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괴짜, 그리고 동물
수나우라 타일러
번역 : 소현, 한유리
2010년 9월, 나는 캘리포니아의 Headlands Center for the Arts in Marin County에서 주관하는 행사에 참여하기로 했다. 행사 이름은 The Feral Share로, 지역 기반 유기농 농산물 축제였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 기금 마련 행사이자 철학 행사이기도 했다.
나는 행사의 마지막, 철학적 즐거움을 위해 초대받았고, 비건 대표로 육식의 윤리에 관해 토론하게 되었다.
내 토론 상대는 환경 문제를 다루는 변호사이자 목장 운영자인 니콜레트 나이먼(Nicolette Hahn Niman)이었다. 그는 "정당한 돼지고기: 공장식 축산을 넘어선 삶과 좋은 음식을 찾아(Righteous Porkchop: Finding a Life and Good Food Beyond Factory Farms)"의 저자이기도 하다.
나와 내 파트너 데이빗은 시간 맞춰 행사장에 도착했지만, 우리를 제외한 모두가 위층에서 열리는 예술 행사에 참여하는 동안-40분 정도 걸렸다-아래층에 앉아 시간을 때우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휠체어는 그 행사가 열리는 층으로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몇 요리사만이 저녁 메뉴-숫송아지 요리-준비를 마무리하느라 우리 주변을 바쁘게 돌아다닐 뿐이었다.
이 행사의 접근성에 대해 사전 언질을 받긴 했지만, 그곳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점점 불편감이 커져 갔다. 내 안의 장애인권 활동가가 장애인이 온전히 참여할 수 없는 행사에 참여하기로 동의한 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항의하지 않고 조용히, 휠체어에 앉아 무해하게 기다리는 내 존재가 마치 이 행사와 예술 회관에 원천적으로 박혀 있는 차별을 용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행사에 참석한 내 모습이 마치 "아냐 괜찮아, 굳이 내게 적합한 장소를 제공할 필요는 없지, 내 장애는 나의 개인적인 투쟁인 걸 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식사시간이 되어 음식이 나오자, 데이빗과 나의 소외감은 더 심해졌다. 행사장에 있는 유일한 비건 두 명으로서, 우리에게는 구운 채소가 대부분인 요리가 따로 제공되었다. 방 하나를 가득 채운 잡식인에게 내가 왜 비건이 됐는지를 설명해야 하는 입장에서, 나는 이 접시의 음식이 어떤 의미로 읽힐지 알았다. 다르고 낯선, 논비건 음식만큼 맛있지도 않으면서 쓸데없이 더 많은 일거리만 만드는 음식. 나는 완전히 혼자라는 감각과 함께 토론에 임하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가시적 장애가 있는 사람일 뿐만 아니라, 데이비드를 제외하곤, 비육식을 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마이클 폴란
Michael Pollan은 "잡식인의 딜레마
The Omnivore's Dilemma"에서 채식하는 동안 "미묘한 소외"가 가장 힘들었다고 썼다. 음식에 대해 글을 쓰는 사람은, 종종 자신이 윤리적 가치를 위해 얼마만큼의 사회적 고립감을 마주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판단하는 일에 놀라운 양의 에너지를 투자한다. 많은 유명 잡지 및 신문 기사들이 이미 채식, 혹은 비건을 하며 겪는 "어려움" 혹은 사회적 낙인- 눈을 굴리거나, 놀리거나, 경멸하는 시선- 등을 다뤘다. 조나단 사프란 포어
Jonathan Safran Foer는 "음식에 대해서는 특히, 우리 주변 사람에게 맞춰 행동하려는 강한 욕구가 생긴다"고 한다. 이러한 글들이 채식 경험을 어떻게 주변화하는지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채식 혹은 비건을 하기로 결심한 사람이 여러 어려운 문제에 직면하는 건 사실이다. 가령, 양질의 신선한 음식을 구할 수 없는 저소득층의 현실, 그리고 그런 저소득층 거주 지역에는 주로 유색 인종이 거주한다는 사실, 채소나 과일보다는 고지방 동물성 식품과 식단을 장려하고 보조금을 지급하는 정부정책 등을 예로 들 수 있겠다.
하지만, 대다수의 글은 이러한 심각한 구조적 문제를 짚기보다는 고기와 동물성 식품을 거부할 때 마주하는 어려움을 한 사람의 매우 개인적인 정상성 문제와 수용 능력 문제 쯤으로 치부한다. 현대 미국 문화는 동물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그린다. 동물권 활동가를 광신도나 인간 혐오자, 심지어는 테러리스트로까지 묘사한다. 채식인과 비건은 냉소적이고, 히스테릭하고, 감성에 도취해 있거나, 음식에 관해 신경질적인 사람으로 비춰진다. 심지어 채식 음식조차 이와 같이 묘사되는데, 가령 고기 대체 식품은 자주 연구실 혹은 과학 실험 이미지 따위로 재현된다. 고기를 미국의 전통음식으로 간주하며 동물 단백질 대체 식품을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재현하는 행태는 미국인 정체성("진짜" 미국인은 진짜 고기를 먹는다)을 강화하는 동시에 타 문화를 이국적
exotic인 것으로 타자화 한다. 하지만, 동물을 먹지 않는 이의 비정상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건 어쩌면 인기 비건 팟캐스트이자 책의 이름 “비건 괴짜
Vegan Freak"일지도 모른다. 이 제목은 얼마나 많은 비건이 주류 문화가 자신을 괴짜
Freak로 바라본다고 느끼는지 보여준다.
나는 채식을 하거나 비건으로 살기가 어렵지 않다고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나는 여러 작가의 저서를 포함한 미디어가 채식인 및 비건의 삶이 괴상하다는
enfreakment 시각을 강화하는 데에 일조한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동물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타자화 당하는 일에 이미 익숙하다. 다이엔 비어스
Diane Beers는 "잔혹함의 방지를 위하여: 미국의 동물권과 동물권 운동의 역사와 유산(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he History and Legacy of Animal Rights Activism in the United States)"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몇몇 19세기 후반 의료진은 이러한 이상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진단 가능한 정신 질환을 지어냈다. 이 갈 곳을 잃은 영혼에겐 슬프게도 '주필사이코시스
zoophilpsychosis'가 있다고." 비어스는 주필사이코시스(동물에 대해 과도하게 우려하는 질환)는 "보다 병에 취약한" 여성이 진단받을 확률이 더 높았다고 한다. 영국과 미국의 초기 동물권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은 대다수 여성이었기 때문에, 이런 비난은 인간 여성과 비인간 동물 모두에 대한 예속을 굳건히 하는데 기여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였다면, 역사가 보여주듯, 나이먼과 나는 이런 주제에 대해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하도록 초청받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 둘 다 여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이먼과 나는 둘 다 백인이기도 하다. 이는 동물 윤리 담론 속에서 인종 차별이 아직도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비록 역사적으로 동물권 운동을 하는 이의 대다수가 중상층 그리고 상류층 여성이었지만, 여성이 지도직을 맡는 것은 194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야 가능해졌다. 유색 인종
People of Colour은 지도직은 차치하고서 담론에 참여할 기회마저 협소했다. 이러한 가부장제와 인종차별의 역사가 동물 윤리, 지속 가능성, 그리고 식량 정의에 관한 대화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안타깝게도, 전혀 놀랍지 않다
작년에 캐럴 제이 아담스
Carol J. Adams, 로리 그루엔
Lori Gruen, 그리고 에이 브리즈 하퍼
A. Breeze Harper가 뉴욕 타임스에 항의 편지를 썼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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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스가 육식을 정당화하는 가장 훌륭한 논리를 가리는 대회의 심사 위원을 오직 백인 남성 다섯으로만 구성한 것에 대한 항의였다.
동물권 관련 주제로 학회와 출판 기회, 그리고 언론의 관심을 반복적으로 받는 이들은 백인 남성들이다. 아담스, 그루엔, 그리고 하퍼는 "동물을 먹는 것에 대한 윤리적 논의는 '정상'으로써 작동해온 성차별과 인종차별로 점철되어 있다"고 말했다.
장애와 장애인 역시 이러한 담론에서 배제됐고, 장애인 차별
Ableism 역시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취급돼 왔다. 장애인 공동체는 동물권 공동체와 어려운 관계를 맺어 오긴 했다. 지적 장애가 있는 일부 사람의 인간성을 부정해도 된다고 말한 철학자 피터 싱어
Peter Singer의 주장에 관한 토론이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덜 극단적인 예를 들어봐도, 이 운동이 건강과 신체 단련에 갖는 집착 때문인지, 아니면 교육과 운동 행사의 접근성에 대한 인식 부족 때문인지, 장애인 전반과 장애인 개인에게 영향을 끼치는 다양한 문제는 동물 복지와 지속 가능성 운동에서 배제됐다.
위층으로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아래층에 앉아 토론이 시작하길 기다리고 있던 내 신체와 내 음식에 대한 선택은, 둘 다 ‘괴짜’ 같았다. 나는 마이클 폴란을 비롯해 "식탁 친교(table fellowship)"를 말하는 작가와 음식을 중심으로 맺는 다양한 관계와 유대를 생각했다. 폴란은 당신이 채식인인 경우, 이런 유대관계를 쌓기 어렵다고 말한다. 내가 만약 다른 손님들과 숫송아지의 일부를 함께 먹었다면 이곳에서 소속감을 느낄 수 있었을까? 폴란은 자신의 채식 시도에 대해, “다른 사람은 이제 나를 배려해야 하고, 나는 이것이 불편하다: 나의 새롭고 제한적인 식단이 손님과 집주인 사이의 관계를 파탄 낸다"고 말한다. 폴란은 이제 "배려" 받아야 해서 "불편하다"고 한다. 이 낯선 경험에 대한 고백은 그의 특권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사회의 편안함에 균열을 내고 적합한 대우를 요구하는 일은 장애인이 늘 마주해야 하는 현실이다. 친구가 가고 싶어 하는 식당을 가야 하나? 계단이 있어서 내가 그에게 들려 가야 하는데? 포크를 입에 물고 밥을 먹어도 될까? 혹은 포크 없이 먹어도 될까? 아니면 “동물처럼” 먹기를 피하고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도록 손에 포크를 들고 먹어야 할까? 우리가 쏠리는 시선을 감내해 가며 이 공간에 점철된, 사람들이 인지하도 못하고 행하는 장애인 차별을 지적해야 할까?
장애가 있는 많은 개인에게, 다른 이에게 불편을 끼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수호하는 것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공손한 태도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폴란은 애초에 모두가 식탁까지 올 수 있다고 전제한다. 나는 내가 이야기할 청중을 바라보며 이 식탁까지 오지 못한 존재들을 생각했다. 동물 윤리와 지속 가능성 담론에서 장애, 인종, 젠더, 혹은 소득 때문에 지워지는 존재들. 사프란 포어는 자신의 저서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 (Eating Animals)"에서 간단한 질문을 던진다. “나는 사회적으로 편안한 상황을 만드는 것, 그리고 사회적 책임감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을 각각 얼마만큼 중요시하는가?”
많은 면에서, 나이먼과의 대화는 여느 비건과 인도적 축산 지지자 간의 대화처럼 흘러갔다. 우리는 비거니즘과, 지속 가능한 잡식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과, 비건 식단이 정말로 "건강한" 식단인지를 논했고,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왜 동물이 인간으로부터 도축되지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 갈 권리가 있는지 이야기했다. 나이먼과 나는 공장식 축산의 잔혹함에 열성적으로 동의했고, 동물이 생각하고,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능력이 있고, 관계 맺는, 자각 능력을 가진 동물이라는 점에도 동의했다. 하지만 나이먼이 인도적으로 동물을 죽이고 먹을 수 있다는 주장을 했을 때, 나는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인도적 축산을 정당화하는 논리는 종차별적일 뿐만 아니라 장애 차별적이다.
토론 시간이 한 시간뿐이라, 나는 동물 문제와 장애의 연관성을 이야기하기 불가능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접근 불가능한 공간에 있는 동안, 나는 이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고 결심했다. 내 능력이 허락하는 한 장애와 동물 문제를 이야기해야 한다고, 그럼으로써 이곳에서 내가 경험한 배제가 고려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위해, 내가 (정치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장애의 모델을 대표해서라도 발언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토론을 하며 나는 장애인이자 장애학 연구자로서 나의 관점이 어떻게 동물에 대한 시각에 영향을 끼치는지 설명하려고 했다. 나는 장애학이라는 분야가 어떻게 동물 윤리 담론에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지 말했다. 정상성과 자연, 가치와 효율, 상호 의존과 연약성, 그리고 권리와 자율성에 대한 이해가 이 분야에 어떻게 중요한지 설명했다. 신체적으로 자립할 수 없고, 연약하며, 상호 의존해야 하는 사람의 권리를 지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사람, 혹은 권리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의 권리는 어떻게 지켜낼 수 있을까?
나는 자연적인 것과 정상성의 제한적 해석이 어떻게 장애인과 동물에 대한 억압을 견고히 하는지 설명했다. 매년 인간의 소비를 위해 살해되는 백억의 동물 중 다수는 말 그대로 장애를 가지도록 생산된다는 것을. 가축은 좁고, 더럽고 비정상적인 환경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장애를 가지게 될 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장애를 가지게 되도록’ 폭력적으로 조작된다. 소의 젖은 몸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젖(우유)를 생산하고, 칠면조의 가슴은 자기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닭은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부리가 잘린다. 심지어 나의 질병인 관절 굽음증(arthrogryposis) 역시 공장식 축가에서 지나치게 잦은 빈도로 발견되어 쇠고기 잡지(Beef Magazine) 2008년 12월호의 주제가 된 바 있다.
어떻게 동물이 장애인과 동일한 이유로 열등한 존재, 소중하지 않은 존재로 여겨지는지. 무능력하고 부족하며 다르다는 이유로, 동물들은 명백하게 비장애인 신체에 특권을 부여하는 이 사회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상적으로 여겨지는 비장애인 신체의 기준은 우리가 동물에게 가하는 잔혹함을 정당화는 근거로도 작동한다. 장애인 차별을 정당화하고, 비장애에 특권을 부여하는 "정상" 신체는 비-장애(non-disabled)일 뿐만 아니라 비-동물(non-animal)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장애학에 대해 나눌 수 있는 내용을 나누려고 했다. 장애학은 신체와 지적 능력에서 벗어나 인간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을 제시한다는 점 말이다. 장애학 학자들은 우리의 가치와 존엄성이 우리의 지능, 합리성, 민첩성, 신체적 자립, 혹은 직립 보행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삶이란 그 자체로 살아갈 가치가 있으며,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여겨져야 한다고 말한다. 당신이 다운 증후군이 있는 사람이든, 뇌성마비가 있는 사람이든, 사지 마비가 있는 사람이든, 자폐증이 있는 사람이든, 혹은 나처럼 관절 굽음증이 있는 사람이든, 살아갈 가치가 있다고. 장애인권이, 장애가 있는, 합리성이나 신체의 자립과 같이 사회가 중요시하는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의 권리 보장을 요구할 때, 그건 비인간 동물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까?
토론이 끝나고 패배감이 엄습했다. 동물권 때문이 아니라 장애인권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내가 대표한 장애 정치를 오해할 것 같았다. 인간 동물이자 비장애인인 자신의 특권을 곱씹어보기보다 내가 내 장애를 이용해 동물권을 옹호한다고 생각할 것 같았다. 내게 발언한 첫 사람은 자신이 지적 장애가 있는 아이의 어머니라고 소개했다. 그는 한 편으로는 나에게 감명받은 듯했고 (나를 장애 극복 서사 속 슈퍼 장애인으로 보는듯)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구해주고 싶은 듯했다. "이건 당신의 명분에 도움이 안 돼요," 그는 반복해서 말했다, "자신을 동물과 비유하지 않아도 돼요." 어떤 면에서는 이 여성이 왜 이렇게 말했는지 이해했다. 지적 장애가 있는 개인은 싱어와 같은 부류의 동물권론자가 내세우는 담론으로부터 좋은 대접을 받지 못했다. 철학자 리시아 칼슨(Licia Carlson)이 말했듯이 “우리가 이 개념의 악용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현재 철학 담론 내 지적 장애 배제를 생각한다면, 이 담론에서 '지적 장애인'에게 배정된 역할을 비판적으로 재고해야 한다." 나는 내가 스스로를 비인간 동물에게 빗댄 게 아니라, 우리가 겪는 공통된 억압이 있음을 설명한 것이라고, 두 억압을 비교한 것이라고 말했다. 장애인과 비인간 동물은 비슷한 억압을 경험한다. 물론 우리는 결국 모두 동물이기에, 내가 나를 동물에 비유하는 것이 꼭 부정적인 의미인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의 아이를 동물의 상황에 비유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고, 그 둘은 무관하다고 했다. 자신의 아이는 동물이 아니며, 내가 만든 이 연결고리는 나와 나를 포함한 다른 장애인들에게 부당하다고 말했다. 그는 만약 내가 비장애인이었다면 내게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나를 위해 슬퍼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내가 장애 자긍심과 자신감이 떨어져서, 나를 동물 이상으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듯이.
만약 내가 내 몫을 요구했다면 어땠을까? 사회의 예의범절에 따라 다른 사람의 편안함을 고려하지 않고, 내게 적합한 공간 제공을 요구했다면 장애가 있는 인간으로서 나의 자존감이 다르게 비쳤을까? 만약 내가, 행사장에 접근할 권리를 주장하며 행사장에 왔다면, 내 신체에 대한 나의 자존감이 만천하에 드러나서, 동물과 나의 관계에 대한 설명도 내 장애에 대한 긍정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졌을까? 아마도 내 그런 행동은 행사 진행을 방해하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당한 공간을 요구함으로써, 나는 다른 종류의 대화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공간에서 경험한 접근 불가능성은 그날 나의 언어를 조각했고, 동물과 장애에 대한 억압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치부하여 지우는 다양한 관습에 초점을 맞추게 했다. 숫송아지는 저녁으로 먹히기 위해 준비돼야 하고, 장애가 있는 사람은 아래층에서 기다려야 하는 그런 관습.
필자 소개
수나우라 타일러
Sunaura Taylor. 타일러는 예술가, 작가, 그리고 활동가이다. 타일러의 작품은 CUE 예술 기관, 스미소니언 예술 협회, 버클리 미술 박물관을 포함하여 미국 곳곳에 전시되었다. 그는 조안 미첼 재단의 예술 지원금, 동물과 문화 지원금 등 많은 상을 수상했다. 타일러의 작품은 다양한 전집에 수록되어 있고, 월간 리뷰
Monthly Review, 예스 매거진
Yes! Magazine, 아메리칸 계간지
American Quarterly
, 그리고 퀴 파를레
Qui Parle
등의 출간물에도 수록되었다. 타일러는 철학자 주디스 버틀러와 함께 아스트라 타일러의 영화 “성찰하는 삶
Examined Life”(2008)의 작업에도 참여했다(한국에서는 출판사 ‘이후‘
를 통해 “불온한 산책자”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타일러의 책 “짐승의 책무
Beasts of Burden”는 동물 윤리와 장애학의 교차성을 다루며, 2017년 더 뉴 프레스
The New Press에서 출간 되었다. 타일러는 현재 뉴욕대학교 문화 사회 분석 학과에서 미국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
역자 소개
소현. 안녕하세요!! 소현입니다!! 잘 읽혔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한유리. 원래 번역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좋은 뜻으로 시작했지만 끝내 실패한 설득을 좋아합니다. (><)
*이 글은 저작권자의 동의를 얻어 다음의 원문을 발췌 번역한 것이다. “
Vegans, Freaks, and Animals”, 2015,
https://humanrightsareanimalrights.com/2015/01/26/sunaura-taylor-vegans-freaks-and-animals/
각주
1. 캐롤 제이 아담스
Carol J. Adams는 “육식의 성정치: 페미니즘과 채식주의 역사의 재구성 (The Sexual Politics of Meat: A Feminist-Vegetarian Critical Theory)”를 쓴 미국의 페미니스트이다. 로리 그루엔 Lori Gruen은 동물 윤리와 페미니즘, 젠더, 섹슈얼리티를 연구하며, 그의 저서로는 “윤리와 동물 (Ehtics and Animals: An Introduction)”, “연루되는 공감 : 동물과의 관계에 대한 대안적인 윤리 (Entangled Empathy: An Alternative Ethic for Our Relationships with Animals)”이 있으며, 미국의 실험에 희생된 최초의 백 마리의 침팬지를 기억하는 웹사이트 “TheFirst100 (
first100chimps.wesleyan.edu)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에이 브리즈 하퍼
A. Breeze Harper는 흑인 비건 페미니스트의 글을 모은 앤솔로지 “씨스타 비건 (Sistah Vegan)”을 편집한 흑인 비건 페미니스트 여성이다. 그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다음의 링크를 참조하라. (
https://www.facebook.com/abreezeharp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