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다른 이의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가?”





주디스 버틀러
번역 : 박준호, 도움 : 허성원 



*이 글은 주디스 버틀러의 2016년 태너 강연 중 1부(https://youtu.be/40YPnzv5JzM)를 번역한 것이다. 버틀러의 2016년 태너 강의는 총 2부로 되어있다. 5월 30일에 발표된 1부의 제목은 “왜 다른 이의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가? Why Preserve the Life of the Other?”이고, 5월 31일에 발표된 2부의 제목은 “법적 폭력 : 윤리적, 정치적 비판 Legal Violence: An Ethical and Political Critique”이다. 두 강연의 내용은 수정되어 각각 2020년 『비폭력의 힘: 윤리정치적 결속 The Force of Nonviolence: An Ethico-political Bind』의 3장 「다른 이의 삶을 보존하기 To Preserve the Life of the Other」와 4장 「비폭력의 윤리학과 정치학 The Ethics and Politics of Nonviolence」으로 출판되었다.



  감사합니다. 오늘 이 자리, 예일 대학교에서 태너 강의Tanner lectures를 하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저를 초대해 준 휘트니 인문학 센터Whitney Humanities Center, 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를 선택한 위원회, 초대를 승인한 설리 위원장에게 감사드립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예일에 돌아와 풍요로워질 대화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어서 기쁩니다.



  [두 강의 중] 첫 번째 강의에서 저는 비교적 단순한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곧장 이 질문이 도덕 심리학이나 도덕 철학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중 누군가가 다른 이의 생명을 보존하도록 그를 이끄는 것은 무엇일까요? 의료 윤리, 재생산의 자유와 기술에 관한 논쟁, 의료 보험에 관한 논쟁, 법 집행에 관한 논쟁, 감옥에 관한 논쟁에 관련된, 생명 보존에 관한 논쟁이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들 논쟁에 깊이 들어가지는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오늘 제가 이야기할 것 중 몇몇은 이런 논쟁에 어떻게 진입해야 하는지에 관한 함의를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대신 저는 언제, 어디서 생명 보존이 요청되는지에 관한 논쟁들의 특징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그 논쟁들에서 우리는 무엇이 생명으로 취급되는지에 관해, 언제 어디서 생명이 시작하는지라거나 생명이 어떻게 끝나야 하는지에 관해, 그리고 아마 다른 영역에서 누구의 생명이 삶[살아있음]으로 취급되는지 묻는 말에 관해 언제나 몇몇 가정을 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왜 다른 이의 생명을 보존하려 하는지를 질문할 때, 우리는 무엇이 다른 이의 생명을 보존하려 하는 동기를 주는지 질문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혹은 우리는 무엇이 그런 종류의 행위를 정당화하는지, 혹은 생명을 보존하는 것을 거절하거나 생명을 보존하는 데 실패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으로 확립하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질문[, 즉 ‘무엇이 우리가 다른 이의 생명을 보존하도록 동기를 주는가?’]은 심리학적이고, 명백히 도덕 심리학의 질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 즉 ‘무엇이 다른 이의 생명을 보존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가, 혹은 그러는데 실패하는 것을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것으로 확립하는가?’]은 도덕 철학이나 윤리학에 속합니다. 그리고 도덕 철학이나 윤리학은 때때로 도덕 심리학에 의존해 주장을 이어갑니다. 그런데 이 두 질문이 사회 이론, 정치 철학과 겹치기도 할까요?



  우리가 어떻게 이 질문을 제기하는지, 이 질문을 던질 때 어떤 가정을 하고 있는지에 많은 것이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특정한 타인에 대해 이 질문을 던지는 건 조금 다릅니다. “무엇이 바로 이 타인의 생명을 보존하도록 우리를 이끄는가?” 방금 이 질문은 우리가 강하게 동일시하는 어떤 특정한 집단의 생명들을 우리가 보존하려 하는지, 폭력이나 파괴 위험을 겪는 것으로 보이는 취약한 집단의 생명들을 우리가 보존하려 하는지, 아니면 살아있는 모든 이의 생명들을 우리가 보존하려 하는지 묻는 것과 다릅니다. 무엇이 우리가 특정한 타인의 삶을 보존하도록 이끄는지 묻는 것은 2항 관계를 전제합니다. [이때] 당신은 내가 아는 누군가일지도, 혹은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특정 상황 속에서 저는 위험을 방지하거나 당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파괴적 힘을 멈출 수 있는 위치에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무엇을 하며 저는 왜 그것을 할까요? 그리고 무엇이 제가 결국 취하는 행위를 정당화할까요? 이 질문은 도덕 철학과 도덕 심리학, 두 영역에 [공히] 속한다고 보입니다. 그러나 두 영역에서 고려되는 질문의 범위가 이 질문으로 한정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집단의 생명을 보존하려 하는지 묻는 것, 무엇이 그런 종류의 행위를 정당화하는지 묻는 것은 생명정치와 관련된 고찰이라 부를 만한 것을 전제합니다. 이 질문은 무엇이 생명으로 취급되는지 물을뿐더러 누구의 생명이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취급되는지 묻습니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누구의 생명이 생명으로 취급되는지 묻는 것은 말이 됩니다. 그 정식이 동어반복으로 실패하는 것처럼 보일 때라도 말입니다.



  저는 두 번째 강의를 시작하며 생명정치의 문제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제가 처음에 던졌던 질문에 대해 계속 고민해봅시다. 다른 이의 생명을 보존하도록 우리 중 누군가를 이끄는 것은 무엇일까요? 어떤 형식으로든 이 물음을 개인뿐만 아니라 제도적 장치arrangements, 경제 체제, 정부의 형태에 관해서도 물어야 합니다. 어떤 인구의 생명을 구호하기safeguard 위해, 혹은 모든 인구의 생명을 구호하기 위해 어떤 구조와 제도가 마련되어 있을까요? 생명을 빼앗지 않는 데, 그리고 생명을 보존하는 데 어떤 근거가 있을지 살피기 위하여 우리는 정신분석에 의존할 것입니다. 이는 개인 심리와 집단 심리의 관련을 생각하는 문제와는 다릅니다. 개인 심리와 집단 심리는 언제나 겹치며, [우리가 경험하는] 특수하고singular 주관적인 딜레마조차도 우리를 더욱더 폭넓은 정치적 세계 속에 연루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나”, “당신(들)”, “그들”, “우리”는 서로 연루되어 있으며, 이 연루가 단지 논리적이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그 연루가 폭력과 협상하라는 윤리적 요구를 지속해서 제기하는 양가적인 사회적 유대bond로 경험된다는 점을 주장하려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일인칭 “나”를 무비판적으로 써서, 아니면 실로 복수 “우리”를 무비판적으로 써서 도덕적 탐구를 시작한다면, 단수 주체와 복수 주체 모두가 도덕적 반성을 통해 협상하려 하는 관계에 의해 형성되고 도전받는지 고려하는, 관련된 선행 탐구를 막는 셈입니다.



  그러면 다른 이들의 생명을 보존하라고 요구받는 이 “우리”는 누구일까요? 보존될 필요가 있는 생명을 가진 이 다른 이들—개인이건 집단이건—, 이들은 누구일까요? 질문을 던지는 이들의 생명은 그 질문의 [대상이] 되는 이들의 생명과 같을까요? 우리 중 누군가가 질문을 던진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이 마찬가지로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라고 요구받는 것은 누구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우리 생명이 가치 있다는 점을 전제하고, 우리 생명을 보존하는 데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 전제하여, 이런 전제와 함께 살지 않는 다른 이들에 대해 “우리”가 이 질문을 던지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정말로 우리가 보존하려 할 수 있는 다른 생명들과 분리될 수 있을까요? 이 문제를 탐색하는 “우리”라는 게 있고, 우리가 하는 숙고를 받는 이인[숙고의 대상이 되는] 다른 이들이 있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생명을 보존할 권력이 있는 이들, 즉 이미 그들의 생명을 보존하려 하는 권력이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이들과, 보존 받지 못할 위험에 처한 생명을 가진 이들, 권력이 그들에게는 삶을 위태롭게 하며 [이 권력에 대한] 길항력에 의해 보존되어야 한다는 점이 요구되는 생명을 가진 이들, 이 둘 사이 온정주의적인paternalistic 구별을 가정하고 있는 것일까요?



  예를 들자면, 취약한 집단이 특정될 때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한편에는 예를 들어 인권[에 관련한] 작업에서 발견하게 되는 취약한 집단에 대한 담론, 사회 정책과 국제 정치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지는 취약 인구에 대한 담론이 있습니다.  어떤 집단이 취약하다고 불린다면, 그 집단은 보호 받을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누구에게 그 요구가 제기되었으며, 어떤 집단이 취약한 이들을 보호하라는 짐을 부과받는 집단으로 등장할까요? 다른 한편으로, 취약한 집단에 대한 책임을 맡은 이들은 이렇게 [취약한 집단을] 지정하는 실천을 통해 취약함을 벗어 던진 것이 아닐까요? 취약성의 불평등한 분배를 강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지정이 취약한 집단과 취약하지 않은 집단을 암묵적으로 구별하고, 취약하지 않은 이들에게 취약한 이들을 보호하라는 [책임을] 부과한다면, 이런 움직임은 우리가 이의를 제기하고 싶어 하는, 권력의 온정주의적 형식을 강화하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스스로 생명을 보존하라는, 심지어 생명을 보호하라—저는 생명 보존과 생명 보호가 다르다고 생각합니다—는 윤리적 요구에 응답하고 있다고 이해한다면, 우리가 사회적 위계를 따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회적 위계 속에서는, 굉장히 도덕적인 이유로 취약한 이들이 온정주의적인 권력을 지닌 이들과 구별됩니다. 이 구분이 기술記述적으로 참이라 주장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분이 도덕적 반성의 기초가 된다면, 사회적 위계에 도덕적 합리화가 주어지게 된 셈입니다. 그리고 [이 때] 도덕적 추론은 평등의 공유되는 조건 내지 상호적인 조건이라는,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규범과 대립하게 됩니다.



  여기까지 강의의 서두에서, 저는 다른 이의 생명, 아니면 다른 이들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는 심리학적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 초점을 둔 물음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물음이, 그 물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인구학적 차이의 관리에, 그리고 권력의 온정주의적 형식이라는 윤리적 계략에 관련된 정치적 문제를 열어젖히게 된다는 점을 보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비판적으로 검토되지 않은 것이 많습니다. “생명”, “살아있는 이” 같은 주요 용어나, “보존함”과 “보호함”이 무슨 뜻인지, “보존함”과 “보호함”이 다르기는 한지가 검토되지 않았습니다. 또 다른 이들의 생명을 잠재적으로 보존하는 이들도 또한 잠재적으로 보존될 필요가 있으므로 “보존함”과 “보호함”이란 상호적인 행위인지, 그리고 이 [상호성]이 취약성과 노출이라는 잠재적으로 공유된 조건에 대해 함의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검토하지 않았습니다.



  이 강의들에서 제가 할 탐구를 통해 저는 우리가 스스로 불러일으키는 파괴를 포함한 [여러] 파괴의 양상에 대항하는 생명 보존의 가능성에 대해 질문할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파괴할 힘을 가진 생명을 보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뿐 아니라, 생명 보존이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목적을 염두에 두고 조직된 기반 시설을 요구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연히 생명을 보존하지 않으려고 하는 기반 시설도 있습니다. 따라서 기반 시설 자체만으로 생명 보존에 대한 충분조건이 마련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생명 아니면 생명들의 집합을 보존하기 위해 우리가 행하거나 행하기를 거절하는 것만이 아니라, 생명 보존을 위한 기반 시설적 조건이 재생산되고 강화될 수 있도록 세계가 구축되는 방식이 중요하다는 것이 제 요점입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그 세계를 구축합니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우리는 우리가 전혀 만든 적이 없는 이미 구축된 세계 속에 도래하게 됨을 발견합니다. 게다가 환경이 완전히 인간 활동의 결과인 것도 아닙니다. 인간중심주의에 [가해지는] 이 제한이 비폭력의 에토스를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것으로 밝혀질 것입니다.



  비폭력의 에토스가 도덕 철학, 도덕 심리학과 다르다는 점도 드러날 것입니다. 도덕 철학과 도덕 심리학이라는 탐구 형식[을 따르는] 고려가 [비폭력의 에토스에 대한] 이 통찰로 우리를 이끌기는 하겠지만요. 프로이트가 그랬던 것처럼 도덕 심리학에서 출발한다면, 파괴성과 공격성의 기원을 고려할 시 우리의 추론은 오직 근본적 정치 구조를 고려할 때에만 의미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회적 유대에 파괴적 권력이 어떻게 내재하는지에 대관 우리가 하는 가정을 포함해서 말이지요. 물론 생명들은 특정 역사적 관점하에서만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보입니다. 생명들을 바라보는 틀에 따라 생명들은 가치를 얻고 잃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어진 하나의 틀에 생명의 가치를 결정할 전권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생명의 가치를 측정하는 변별적 방식은 암묵적인 가치평가 도식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 가치평가 도식에 따라 어떤 생명들이 더 애도될 수 있거나 덜 애도될 수 있다고 여겨지게 됩니다. 어떤 생명은 상징적 차원을 획득하여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애도될 수 있는 생명으로 여겨집니다. 다른 생명은 거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 절대적으로 애도될 수 없는 것으로, 상실이 아닌 상실로 여겨집니다. 게다가 하나의 틀 속에서는 그 가치가 전경화되나, 다른 틀 속에서는 사라지는, 즉 그 가치가 해봐야 거의 꺼져가는 [불빛과 같은] 이들이 이루는 넓은 영역이 있습니다. 애도 가능성의 스펙트럼, 애도될 수 있는 이들의 연속체가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다음과 같은 상황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듭니다. 어떤 공동체의 맥락 속에서는 활발히 애도되지만 동시에 지배적인 국가적, 국제적 틀에서는 전혀 표시되지 않거나 표시될 수 없는 삶 같은 경우는 이런 틀에서 이해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저의] 이 작업이 규범적 열망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애도 가능성의 급진적 평등을 지닌 정치적 상상계를 정식화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다. 저는 이를 인정하며, 이에 대해 전혀 부끄럽지 않습니다. 애도 가능한 모든 이의 급진적 평등을 말하고 있다면 애도될 수 있는 이들이 다르게 할당되는 방식에 집중할 수는 없겠습니다. 누군가는 애도될 수 있는 이들의 수준에 오르지 못하게 하며 애도할 가치가 있는 삶으로 파악되지 못하게 하는 할당의 방식에요. 저는 상품의 불평등한 분배, 자원의 불평등한 분배에 관해 말하듯이 애도 가능성의 완전히 불평등한 분배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어떤 계산법에 따라 [애도 가능성을] 분배하는 권력에 중심이 있다는 건 아닙니다. 이는 [애도 가능성을 분배하는] 계산이 거의 은폐된 방식으로 권력의 체제에 편재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제가 다른 이의 죽음 앞에서 모두가 울기를 제가 요청하며,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위해 어떻게 애도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프랑스어[를 사용할 때] 매번 이런 일이 있는데요, '애도하다grieve'라는 동사가 [프랑스어로는] pleurer, 진짜로 '운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우리가 모두를 위해 울어야 한다고 말하는 거야?'라고 누군가가 생각하기도 하지요. 저는 애도가 인간적이지 않은[비개인적인] 형태까지도 포함해 다양한 형태를 띠며, 상실이 가깝지 않을 때도, 상실이 먼 [데서] 일어날 때도, 상실이 이름 없는 상실일 때도 애도가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삶이 애도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그것은 그 삶이 상실되기도 전에 애도될 가치가 있거나 애도될 가치가 있게 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 삶의 상실이 상실로 표시될 것이며 상실로 표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그 삶이] 상실되리라는 전망이 두려움을 불러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며, 그 상실을 방지할 능동적 입장이 배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애도 가능성의 급진적 평등이라는 원칙에 따라 제도가 조직된다면, 그 제도의 항들 속에서 이해된 모든 삶이 보존될 가치를 지닐 것이고, 그 모든 삶의 상실은 표시되고 비통해할lamented 것이 되며, 이 삶이나 저 삶이 아니라 모든 삶에 대해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점이 의료 보험, 투옥, 전쟁, 점유, 시민권에 관한 생각에 영향을 끼친다고 저는 주장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더 애도될 수 있는 인구와 덜 애도될 수 있는 인구 사이 구별을 만듭니다.



  이런 정식 속에서 평등이 어떤 의미에서 작동한다는 것인지는 나중에 알아보겠습니다. 게다가 여전히 삶[에 관한] 매우 까다로운 질문들도 남아 있습니다. 삶은 언제 시작하는가? 제가 살아 있는 이들에 대해 말할 때 생각하는 '살아 있는 것들'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요? “살아 있는 것들”은 주체일까요, 인간일까요? 배아도 [이에 포함될까요]? 그래서 [애초에 이 “살아 있는 것들”을] “그들”이라고 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까요? 곤충이나 동물, 다른 유기체들[도 이들에 포함될까요]? 이들은 서로 구별되는 존재자들일까요, 아니면 생명 과정living processes이나 관계들일까요?



  곧 이 어려운 문제들에 조금씩 접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저는 제가 만들고 있는 윤리가 특정한 정치적 상상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 이 윤리는 조건문을 가지고 하는 실험이라는 점을 제시합니다. [그 조건문은 바로 다음과 같습니다.] "만약 어떤 삶이 상실된다면, 그 삶은 애도될 것이다." [이 가정법 문장을 만족하는 삶이야말로] 애도 가능한 삶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상실되었을 때 애도될 법한 그 삶은 폭력과 파괴로부터 능동적으로, 구조적으로 보호되는 삶입니다. 가정법 과거second conditional라는 문법적 형식의 이런 활용은 잠재적인 것에 대해 실험하는 한 방식이며, 모든 삶이 애도 가능한 삶으로 간주될 시 무엇이 도출될지를 가정해보는 [실험]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어떤 삶이 중요하게 여겨지고 어떤 삶이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는지, 어떤 삶이 더 보존될 법하고 어떤 삶이 그렇지 않을지 고려하는 도중에 어떻게 유토피아적 지평이 펼쳐지게 되는지를 보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삶이 보존되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조건과 관계되는 도덕적 딜레마에 마주칠 때, 많은 경우 가설을 정식화한 후 다양한 시나리오를 상상함으로써 그 가설을 시험합니다. 제가 칸트주의자라면, 저는 다음과 같이 묻겠죠. '내가 특정한 방식으로 행위할 때, 모든 이가 같은 방식으로 행할 것을, 아니면 적어도 동일한 도덕적 계율에 맞추어 행위하기를 내가 모순 없이 의지意志할 수 있는가?' 모순에 빠지거나 [이 행위를 모든 이가 하기를] 의지하면서 합리적으로 행위하거나, 칸트[가 제시하는 윤리적] 문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칸트는 정언명법에 대한 부정적 정식과 긍정적 정식을 제시합니다. 부정적 정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내 준칙이 보편적 법칙이 되어야 한다고 의지하지 않는다면 그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긍정적 정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준칙이 법칙으로서 보편성을 [갖게 되기를] 당신이 의지할 수 있을 때, 그 준칙에 맞게 행위해야 한다."



  칸트는 어려운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거짓된 약속을 하는 경우를 하나의 사례로 듭니다. 그렇게 [거짓된 약속을 하는] 길은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칸트는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죠. "나는 단박에 내가 거짓말하기를 의지할 수도 있겠다는 점을 의식하지만, 절대 거짓말을 하라는 보편적인 법칙을 의지할 수는 없다." 칸트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다른 이들은 동전의 [양면과 같이] 내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보복할 것이며, 내 준칙은 보편적 법칙이 되자마자 자신을 무효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거짓 약속이 보편적 법칙이 되라고 내가 합리적으로 의지하는 일이 불가능한 것은 [누군가] 내게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내가 단지 싫어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준칙의 모순적 성질을 이해할 가능성을 내가 상상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준칙이 모순적이라는 점 때문에 제가 그 준칙을 거부하도록 강제된다는 것이지요.



  [다른 한편으로,] 모두가 당신이 선택한 행위와 동일하게 행위하는 세계에 산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상상해보라는 명령은 어떤 실천들이 전적으로 지지될 수 없다는 결론으로 아어집니다. 결과주의자가 바로 이렇게 생각할 텐데요, 그 실천들이 비합리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실천들이 결과적으로 위해를 가져오기 때문에 그런 결론이 도출됩니다.



  여기서 저는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칸트주의자와 결과주의자 둘 모두는 잠재적 행위가 가설적 상호성을 띤다고 설정합니다. 어떤 이의 한 행위는 다른 이의 행위라는 상상된 형태를 띤 채 돌아옵니다. 내가 다른 이에게 행위하듯이 그 다른 이도 내게 동일하게 행위할 수 있으며, 이 행위가 위해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적어도 결과주의자는 이 결과를 수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칸트의 관점에서 위해는 이성에 가해질 텐데요, 가정법을 [도덕에] 이렇게 사용하는 모든 도덕 철학자가 이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포괄적인 물음은 이것입니다. '내가 어떤 폭력적인 행위 집합을 제시하며 [어떤 방식으로] 행위하자고 제안할 때 바로 그 방식으로 다른 이들이 행위하는 세계 속에서 어떤 이가 살고 싶어 할까?'



  그래서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다른 이에 대해 내가 의지할 수 없는 바를 나에 대하여 의지하는 것은 비합리적입니다. 다른 결론도 가능합니다. 내가 행위하기로 의도하는 바처럼 다른 이들이 행한다면 그 세계 자체가 살만하지 않을 겁니다. [두 번째 결론에서] 우리는 살만함livability의 문턱을 표지하고 있을 터입니다.



  두 도덕 실험 모두에서 잠재적으로 파괴적인 행위가 되돌아오는reciprocated [상황이] 상상됩니다. 그 행위가 정확히 저의 행위인 것은 아니지만 그 행위는 제가 상상하는 행위이므로 확실히 저의 무언가가 그 행위 속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행위를 가능한 [다른] 누군가에게 배정했고[즉, 가능한 다른 누군가가 그 행위를 하게 하였고,] 그렇게 함으로써 저와 그 행위 자체 사이 거리를 조금 두었습니다. 그 행위가 다른 이의 잠재적 행위로서 제게 새겨진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고려하고 있는 행위에서 저 자신을 떨어뜨리는 것이 출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고려하고 있는] 이 행위가 나의 행위가 아니라면 누구의 행위일까요? 저는 [이렇게] 편집증이 시작된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정신분석 및 정신분석이 환상에 관해 설명하는 바가 [위 두 실험에서 볼 수 있는] 상상하기라는 형식과 몇몇 중요한 방식으로 교차한다고 가정합니다. 어떤 이의 행위는 다른 이의 행위라는 형식을 띤 채 제게 돌아옵니다. 이 행위는 복제될 수 있으며, 폭력[적 행위]의 경우 행위는 다른 이에게서 출발해 [상상하고 있는 이] 자신을 향하는 것으로 설정될 수도 있습니다. 피해를 받고 있다고 [상상하는] 환상의 장면 속에서 자신의 폭력이 외적 형상/인물을 통해 상상적으로 돌아오는 상황은 확실히 살만하지 않은 상황입니다. 도덕 철학 속에서 되돌아온 행위에 대해 상상하는 것, 즉 '내가 행위하듯 다른 이들도 행위한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묻는 것]과, 환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반대 물음, '내게 되돌아오는 이 폭력은 누구의 것일까? 이 폭력은 내 폭력일 수 있을까?'라고 [묻는 것]을 이어주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되돌아온 행위를 상상하는 일 자체가 어떤 이 자신의 폭력과 다른 이의 폭력이 관련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그저 투사라는 거울이라거나 인지적 불발misfire이 아니라, 폭력을 잠재적인 사회적 유대의 부분으로서 생각해보는 길입니다. 내가 하리라고 상상하는 행위는 원칙적으로 [다른 누군가가 함으로써] 내가 겪게 될 행위일 수 있고, 따라서 사회적 삶을 구성하는 상호적 관계와 개인적 행위에 관한 숙고를 분리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생명의 동등한 애도 가능성에 대한 제 주장에 대해 중요한 가정이라는 것이 곧 밝혀질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 가정은 말하자면 정신분석에서 출발해, 정신분석을 통과해 사회적 유대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합니다. 대체 가능성이라는 환상과 관련된phantasmatic 차원은 도덕 철학이 정신분석적 생각과 매우 근본적으로 관련된 장소라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대체 가능성이라는 이 환상적 차원에서 한 사람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고, 이 [상상은] 심리적 삶에서 꽤 자주 일어납니다.



  이 논지에 맞추어 결과주의적 관점 중 하나를 다시 제시해보겠습니다. 제가 파괴적인 행위를 고려한다면, 그리고 다른 이들이 제가 계획하는 것처럼 할 수도 있다는 식으로 상상한다면, 저는 저를 그 행위[의 대상이 되는/로 피해를] 입는t 사람으로 묘사해, 제가 하려고 생각했거나 하려고 소망했던 행위를 하지 않도록 저를 만류할 수 있을 만큼 강한 피해형 망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제가 의도하는 것처럼 다른 이들이 행위할 수 있다는 생각이나 제가 다른 이들에게 하려고 의도하는 바를 다른 이들이 제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감당할 수 없는 생각으로 판명 날 것입니다. 상상하는 이 행위가 제 상상의 일부에 불과하며 제 소망을 담은 행동이라는 점을 알지 못한 채 제가 박해받으리라 확신하게 된다면, 저는 외부에서 오거나 적어도 그렇게 보이는 공격에 대항해 공격적으로 행위할 근거들을 마련하게 될 겁니다. 말하자면 제가 피해형 환영을 사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거꾸로] 피해형 환상이 저의 박해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저를 사용하고 있는 겁니다. 다른 이의 행위라는 형태로 저를 향하는 이 폭력이 제 폭력이라는 점을 깨닫는 상황, 저의 이 폭력에 대항해 제가 저를 방어하려 현재 공격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깨닫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여러분의 관점에 따라 이 [상황이] 비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고 희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 이것은 제 행위이지만 저는 이 행위를 다른 이의 이름에 붙여둡니다. 이 대체는 잘못됐을지언정 제가 하는 것이 제게도 가해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도록 강제합니다. [방금] “고려”한다고 했지만, 이 “고려”가 언제나 반성적 절차[를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대체가 [반성적 과정이 아니라] 환상에 노출될 경우, 비자발적인 연관이 따라오게 됩니다. 따라서 [앞선 사고] 실험이 의식적으로 시작되긴 했지만, 이렇게 나를 다른 이로, 다른 이를 나로 교체하는 건 저를 비자발적 답변들에 얽혀들게끔 합니다. 이 바자발적인 답변들은 대체의 과정이, 대체 가능성에 대한 심리적 취약성이, 일차적인 타동적transitive 모방이 숙고하는 정신 활동에 의해 완전히 조직되거나 구속될 수는 없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어떤 점에서 대체는 내가 그러한 바인 “나”의 출현에 선행하며, 모든 의식적 숙고에 앞서 작동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다른 이를 저로 대체하는 일, 아니면 저를 다른 이로 대체하는 일을 과제로서 의식적으로 제게 부과할 때, 제 경험이 [숙고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숙고적 성질을 약화하는 무의식적 영역에 취약해지고 있는 걸 터입니다. 그러니 제 경험의 한가운데에서 무언가가 저를 가지고 실험합니다. 제 실험이 완전히 제 통제하에 있지 않은 셈이지요. 이 요점이 “왜 우리중 누군가는 다른 이의 생명을 보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시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이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그 [물어보는 행위]는 상호적인reciprocal 행위로서 다시 돌려져 [제게로] 역전되고, 확장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제 삶과 다른 이의 삶이 서로 대체될 수 있는지 살펴보는 중에는 두 삶이 완전히 분리될 수는 없어 보입니다. 우리 사이 연결은 제가 의식적으로 고르지 않았나 싶은 모든 것을 넘어섭니다. 저를 다른 이로, 아니면 다른 이를 저로 가설적으로 대체하는 행위는, 폭력에 의해 가해지는 상호적 손상에 대한, 말하자면 상호적 사회관계들 자체에 가해지는 폭력에 의한 손상에 대한 폭넓은 고려로 우리를 이끌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도 자신을 다른 이로, 그리고 다른 이를 자신으로 대체하는 능력 자체가 더 큰 폭력으로 향하는 세계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요?



  차라리 없어졌으면 하는 이들의 생명을 빼앗을 수 없는 까닭, 빼앗지 말아야 할 까닭 중 하나로는 모두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는 세계 속에서 우리는 일관되게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들에 이런 [제한] 수단을 적용하는 것은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행동하는, [그] 행위를 향한 길 위에 우리를 놓는 세계를 상상해야만 하며,  [그렇게 행위하려는] 우리를 막는 근거들이 있는지 자문해야만 한다는 점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살인 행동의 결과들에 대해 상상해야만 하며, 여기에는 불쾌한 환상을 통과하는 일이 포함됩니다. 이 환상은 지금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따라 짜릿한 환상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상상의 과정은] 완전히 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죽을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이미 그 반대가 참일 수 있음을, 내가 다른 사람에 의해 죽을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내 행동이 일방적이며 되돌아오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방식으로 내 믿음을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점과] 분리할 수도 있겠습니다. 되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 이는 내가 다른 사람에 의해 죽는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으로부터 내가 동떨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누군가의 믿음이 이런 부인 위에 서 있다면, 혹은 이런 동떨어짐 위에 서 있다면, 이 사실은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에 어떤 영향을 가져오게 될까요?



  사고 실험을 수행하면서 어떤 이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파괴하려 할 것이라거나 그들이 분명히 자신을 파괴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지요. 이때 내가 그들을 먼저 파괴하지 않는다면 나는 바보일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를 파괴하겠다는 다른 이들의 의도에 대한 지각은 무엇에 기초할까요? 음, 사고 실험이 박해의 양상적 가능성에 길을 내주게 되면, 그 논증은 죽이겠다는 결정을 지지하는 식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물론 프로이트는 이성에 살인을 [추구하는] 소망을 지배하고 구속할 힘이 있다는 말에 전혀 설득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전쟁 발발 직전에 그가 남긴 기록에서도 [분명한데요,] 여기에서 일종의 순환 논증이 공격성의 도구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공격성을 바라건 그 공격성을 두려워하건 말이지요. 프로이트는 파괴하려는 욕구가 실재하기에 윤리적 엄정함이 반드시 요구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례로 그는 윤리적 엄정성이 진짜 제구실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했습니다. 『문명 속의 불만』에서 프로이트는 초자아의 윤리적 엄정함이, 인용하겠습니다, “인간의 심적 구성의 사실들에 관해 고민하지는 않는다”라고 농담을 던지는데요. 그는 그 까닭이 "자아가 이드를 무제한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프로이트는 또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고 하는 계명이 “인간의 공격성에 대한 가장 강한 방어이며, 문화적 초자아의 비심리적인 행사의 탁월한 사례”라고 주장합니다. 프로이트는 전쟁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며 우리의 이성적 전념이 얼마나 정교하건 간에 무의식 속에서 우리는 매일, 매시간 우리를 모욕하고 우리에게 해를 입힌 이 모두를 죽여 버리며, 우리의 무의식적 소망으로 판단할 것 같으면 우리는 살인자 무리에 불과하다고 씁니다.



  이것, 프로이트가 “심적 현실의 정복 불가능한 차원”이라고 부른 것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프로이트는 이를 죽음충동과 연계하게 됩니다. [누군가를] 죽이려는 욕망에, 그리고[누군가를] 죽이지 않도록 우리를 저지하는 것에도 잠시 초점을 맞추긴 했지만, 인간의 생명에 관해 치르는 대가와 분리된 정치적 숙고 속에서 죽음충동이 작동한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종류의 추론 중 주된 사례로서 부수적 피해를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이 부수적 피해란 부인disavowal을 기초로 하는데, 이 부인이야말로 실제로 파괴가 일어나게 하는 수단이지요. 다르게 말하자면, 부수적 피해를 부인하지 않는다면 이 부수적 피해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고, [이 말인즉] 부수적 피해는 부인을 통해 일어나며, 부인은 부수적 피해가 발생하게 하는 수단인 것이지요.



  법적인 형태의 상호성, 정치적 형태의 상호성에 대한 저항의 증거를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식민적인colonial 규칙의 정당화를 고집한다거나, 다른 이들이 질병이나 영양 부족으로 죽게 놓아둔다거나, 유럽의 항구를 닫아 유럽에 새로 오려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 시신이 유럽의 유명한 리조트 해안에 쓸려 오는데도 그들이 집단으로 익사하게 두는 등이 그러합니다. 게다가 사디즘에서 오는 무제한적[금지되지 않은 / 금기시되지 않는] 만족이 지닌 전염적인 감각이 있기도 합니다. 미국 내 흑인 커뮤니티에 대한 치안 활동에서 보았듯이, 경찰에게서 도망하는 비무장 흑인 남성을, 그들이 무슨 사냥감인 것 같이 손쉽게, 도덕적 처벌 없이, 만족감과 함께 쏘는 일이 일어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 기후 변화에 반대하는 고집스러운 논변도 있습니다. [이 논변을 펴는] 이들은, 만약 기후 변화가 현실임을 인정할 시 산업 확장, 시장 경제 확장을 제한하도록 강제된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파괴가 일어나고 있음을 알지만 알지 않기를 선호하고, 그럼으로써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 이익을 보기만 한다면 파괴가 일어나건 그렇지 않건 신경 쓰지 않기not to give a damn로 [입장을] 정해둡니다. 이런 경우 파괴성은 기본으로 일어납니다. 게다가 직접 말해지거나 생각되는 것은 아닐지라도, 파괴를 허가하는, “나는 파괴되든 말든 하나도 신경 안 써” [같은 태도], 심지어 산업 공해와 시장 확장 억제책에 반대하는 데에서 오는 만족스러운 해방감 같은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동시대 정치적 생활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잔혹하고 [힘을] 빼앗는 초자아—이때  초자아는 비폭력을 옹호하는 페미니스트, 퀴어, 인종차별반대론자를 포함한 좌파로 대표됩니다 —로부터 민중populus의 해방을 옹호한다며 인종차별적 정책이나 행동, 폭력에 가해지는 제한을 풀기를 요청하는 다양한 방식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열광하는지 보게 됩니다. 네, 저는 사실 이러한 사례들에서 그런 충동impulse에 가해지는 제한이 갑자기 풀린 것처럼 사디즘에의 열광, 인종차별주의에의 열광 같은 것이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에 반대하는 입장은 순진해질 여유가 없습니다. 이런 입장은 제가 사회적 유대라고 부르는 것을 구성하는 일부인 파괴의 잠재성을 진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그런데 만약 죽음충동을 진지하게 다룬다면, 즉 공격성이자 파괴성으로 정의된 후기 [프로이트] 버전의 죽음충동을 진지하게 다룬다면, 파괴에 반대하는 도덕적 계율precept이 심적 삶에 제기하는 일종의 딜레마를 더 일반적으로 고려해보아야 합니다. 이 도덕적 계율은 정신psyche를 구성하는 하나의 차원을 죽여버리려 하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도덕적 계율에는] 초자아, 그리고 [자아에 가해지는] 초자아의 엄격하며 잔혹한 포기 요구를 강화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있을까요? 이 물음에 대한 프로이트식 대답 중 하나는 충동을 포기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충동을 포기하는 것이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방식이라고 하는 식입니다. 그 정도의 심적 비용은 치러야 한다는 것이지요. 도덕이 우리를 병들게 할 수도 있지만, 병드는 편이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는 편보다는 낫다는 말입니다. 초자아와 초자아의 포기 요구만이 유일한 방법, 도덕을 향한 유일한 방법이라고 하는 이 관점에 따르면 당신은 당신 자신이 지닌, [누군가를] 죽이려는 충동을 죽여야 하는데, 만약 이런 충동을 죽이는 데에 성공한다면, 음 한 번 죽이고 말 수는 없지요, 당신은 계속 그것을 죽여야 하며, 이 말은 즉 [누군가를] 죽이려는 충동을 죽이기 위해 계속 [무언가를] 죽이려고는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미안합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웃음)



  『문명 속의 불만』에서 프로이트는 양심에 관한 생각을 발전시키면서, 파괴성이 파괴성 자신을 향하게 해야 한다는 점을 밝힙니다. 흥미로운 생각임은 분명합니다. 물론 문제는, [이렇게 될 시] 초자아가 점점 더 잔혹한 심적 기제가 된다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잔혹성, 자기에 대한 잔혹성, 다른 이에 대한 잔혹성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초자아의 강화나 승화의 가능성에 반드시 기대지는 않는 다른 정신분석적 방식이 있다고 주장하려 합니다. ‘무엇이 다른 이의 삶을 보존하려 하도록 우리를 이끄는가?’라는 물음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이 물음을 부정의 형식으로 물어볼 수도 있지요. [누군가를] 죽이려고 하는 소망에 붙잡혀 있을 때 심적 삶 속 어떤 것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막는다면 어떨까요? 사실 제가 요즘 그리스 비극을 가르치고 있어서 이는 매우, 매우 중요합니다. 제가 주장한 대로, 정신분석적 사고에는 다른 길이 있으며, [그 길을 따라가면] 이 물음을 긍정의 형식으로 바꾸어 말하는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이의 생명을 능동적으로 구호하려고 할 때 심적 삶 속의 어떤 것이 살아 움직이게 된다면 어떨까요? 대체에 관한 문제로 돌아와서, 어떻게 대체의 무의식적 형태를 취하는 대체가 도덕적 감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형성하게 되는지, 다른 이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으면서 다른 이의 자리에 자신을 두는 가능성의 조건은 무엇인지 물어볼 수도 있겠습니다. 또, 다른 이를 자신의 위치에 놓더라도 그 대체에 완전히 집어 삼켜지지는 않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런 대체는 생명이 애초부터 다른 이와 연루되어 있음을 입증합니다. 이 통찰은 우리가 어떤 윤리를 채택할지라도 결국 자신을 보존하는 것과 다른 이를 보존하는 것을 구별하는 것은 별로 도움이 안 된다는 점을 이해할 방식을 제공하며, 제 생각에는 앞으로 보시게 될 것과 같이 두 번째 강의에서 저는 자기방어에 반대하는 일종의 도착적인 논변을 [제시할 것입니다.]



  클라인은 「사랑, 죄책감, 보상」이라는 에세이에서 정신분석을 통해 도덕 철학에 기여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저는 초자아[를 통한 방식이 아닌] 다른 방식이 무엇인지에 관한 암시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 에세이에서 그는 사랑과 미움의 역동을 탐구하는데, 이 역동 속에서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심리는 한데 모입니다. 그가 주장하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자 하는 욕망은, 인용하겠습니다, “책임감과 걱정이라고 하는 강한 감정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의 진정한 공감”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들의 자리에 놓는 일”과 연관합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동일시는 우리를 이타주의의 가능성에 가장 가까이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씁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우리를 동일시하는 능력이 있어야 우리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무시하고 또 어떤 범위까지는 희생하는 것이 가능하며, 그럼으로써 잠시 다른 사람의 감정과 욕망을 우선시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입장이 완전한 자기 포기인 것은 아니지요.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우리가 그 사람의 만족을 공유한다는 식으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 사람의 만족을 공유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을 수 있겠습니다. 다른 이를 먼저 두는 행위에 개입하는 것은 대리와 관계된 순간으로, 한 편에서 희생했던 것을 다른 편에서 되찾는 식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완전히 이타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클라인은 그가 글의 특정 부분에서 사랑에 초점을 두고 있기는 하지만 폭력도 언제나 공존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어 하며, 공격성aggression과 증오hatred는 생산적일 수 있고, 사랑하는 바로 그 능력을 갖춘 사람이 이러한 다른 감정을 드러낸다고 해서 놀라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안심을 주는 정신분석가이지요. (웃음) 다른 이에게 [무언가를] 주고 심지어 다른 이를 보호하면서 우리가,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우리가 부모에 의해 다루어졌던 바로 그 방식을 재연reenact, 더 잘 말해본다면 우리가 이러저러하게 다루어졌었으면 어땠을까 하고 바랐던 그러한 방식에 대한 환상을 재연하기까지 한다”는 점을 그는 분명하게 합니다. 그는 이 두 선택지[부모가 우리를 다루었던 방식의 재연 혹은 부모가 우리를 그렇게 다루었었다면 하고 바라는 방식의 재연]를 열어둡니다. 그는 이렇게 씁니다. “결국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이를 위해 희생할 때, 사랑하는 사람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할 때 우리는 좋은 부모의 역할을 맡으며, 부모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했을 때 느꼈던 바와 같이, 또는 부모가 무언가를 해주길 바랐을 때 느꼈던 것처럼 그 사랑하는 이를 대한다.” [부모가 행한 바에서 느꼈던 것, 부모가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랐을 때 느꼈던 것], 이 둘은 분명히 다르지요.



  그러므로 클라인이 다른 이와의 “진정한 공감”이 가능하다고 말하기는 했고, 그 공감이 “다른 이를 이해하는 능력”,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들이 그들인 바대로, 그리고 그들이 느끼는 대로” 이해하는 능력을 포함하지만, 이 공감은 이상하게도 역할을 맡는 것을 포함하는, 심지어 환상과 관련된 장면 속에서 어떤 역할을 다시 맡는 것을 포함하는 동일시의 양태를 통해 세워지며, 이 장면 속에서 어떤 이는 아이의 위치나, 진짜 그러했던 바로서의 부모나 그랬어야만 하는 바로서의, 즉 자신의 부모가 이러저러하기를 어떤 이가 원했던 그러한 방식을 따르는 부모의 위치를 점합니다. 사실 클라인은 “동시에, 우리는 우리의 부모에 대해 좋은 아이의 역할을 맡기도 한다. 우리는 과거에 그렇게 좋은 아이의 역할을 맡기를 바랐고, 현재에도 그렇게 좋은 아이[처럼] 행동한다.”고 이어 주장합니다.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하려는 노력에 중심이 되며, 우리보다 그 사람에게 도덕적인 우선성을 부여하는, 대리함을 통해 동일시하는 순간에 우리는 역할극을 하고 있으며, 애도되지 않은 상실과 충족되지 않은 희망을 재연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합시다. 클라인은 논의를 다음과 같은 식으로 마칩니다. 인용하겠습니다. “상황을 역전시킴으로써, 즉 환상 속 좋은 부모로서 다른 사람을 향해 행위하는 중에 우리는 우리가 바라던 대로의 부모의 사랑, 좋음을 재창조하며 그것을 누린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 [부모가 주었던] 좋은 사랑이 있었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것을 잃게 되는지, 아니면 우리가 실제로 지니지는 못했던, 혹은 적어도 우리의 소망을 완전히 충족시키지는 못했던 좋은 사랑을 희망하기만 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제 대리함의 [행동] 양태나 [무언가를] 주는 [행동] 양태 속에서 사실 우리가 한때 지녔던 것을 애도하고 있거나, 혹은 우리가 지니지 않았던 과거를 희망하고 있지는 않은지, 아니면 심지어 둘 모두를 조금씩 경험하고 있지는 않은지가 중요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랑에 관한 글 속에 폭력성에 관한 논의를 들여오는 지점에서 클라인은 다음과 같이 씁니다. 인용하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부모로서 다른 이에게 행위하는 것은 과거의 절망과 고통을 다루는 방식일 수도 있다. 우리를 좌절하게 했다는 점에서 우리 부모에게 느끼는 불편함grievances,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우리 속에서 생겨나게 한 미움과 복수의 감정, 그리고 또 우리가 부모를 사랑한 동시에 그들에게 상처입혔다는 점 때문에 이 미움과 복수에서 일어나는 죄책감과 절망감—우리는 환상 속에서 이 모든 것을 사랑을 베푸는 부모와 사랑을 베푸는 아이의 역할을 동시에 맡으면서 회고적으로 허물undo in retrospect 수 있다.” 네, 그러니까 이 역할놀이 시나리오는 어떤 이를 화나게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멜라니 클라인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저는 이것이 여기서 저희가 다루는 주제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주장하려 합니다. 진정한 공감이 동일시의 양태를 통해 가능하다는 주장에서 시작하는 논의는, 다른 이들을 잘 대하고 그들의 행복을 지키려 하면서 우리가, 우리 각각이 우리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았던 이들을 향한, 혹은 우리가 상실—용납할 수 없는 상실—한 좋은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었던] 이들을 향한 불편함을 재상연한다는 설명으로 발전합니다.



  또한 이 논리에 따르면, 한때 좋은 아이가 아니었더라도, 아니 좋은 아이가 되려는 어렸을 때의 모든 노력을 압도한 파괴성의 파도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하더라도 이제는 좋은 아이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진정한 공감에 참여할 때, 나는 내가 [경험한] 상실들과 불편함들을 해결해 나가며 나의 잘못에 대해 속죄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때] 나는 다른 이를 [나보다] 먼저 두지만, 내가 [떠올리는] 장면이 나나 당신이 맡을 수 있는 역할을 전부 설립해냅니다. 꽤 쉬운 [이야기일] 수 있겠습니다. 나는 다른 이를 사랑하고, 다른 이가 느끼는 바를 나 또한 느끼기 때문에—진정한 공감이죠—내가 다른 이에게 주는 만족감을 서로 나누는 것일 터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겠습니다. 내가 사랑을 베푸는 그 다른 이가 도무지 우리가 재상연하는 시나리오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말이지요. 이 시나리오와 [동시에] 내가 잃었던 것, 혹은 내가 지니지 않았던 것은 다시 만들어지고, 환상 속에서일지언정 다른 이를 파괴하려 하거나 파괴하려 했다는 점 때문에 축적되었던 나의 죄책감이 처리되지요. 나의 공감은 나의 상실과 죄책감을 동기로 한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이를 도와 일으키려는 다른 이의 행복을 내가 그와 함께 나눌 때, “나”와 “당신”은 앞서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구별될 뿐이기만 한 것이 아니지는 않을까요?



  클라인이 [피해를] 보상하는 일이 사랑의 기초를 이룬다고 주장하며 논의를 마칠 때, 그는 공감을 다르게 생각할 방식 하나를 제공합니다. 내가 다른 이에게 공감할지라도, 그 다른 이가 상실 혹은 결핍deprivation에 대해 전혀 받지 못한 보상에 대해 공감할 때, 나는 동시에 내가 전혀 받지 못한 바에 대해, 혹은 내가 돌보아졌어야 했던 방식에 대해 보상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달리 말해, 나는 다른 이를 향해 움직이지만 나를 바로잡으며repair, 이 두 움직임[다른 이를 향한 운동, 나를 바로잡는 운동] 중 하나는 다른 하나에서 분리될 수 없습니다.



  이 대목에서 클라인은 불편함과 죄책감에 초점을 맞추지만, 불편함은 어떤 이가 과거에 결핍되었다는 주장에 비추어 보아야만 말이 되지요. 결핍은 상실의 형태로 올 수 있습니다. 나는 한때 그 사랑을 받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요. 결핍은 또는 책망의 형태로 올 수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랑을 전혀 받지 못했고, 분명 그러한 사랑을 받았어야만 한다는 식이겠죠. 이 대목에서 죄책감은 증오hatred와 공격성의 감정과 관련합니다. 어떤 이가 말 그대로 부모를 찢었거나tore at 부모의 마음을 찢었건tore apart 그렇지 않건, 환상은 작동하며, 아이가 언제나 그것[자신이 부모나 부모의 마음을 찢었다는 생각]이 파괴 환상이었는지, 실제 행위였는지 아는 것은 아닙니다. [파괴 혹은 파괴 환상의] 대상이 된 부모가 계속 현재한다고 한들, 그것이 아이가 살인자가 아님을 증명하는 살아있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죽은 부모가 자연사했음을 보여주는 충분한 기록물이 있다손 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에게, 다소간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해당한 이가 때로는 같은 집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거나, 때로는 아이 자신이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살해당한 이입니다. 클라인에 따르면, 공감하는 동일시가 상실의, 결핍의 교섭 불가능한 의존성에서 따라 나오는 일종의 증오를 재상연하고 역전하려는 시도에서 일어난다는 점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동일시가 보여주는 피해 보상의 궤적을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클라인은 이렇게 씁니다.  “정신분석 작업을 통해 나는 아기의 마음속에서 사랑과 미움 사이의 충돌이 일어날 때, 사랑하는 이를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이 활성화될 때 아이는 발달의 중요한 단계를 밟게 된다는 점을 확신하게 되었다.” 논점은 어머니를 파괴하는 환상, 일차 보호자primary caregiver나 일차 보호자 여럿을 파괴하는 환상이 그 유아가 근본적으로 의존하는 그이를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을 야기한다는 점입니다. 클라인의 표현으로는, 어머니를 죽여버린다면 그이의 존재 자체의 조건을 위험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두 생명은 함께 묶여있는 듯합니다. 클라인이 쓰길, “무의식적 마음속에는 그녀를[어머니를] 포기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경향은 어머니를 영원히 유지하려는 긴급한 욕망에 의해 대항된다.” 물론 아기는 계산하는 존재도, 공리주의자도 아닙니다. 어떤 이 자신의 생명이 이 다른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이 일차적인 수준에 있는 것입니다. 이 의존성이 형태를 달리하더라도 저는 이 [인식의 존재가] 사회적 유대에 관한 이론의 정신분석적 토대라고 주장하려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생명을 보존하려 하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이 단지 내게 이익이 된다거나 틀림없이 나를 위해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리라 생각했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에 앞서며 우리 둘 모두의 생명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유대 속에 우리가 이미 함께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클라인에게 죄책감은 어떤 이 자신의 파괴성을 확인하는, 초자아를 강화하는 방식일 뿐 아니라 다른 이의 생명을 구호하는 방식으로도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호하는 행위가 된다면, 이것이 죄책감이라 불릴 필요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죄책감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죄책감이 이상하게도 무언가를 산출한다는 결론을, 혹은 죄책감의 생산적인 형식이 [피해에 대한] 보상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구호함이 미래지향적 양태이자, 우리가 일으킬지도 모르는, 일어날지도 모르는 피해를 적극적으로 미연에 방지하려 하는, 예상과 관련된 돌봄 내지 다른 이의 생명을 지키려는look out for [행위]라고 주장하고 싶습니다. 물론 보상이 반드시 과거에 일어난 것과만 엮여 있지는 않습니다. 내가 일으키려고 소망했으나 그렇게 하지 않은 피해/상해에 대해 보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데] 구호함은 무언가 다른 일을 하는 것 같습니다. 구호함은 생명이 살 수 있을 만하게 될 가능성의 조건, 생명이 번영할 가능성의 조건을 설립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호함이 보존함을 전제하기는 하지만 둘이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보존함은 이미 있는 생명을 지키려 하는 것입니다. 구호함은 그 생명의, 그 삶의 내용이 미리 정해지지도, 예측되지도 않는 과정에서, 자기규정이 가능성으로 등장하는 지점에서 [무언가가] 되는 일, 그 삶, 미래성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지키고 재생산하는 것입니다.



  클라인의 유명한 말 중 그가 반복하는 말이 있지요. 유아가 어머니의 가슴에 크나큰 충족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파괴하려는 크나큰 욕구도 지닌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파괴적 소망의 현존 속에서 그 유아는 그 대상, 우리가 알다시피 그가 사랑하며 가장 필요로 하는, 클라인의 표현에 따르면 “그가 완전히 의존하는” 대상을 파괴하지는 않았는지 두려워합니다. 다른 시점에 유아는 어머니를 잃은 데 대한, 혹은 그가 가장 많이 의존하는 이를 잃는 데 대한 죄책감을 느낄 뿐 아니라, 그가 느끼는 근본적인 무력감에 속하는 불안을 지시하는 불편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클라인은 “앞선 분석에서, 사랑하는 이—우선은 어머니—가 환상 속에서 그에게 가해진 상처injury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두려움은 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을 참을 수 없게 만든다”고 씁니다. 이 참을 수 없는 의존성이 존속해 사회적 유대를 그려내는데, 이 유대는 그 핵심에 무언가 참을 수 없는 것을 지닌 상호의존성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그런데도 보존되어야 하는 유대가 아니겠느냐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이 [상호의존성은[ 살인적 분노를 일으키는 데에 충분하지만, 만약 살인이 일어난다면 우리가 서로에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우리 둘 모두는 한 번에 해체해 버릴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중요한 점은, 다른 이에게 베풀고자 하는 욕망, 그를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욕망은, 만일 어떤 이가 그를 파괴한다면 어떤 이 자신의 생명을 위태롭게 만들 것이라는 인식에서 나온다는 점입니다. 그렇게 아이는 자기 자신이 부추겼다고 혹은 상상했다고 생각하는 단절을 바로잡기 시작하거나, 아직 오지 않은 단절을 바로잡아 이 바로잡음을 통해 파괴성에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그를 바로잡으려 할 때, 나는 나 자신이 그에게 피해를 주었다고 생각하거나, 심적 수준에서 [그의] 살인을 상연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나는 나의 파괴성을 부인하지 않되, 그 파괴성의 피해 효과를 역전하려 합니다. 파괴성이 바로잡음으로 돌아선다는 말이 아니라, 내가 파괴성에 이끌릴지라도 바로잡으려 한다는 말이지요.



  프로이트가 인간의 파괴성을 어떻게 억제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관해 내놓은 답은, 죽음충동을 다시 순환하게 하는 도구로서의 양심과 죄책감에 초점을 둡니다. 이 답에 따르면, 절대적인 도덕 명법과 잔인한 처벌, 실패했다는 최종 판단으로 [자아를] 채찍질하는 초자아로 말미암아 자아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추적해 온 논리 속에서 다른 무언가가 작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려 합니다.



  클라인에게 저 반전 내지 부정 변증법은 다른 가능성을 낳으니, 이는 다른 생명을 보존하려는 충동입니다. [이를 통해] 죄책감이란 완전히 자기만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이를 향한 관계를 보존하는 한 방식이기도 하다는 점을 보게 됩니다. 달리 말해, 죄책감은 더는 사회적 끈을 끊는 부정적 나르시시즘의 한 형태로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죄책감은 바로 그 사회적 유대가 구체화되는 곳입니다. 클라인은 죄책감이 다른 이와 나 자신을 보존하려는 목적하에 파괴적인 충동을 통제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죄책감이 이렇게 파괴적 충동을 통제하는 까닭은, 나의 생명이 다른 이의 생명에 완전히 의존하고 있으며, 나의 생명은 다른 이의 생명 없이는 전혀 생각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생명을 파괴하면 다른 생명도 파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 환상의 수준에서 작동합니다. 발생적인 설명이 유아와 엄마의 존재를 전제하고, 오늘 그렇게 전제한 상태로 이야기해오긴 했지요. 하지만 저는 이렇게 일반화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적 유대의 이 양가적인 형식—내가 완전히 의존하고 있는, 그것 없이는 내가 살 수 없을 그러한 무언가를 언제나 파괴하려 한다는 형식—은, 살인 금지가 사회성을 조직하는 원리가 될 경우 더 일반적인 형식을 취할 것이라고 말이죠. 결국, 언제나 부분적으로는 참기 어려운 의존성을 통해 생존을 보장하는 원초적 조건이 우리가 나이 들어가면서 우리를 완전히 놓아주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이가 들어, 원초적인 조건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새로운 형식의 의존성에 들어설 때 이 점은 더욱더 큰 중요성을 획득합니다. 예를 들어 (그런 것이 있다면) 주택 공급housing, 보호자를 동반한 제도적 장치 같은 것이 있겠습니다.



  결과주의적 시나리오를 다루며 다음과 같은 점을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각각은 우리가 반감이나 양가감정을 느끼는 이들을 죽이려 드는 것이 우리의 이익을 증진하지는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를 향해 그렇게 느끼는 이들도 같은 생각에 우리 자신의 목숨을 빼앗을지 모르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이성성—칸트라면 이 이성성이 우리를 인간으로 구별해내는 것이며, 우리의 세계를 [그 속에서] 살 수 있을 세계로 이루어 낸다고 주장할 것입니다—을 위험에 처하게 하지 않고서는 이 규칙을 보편화할 수는 없겠다는 점을 말이지요. 오늘 제가 스케치한 결과주의 견해와 칸트주의 견해는 우리 행동을 복제하고 되돌아오게 해 우리의 위치에 놓인 다른 이를 상상하거나 다른 이의 위치에 우리를 투영하는 일을 상상하게 한 후, 그 [사고] 실험에 비추어 우리 스스로가 하자고 제안하는 행위를 따져보고 평가하게 하는 시나리오를 고안합니다. 그러나 클라인에게 우리에게는 애초부터, 이러한 숙고 없이 우리를 다른 이로 대체하거나 우리의 대체물을 찾는 상황 속에 있으며, 이 점이 우리의 성년 삶에 반향을 줍니다. ‘나는 너를 사랑해. 그러나 너는 이미 나야. 너는 나의 바로잡히지 않은 과거라는 짐, 나의 결핍, 나의 파괴성이라는 짐을 지고 있지. 마찬가지로 나도 너에게 그런 셈이야. 네가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처벌을 정면에서 받고 있지. 우리는 서로에게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잘못된 대체들이야. 우리 둘은 바로잡을 수 없는 것을 바로잡으려는 욕망을 넘어서고 있지 못하지. 그래도 우리는 여기에 있어. 좋은 와인 한 잔을 나누었으면 하면서 말이야.’ (청중 웃는다.) 네, 네. 이제 클라인을 이해하시겠죠. 이 말로 시작할 걸 그랬네요. 미안합니다. (청중 계속 웃는다.)



  기억하시겠지만, 프로이트는 『쾌락 원리를 넘어서』에서 우리가 아는 삶은 우리에게 너무 힘들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렇죠!) 그래서 다양한 종류의 마약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아편이나 코카인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물론 예술에 관해서는 이야기하지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청중 웃는다) 우리는 애도 불가능한 상실, 참을 수 없는 의존성, 바로잡을 수 없는 결핍이라는 부담을 지면서 우리가 우리의 “관계”라 부르는 것 속에서 바로잡으려는 욕구의 시나리오를 지으며, 다양한 형태의 줌giving을 통해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듯합니다. 이는 지속하는 역학으로서, 그 속에서 줌과 받음, 구호함과 바로잡음 같은 양극이 완전히 구별되는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즉,] 행위하는 이가 행위의 [대상이] 되는 이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습니다. 도덕적으로, 감각적으로 풍부한 이런 식의 양가성은 아마 우리를 공통된 방식으로 이루어낼지 모릅니다. 그리고 클라인을 따라본다면, 이 양가성은 우리를 처음부터 그러한 방식으로 이루어냅니다.



  나의 지속하는 현존이 다른 이에게 의존한다면, 나는 내가 의존하는 이와 분리되어 여기에 있지만, 또한 중요하게도 그곳에 있기도 하니, 먹고 자고 만져지고 안기는 중에서 여기와 저기에 양가적으로 있습니다. 달리 말해, 유아의 분리됨은 어떤 식으로는 사실이나, 중요한 식으로는 투쟁이고 협상이요, 그렇지 않다면 관계적 결속입니다. 아무리 육아를 잘한다 해도 언제나 어느 정도의 고충이나 충족감 부족이 있기 마련인데요, 이는 [부모나 보호자의] 저 다른 몸이 언제나 [아이가 원하는] 그곳에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이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의존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보이는] 증오야말로 사랑 관계 속에서 언제나 부상하는 파괴성이 뜻하는 바이겠습니다. 이 점을 덧붙여 말하고 싶습니다. 정신분석 내에서 파괴성을 가져다가 이를 죽음 충동의 일부로 이해하고, 이 충동을 본능으로 번역하기를 강조해 파괴성이 우리를 이룬다고 말하려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제가 그리려 시도했던 바처럼 파괴성이 언제나 관계적 유대 속에서 발원한다고 보는 이들도 있습니다.



  좋습니다. 이러한 점을 어떻게 일반 원리로 번역할 수 있을까요? 우리를 죽이는 것으로부터 막고 다른 이의 삶을 보존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물음으로 돌아갈 일반 원리 말입니다. 심지어 지금도 우리가 다른 이를 파괴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요? 만약 그렇다면, 내가 그러한 바인 “나”가 단지 양가적으로만 구별되었기 때문이겠습니다. 나에게 [다른 이와] 구별됨이란 영구적인 투쟁이고 문제입니다. 클라인과 헤겔은 여기서 한데 모입니다. ‘나는 너를 마주하는데, 거기서 나 자신을 너로서, 나의 황폐함 속에 복제된 [누군가]로서 마주한다. 그리고 나 자신은 단지 나인 것이 아니라, 내가 겪었던 바와 다른 역사를 찾고 있는 너로부터 내가 받는 환영이다.’



  그러므로 “나”는 “나”라는 그것을 없애지 않고서는 없애버릴 수 없는 의존성이 있는 세계 속에 삽니다. 유아기 삶의 변치 않는 몇몇 진실은 분열dissociation과 굴절deflection의 형태들, 그로부터 주권적인 자족성의 환상이 태어나는 그 형태, 그리고 우리의 정치적 생활과 지속해서 관련합니다. 그렇기에 재클린 로즈Jacqueline Rose는 전쟁에 나서는 일을 피하고자 한다면 승리주의의 형태들을 미연에 방지하고 약화하는 “조롱”과 “실패”의 형태들을 “고수해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진정한” 공감은 내가 나를 너와 완전히 분리된 [존재로] 이해함을 요구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 대신] 내가 아니게 되는 나의 능력, 역할을 맡는 나의 능력, 실제로 그 역할을 실연하는 나의 능력은 내가 그러한 바의 일부이자, 내가 너에게 공감할 수 있게 하는 무언가의 일부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동일시하는 [과정]에서 나는 나 자신을 넘어 너 속에서 행동하게 되고I am comported beyond myself in you, 네가 나를 향해 부과하는 바를 내가 떠맡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방식으로 우리는 서로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나는 내가 사랑했고 잃었던 그 모든 것의 침전물일 뿐만 아니라, 나를 잘 사랑하지 못했던 이들의 유산, 내 생존을 향해 [느낀] 참을 수 없던 어렸을 적의 고충으로부터, 나의 분노를 향한 버틸 수 없는 죄책감으로부터 나를 떼어놓는 데 성공했다고 내가 생각하는 이들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는 네 생명의 조건을 지키려 하는 이가 되려 하며, 네가 도망할 수 없는 상호의존성에 관해 네가 느끼는 분노에서 생존하려 노력합니다. 실로 우리는 다소간 의존성에 대한 분노 속에서 삽니다. 우리는 사회적이고 심적인 삶 자체의 조건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이 의존성에서 벗어날 수 없지요.



  개인적인 삶과 의존성의 친밀한 형식 속에서 의존성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그러한 바인 존재로서 존속할 수 없을 제도와 경제에 우리가 의존하고 있다고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 관점은 전쟁, 정치적 폭력, 인구들을 질병이나 죽음에 [노출되도록] 놓아버리는 일에 관해 생각하는 데에서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까요? 죽임을 금지하는 도덕적 계율은 제도적이고 경제적인 수단을 통해 생명들을 구호하려 하는 정치적 원칙, 그 자체로 애도 가능한 인구와 그렇지 않은 인구를 구별하지 못하는 식으로 생명을 구호하려 하는 정치적 원칙으로 확장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내일 이 견해를 펼쳐보려 합니다. [내일 강연에서 저는] 애도 가능한 생명에 관한 평등주의적 개념화가 생명정치 및 전쟁의 논리에 비추어 보았을 때 평등에 관한 우리의 개념을 개정하게 해준다고 주장하려 합니다. 요점은 우리가 야기한 피해, 우리가 야기했다고 믿는 피해를 복구하는 방식을 찾는 일만이 아닙니다. 물론 이는 굉장히 중요하지요. 요점은 또한 아직 오지 않은 피해를 예상해 미연에 방지하는 데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면 예상하는 형태의 복구나 바로잡음, 생명의 알지 못할 미래를 위해 존재하는 생명을 능동적으로 구호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폭력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단순히 다른 이가 똑같은 일을 우리에게 할 것이라고 계산한다거나,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우리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대명사들의 세계 속에서 우리 자신을 이루는, 서로 갈등하는 사회적 조건들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그러한 바인 “나”는 이미 사회적입니다. “나”는 긴급하고 크게 보아 개인적이지 않은, 낯익음의 영역을 넘어서는 사회적 세계에 묶여 있습니다. 나는 그것이 없다면 나 자신이 전적으로 생각될 수 없을 사회적 유대들을 보존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만약 모든 삶이 평등하게 애도 가능하다면, 정치적 세계는 이 원칙이 경제적이고 제도적인 삶의 통치 속에서 승인되는 식으로 조직된, 마땅히 그래야 할 정치적 세계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일으킬 수 있을 파괴에 맞서 [그 파괴를] 예상하는 [형식의] 구호함을 포함합니다. 제 생각에 이는 온정주의적인 권력 형태의 강화로 취약한 이들을 보호하는 일과는 다릅니다. 결국 후자의 전략을 언제나 늦게 도착했고, [부권적인 권력 형태가] 취약성을 상이하게 생산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데에는 실패하지요. 그러나 생명이 애초부터 애도 가능하다고 여겨진다면, 그 생명을 피해과 파괴로부터 구호하려고 모든 예방조치가 취해질 것입니다.



  목표물로 여겨지고 버려지며 비난받는 이들 역시 애도 가능하며, 그들의 상실은 중요하고 중요할 것이라는 점, 그들을 보존하는 데 실패하는 일은 거대한 후회와 의무적인 바로잡음이 [이루어질] 곳이 되리라는 메세지를 널리 퍼뜨리는 일은 무척 어렵지요. 그렇다면 어떤 배치가 후회와 회한의 예측하는 힘을 설립해 그렇게 하여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행위가 우리가 애도하게 될 미래를 미연에 방지하도록 할 수 있을까요? 그리스 비극에서 비통은 분노 이후에 오며 보통 뒤늦게 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종종 코러스, [행동을] 추진하는 분노에 대면해 모여 노래하는 익명의 집단, [일이 벌어지기에] 앞서 비통해하며 [그 일이] 벌어지자마자 애도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필자 소개
주디스 버틀러 Judith Butler. 버클리 소재 캘리포니아 대학 수사학과와 비교문학과의 맥신 엘리엇 교수이자 수사학과 학장이다. 수행(성) 개념을 바탕으로 젠더 정체성의 형성을 이론화하는 대표적인 젠더/퀴어 이론가로 학계뿐만 아니라 퀴어 행동주의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젠더 트러블』(Gender Trouble, 1990), 『의미를 체현하는 육체』(Bodies That Matter, 1993), 『젠더 허물기』(Undoing Gender, 2003), 『불확실한 삶: 애도와 폭력의 권력들』(Precarious Life: The Powers of Mourning and Violence, 2004), 『윤리적 폭력 비판: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Giving an Account of Oneself, 2005) 등 여러 저작을 집필했다.

역자 소개
박준호. 물리학과 철학을 전공했다. 현재 서울대학교 철학과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출판사 전기가오리에서 번역 작업에 참여하고 있다. (parkthomas@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