기능의 개입이 필요한 것으로 묘사하지도 않는다. 롤랑과 모튼 모두에게 있어서 바다는 존재를 정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롤랑이 한계 없는 무한에 관한 경험을 은유하는 것으로서 스피노자의 단일한 실체 개념을 보여주기 위해 대양을 사용한 반면, 모튼의 글에서 바다는 노예제도의 유산과 연결되며, 특히 노예선을 통해 전 세계로 아프리카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분산된 것과 관련이 있다. 모튼의 작업과 사이디야 하트만(Saidiya Hartman)과 같은 아프리카 비관주의 사상가들의 작업에서도 바다는 존재론적 결렬을 나타내는 통로이다.

모튼은 그의 에세이 “흑인성과 무(無) (살 속의 신비주의) Blackness and Nothingness (Mysticism in the Flesh)”에서, “정착되지 못하”고 코드화되지 못한 존재의 방식(모튼이 ‘흑인성’이라 부르는 것)을 “지도에 배치할 수 없는 병렬-존재론적 합의의 지대”로 묘사한다(752)18 “병렬-존재론적” 존재의 방식은 서로 마주치고 상호작용하는 이산적이고 자족적인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이고 상호주체적인 존재의 방식과는 다르다. 병렬적 존재론에 대한 모튼의 관념은 나훔 챈들러(Nahum Chandler)가 흑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이상한 의미에 대한 W. E. B. 듀보이스(W. E. B. Du Bois)의 논의를 독해하는 방식에서 유래했다. 모튼에 의하면, 흑인 존재가 다른 존재의 방식과는 다르게 기능한다는 생각은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 Black Skin White Masks』과 차연(différance)에 대해 이론화하는 자크 데리다의 작업을 통해 정교화되었다.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존재(the ontological, being) 와 존재자(ontic, beings) 사이의 구분(소크라테스가 본질과 현상 사이에 만들었던 구분과 유비적인 구분)을 만들어냈지만, 모튼은 이러한 구분을 거부하고 근본적인 범주들과 심지어는 범주라는 개념 그 자체를 방해하는 흑인 존재의 병렬-존재론적 힘에 대해 논한다. 모튼의 병렬-존재론적 주체(어쩌면 “주체”는 여기서 부적절한 용어일지도 모른다)는 경계 없는 주체이다. 그들은 대양과 같다. 그들은 타자에 의해 정동될 뿐만 아니라 그들은 넘쳐 흐르고, 서로에게 흘러 들어가며, 촉각적으로 허물어지고, 서로에 의해 다시 만들어진다.

병렬적 존재론에 대한 이런 방식의 이해는 자기 소유권으로 특징지어지는 일종의 소유 관계로서의 자아 개념을 더 이상 필요 없도록 만든다. 존재는 자기 소유물이나 심지어는 자기 결정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순간이고 순환이다. 모튼이 흑인성 개념을 공식화하는 다른 방식은 그것을 동시에 하나보다 거나 적은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가 자아를 지칭한다면, 흑인성은 단수형으로서의 자아 개념을 흐트러트린다. 모튼은 흑인성의 역사가 흑인들에게 “하나보다 적은 것”(혹은 채워지지 않은 것으로서의 흑인 자아성selfhood)을 부과해온 역사라는 점에 주목한다. 한편으로는 무(無)이자 하나보다 적은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수의 것이자 과도한 것인 흑인성의 이 이중적 특성은, 모튼이 흑인성을 단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니라 병렬-존재론적인 것으로 묘사할 것을 주장하는 이유이다. 또한 이것은 모튼이 흑인성을 정체성으로 규정하기를 거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비록 그가 흑인들이 상실, 고통, 시달림, 박탈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때문에 그들이 흑인성에 특권적 관계를 맺게 된다고 인정하지만 말이다.

더 나아가, 흑인성은 그것이 특정한 땅에 고정되지 않는 한에서 또한 대양과 같다. 모튼에게 흑인성은 고향이라는 개념을 불안정하게 하는데, 흑인 존재가 위치 상실(dislocation)로 특징지어지기 때문이다.19 하지만 프랭크 윌더슨(Frank Wilderson)이나 자레드 섹스턴(Jared Sexton)과 같은 아프리카 비관주의자들과는 달리, 모튼은 흑인성이 사회적 죽음과 매한가지라고 믿지 않는다. 그에게 흑인성은 더 이상 다른 것으로 환원할 수 없도록 사회적이다. 그가 쓰기를, “비존재의 지대는 실험적이고, 일종의 실험이며, 그 실험의 양날(double edge)이고, 우정의 사회성이 그것에 가해진 정치적 규제를 넘쳐 흐르는 유사성과 비유사성의 극장이다.”

모튼에게 흑인성은 또한 합법적인 인격의 상징들로부터의 방출물이다. 따라서 흑인성은 사회적 인식장의 바깥에 존재하는 코드화되지 않은 존재의 지대이다. 모튼은 비록 주체성으로부터 추방된 이 강제 추방의 잔인성을 경시하지는 않지만, 그는 그것을 반란군인 흑인의 사회적 삶, 혹은 그가 종종 언더커먼스의 사회성(undercommon sociality)이라고 부르는 것의 가능성의 조건으로 보고 있다. 모튼이 “사회로 들어가고 추방되는 것을 동반하는 통곡”에 대해 쓸 때, 그는 폭력적인 추방-진입의 끔찍한 측면과 황홀한 측면을 모두 담아낸 서정적 기록부를 작성 하는 것이다. (746).

이 “인간” 사회성으로부터의 추방과 흑인 사회성으로의 진입은 또한 중간 항로(Middle Passage)의 폭력에 의해 구성된다. 그는 이렇게 쓴다. “끊임없는 자기 탈구(autodislocation) 속에서만 항해할 수 있는, 그 어떤 곳도 아닌 그저 바다로부터 왔다는 것은 끔찍하다. 고체성(solidity)이 부재한다는 것은 보다 높은 빈도로 행해질 다른 호명 의식을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744). 모튼의 작업 전반에 걸쳐, 바다는 물론 수송됨의 경험도 흑인성의 유체성을 이론화하는 데 사용된다(“고체성의 부재”). 바다의 시민이 된다는 것은 동시에 국적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모튼은 하트 크레인(Hart Crane)20의 시 “부러진 타워 The Broken Tower”로 시작되는 숨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구절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마치 계속해서 깨어진 세계로 들어가는 것처럼, 마치 몽상적인 동반자를 추적하고 그에 가담하기 위한 것처럼, 정말로 우리가 붙들고 있는 것, 깨어진 것 안에 남아있다. 우리가 노예제로부터 탈출 중에 유배된 이 대위법적인 섬, 우리가 국적 없는 비상사태 속에서 우물쭈물 하고 있는 이 곳은 우리의 유동적이고 지속되는 연구이자, 우리의 융해된 세포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위치 상실이고, 우리의 상처로 변형된 입장(standpoint)과 음악이 연주되는 교회이다. 우리는 우리의 해상 수송의 변화를 연구한다. 그것은 도착하지 않고도 도착한 역사 이전으로부터 보내진 것이자, 구전 지식과 비정상적 절합(articulation)의 시학이다. 여기서 관절과 살이 맺는 관계는, 강조되고 뚜렷하게 감지될 수 없고 따라서 표현을 소진시키는 음악적 순간의 주름진 거리이다.”(743)


“깨어짐 속에”—상처로 변형되고, 배로 수송되고, 유배되고, 위치를 상실한 깨어짐—존재한다는 표현은 “비정상적 절합”을 생산하는데, 이는 그것이 표현을 소진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하(subterranean)의 존재 방식이 사회적 인식의 영역 밖에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흑인의 사회적 삶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등록된다. 아프리카 비관주의자들이 흑인성을 그들이 무(無)로 특징화하는 벌거벗은 삶의 조건으로 분석하는 것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이 무(無)는 질감을 가지고 있다. 모튼은 다음과 같이 쓴다. “만약 노예가 결국에는, 그리고 본질적으로 아무 것도 아니라면, 남는 것은 그 무(無)에 대해 탐구하는 것의 중요성이다”(744). 이 탐구는 오직 부정(否定)에 대한 긍정과 백인 중심적 개념인 주체적인 자기 소유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회성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용어들의 도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대양과 같은 느낌처럼, 흑인성의 비억제성은 잘 경계 지어진 주체에 대한 관념을 해체한다.





결론과 생각들

이 에세이에서 나는 대양과 같은 느낌에 대한 정신분석적 논쟁을 분석했고, 이 느낌이 함축 가능한 창조적이고 사회적 의미들에 대해 논했다. 롤랑과 밀너를 따라 (그리고 프로이트와 초기 크리스테바와는 작별하면서), 나는 대양과 같은 느낌이 창조적이고 사회적인 영감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이 에세이가 주로 이론적인 질문들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마도 대양과 같은 느낌이 가능하게 하는 방법들을 논의하는 부분들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낳을 것이다. 대양과 같은 느낌을 유도하는 것은 가능한가? 만약 아니라면, 우리는 왜 소수의 운 좋은(또는 불운한) 사람들에게만 제공되는 정서적 상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나는 정신분석학적 담론에서 묘사된 대양과 같은 느낌이 대단히 비자발적이라는 것을 논하고자 한다. 비록 이 주제에 대한 내 연구가 트라우마와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말이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이 아마도 대양과 같은 느낌을 더 쉽게 경험할 수 있을지도 모르므로). 트라우마 연구에서 많은 학자들은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전혀 자신으로 경험하지 않는다고 언급해왔다. 주디스 허먼(Judith Herman)21이 『트라우마와 회복Trauma and Recovery』에서 언급하듯이, “생존자들은 일상적으로 그들 자신들을 평범한 인간관계 밖에 있는 초자연적 생명체 또는 비인간적 생명체라고 표현한다. 그들은 자신을 마녀, 뱀파이어, 창녀, 개, 쥐, 뱀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배설물이나 오물의 이미지를 그들의 내적인 자아 감각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다.”(105) 트라우마를 대양과 같은 느낌과 연결시키는 것은 대양과 같은 느낌이 고통에 대한 일종의 조증적 방어라는 생각을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그런 사례라고 할지라도, 대양과 같은 느낌이 일종의 끔찍한 선물로서 황홀한 기쁨의 원천이라는 것 또한 (역설적으로) 사실이다.

더 나아가, 대양적 경험이 비자발적인 신비주의적 경험이라고 할지라도, 명상이나 리듬 호흡법, 환각제, 폭동에 참여하기, 단식, 수면 부족, 탄트라적22 섹스, BDSM 플레이, 구호를 외치기, 감정적 고통과 비탄, 정신적 고통, 운동, 기도자, 음악, 집단적 희열의 경험과 한 사람을 의식의 문턱 상태로 몰아넣는 수많은 다른 활동들을 통해 대양적 경험을 유도(또는 배양)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 (어린이들은 절대 집에서 이것들을 따라하지 마세요!)

마지막으로, 이 에세이는 주로 대양과 같은 느낌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이론적 논의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신비주의적 경험이 세계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경험주의적 연구를 검토하는 것은 이 에세이의 범위를 벗어난다. [하지만] 신비주의적 경험이 중독, 우울증, 그리고 다른 장애를 '치료'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는지뿐만 아니라 화학적으로 유도된 경험이 공감을 발전시키고 사회적 관계를 풍요롭게 하는지를 살펴보는 환각적 약물 연구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고 있다.





*이 글은 저자의 허가를 받아 다음 링크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Oceanic Feeling and Communist Affect”, https://anticorps-palaisdetokyo.com/en/texts/oceanic-feeling-and-communist-affect




필자 소개
재키 왕 Jackie Wang은 흑인 문화 연구자, 감옥 폐지론자, 시인, 멀티미디어 예술가, 퍼포머이자, 하버드 대학의 아프리칸-아메리칸 연구의 박사 과정 중에 있다. 그녀는 “교도소 자본주의 Carceral Capitalism”(2018)의 저자다. 


역자 소개
양준호.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공부하며 과학기술학, 페미니즘 이론, 퀴어 이론 등에 관심을 갖고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정확히 뭘 공부하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계속 뭔가를 읽다 말다 반복하고 있다.




 
1. Kristeva, Julia. Black Sun: Depression and Melancholia. New York: Columbia UP, 1989. European Perspectives. Print. p.170에서 재인용. 쥘리아 크리스테바. 김인환 옮김. 『검은 태양: 우울증과 멜랑콜리』. 동문선. 2004.
2. Freud, Sigmund, and Strachey, James. 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 New York: Norton, 2005. Print. 지그문트 프로이트. 김석희 옮김. 『문명 속의 불만』. 열린책들. 2020.
3. Kristeva, Julia. This Incredible Need to Believe. New York: Columbia UP, 2009. European Perspectives. Ebook. Print
4. Ibid.
5. Ibid.
6. Milner, Marion. The Suppressed Madness of Sane Men : Forty-four Years of Exploring Psychoanalysis. London ; New York: Tavistock Publications, 1987. New Library of Psychoanalysis; 3. Print.
7. 크리스테바와 마찬가지로, 밀너는 이 대양과 같은 상태들을 그녀가 남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방식과 대비시키는 정신적 기능의 여성적인 면과 연결시킨다. 밀너에 따르면, 의식적인 정신의 형성적인 논리가 모순을 피하려 한다면, 무의식이 항상 작동하고 있는 한 신비주의적인 사고는 변증법적이면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부분적으로 불투명한 주체의 양면성과 모순을 붙들고 있는 데 더욱 적합하다.
8. Bloom, Harold. Samuel Beckett’s Waiting for Godot. New ed. New York: Bloom’s Literary Criticism, 2008. Bloom’s Modern Critical Interpretations. Print.
9. Spinoza, Benedictus De, and Curley, E. M. A Spinoza Reader: The Ethics and Other Works. Princeton, N.J.: Princeton UP, 1994. Print.
10. Parsons, William Barclay. The Enigma of the Oceanic Feeling: Revisioning the Psychoanalytic Theory of Mysticism. New York: Oxford UP, 1999. Print.
11. Vermorel, Henri. “The Presence of Spinoza in the Exchanges between Sigmund Freud and Romain Rolland 1.”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analysis 90.6 (2009): 1235-254. Web
12. Saarinen, Jussi A. “The Oceanic Feeling A Case Study in Existential Feeling.” Journal Of Consciousness Studies 21.5-6 (2014): 196-217. Web.
13. 가장 주목할만하게는 마이클 하트, 안토니오 네그리, 프랑코 ‘비포’ 베라르디, 그리고 티쿤(Tiqqun)의 작업이 있다. Negri, Antonio, and Murphy, Timothy S. Subversive Spinoza: (un)contemporary Variations. Manchester; New York: New York: Manchester UP.를 보라.
14. Negri, Antonio, and Murphy, Timothy S. Subversive Spinoza: (un)contemporary Variations. Manchester; New York: New York: Manchester UP; Distributed Exclusively in the USA by Palgrave, 2004. Print.
15. (옮긴이 주) 타르낙(Tarnac)은 프랑스 중부의 코레즈(Corrèze) 지역의 코뮌을 가리킨다. 줄리엥 쿠파(Julien Coupat)가 이끈다고 추정되는 익명의 혁명가 집단으로 ‘타르낙의 9인’이라고도 불린다.
16. Friendship as a Form of Life. Issue two. 2016. Print.
17. (옮긴이 주) ‘타르낙의 9인’이라고도 불리는 익명의 프랑스 혁명가 집단이 1999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발간한 잡지의 이름. 본 잡지에 실렸던 소논문들은 후에 『블룸 이론Theory of Bloom』(2004), 『내전 개론Introduction to Civil War』(2006), 『이것은 강령이 아니다This Is Not a Program』(2006)등의 단행본으로 재출간됐다.
18. Moten, Fred. “Blackness and Nothingness (Mysticism in the Flesh).” South Atlantic Quarterly 4 (2013): 737-80. Print
19. 흑인성이 자기 소유와 소유권과 부정적 관계 속에서 정의되기 때문에, 모튼은 고향 개념과 존재론적으로 정착되기를 기꺼이 포기하는 모든 사람들이 흑인성의 세례(gift)를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다고 말한다.
20. 모튼이 바다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에 대해 논하며 하트 크레인을 이용한 것은 크레인이 쿠바와 플로리다 사이 지점의 배에서 뛰어내려 자살했다는 것을 고려했을 때, 이상하게 잘 들어 맞는다. “부러진 타워”(1932)는 크레인이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출판된 시다. 이 단락에서 인용된 부분의 정확한 자구는 다음과 같다. “그래서 나는 깨어진 세상으로 들어갔다 / 환각적인 사랑의 공동체, 그 목소리를 추적하기 위해.”
21. Herman, Judith Lewis. Trauma and Recovery. Rev. ed. New York: Basic, 1997. Print.
22. (옮긴이 주) 불교나 힌두교에서 특정 운동과 관련되거나 연결된 것들을 묘사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