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 맞은 ‘D’에 관한 세미나 : 《보잭 홀스맨》과 ‘할리우’




이동휘



들어가며: 말장난과 ‘리얼함’




  리뷰를 더 심오하게 시작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애니메이션 시트콤 《보잭 홀스맨》1의 클로징 사운드트랙만큼 이 작품을 투명하게 드러낼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짧은 노래는 《보잭 홀스맨》과 주인공 보잭의 기본적인 특징들을 농축한다.

“90년대 시절 나는 아주 유명한 TV쇼에 나왔어 (아아-) / 나는 보잭이라는 말(보잭!), 보잭이라는 말이라네, 모르는 척 하기는 / 나는 계속 과거에 기대보지만 너무 오래 전이야, 계속 잘나갈 순 없겠지 / 그저 나는 알려주고 싶었어 / 나는 인간보단 말에 가까워, 아님 말보단 인간에 가깝나 (보잭!)”

  먼저 보잭 홀스맨은 홀스-맨, 그러니까 사람이면서 동시에 말이다. 보잭 말고도 《보잭 홀스맨》에는 여러 종의 개, 고양이에서부터 곤충, 어류, 갑각류, 절지동물에 이르는 온갖 생물들이 인간 행세를 하며 등장한다. 이 기이한 ‘멜팅팟’ 속에서 인물들은 얼굴만 동물인 ‘인간’이 아니라, 동물로서의 습성을 적극적으로 유지하는 ‘동물-인간’으로서 살아간다. 예컨대 말(보잭)은 많이 먹고, 개(Mr.피넛버터)는 초인종 소리와 공놀이에 흥분하며, 고양이(프린세스 캐롤린)는 그루밍한다.



(왼쪽부터) 다이앤 응우옌, 토드 챠베즈, 보잭 홀스맨, 프린세스 캐롤린, Mr.피넛버터


  한편, 보잭은 이젠 한물간 50대의 셀러브리티로, 자기 과거에 우스꽝스러울만큼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는 언제나 스스로를 “90년대 시절 아주 유명한 TV쇼에 나왔”던 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이 궁상스러운 주책은 물론 때이른 성공이 남긴 부산물이지만, ‘잘나갔던’ 어제가 ‘계속 잘나가는’ 내일을 보장하지 않는 업계 사정 때문이기도 하다. 보잭의 경우, 비수기에 들어선지 어느덧 18년째이다.

  하지만 이 노래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것이 보잭의 자기소개와 하찮은 상념을 얼마나 너절하게 늘어놓는가 하는 점이다. 너무 너절한 나머지 기계적인 라임을 제외하면 어떤 ‘예술’이나 ‘깊이’의 흔적을 찾기 힘든 노래, 클로징이라는 기능만 할 뿐 이렇게 대놓고 진부한 노래—이런 노래를 우리는 《보잭 홀스맨》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가령 80년대 풍의 노래랍시고 나오는 <80년대 풍의 뉴웨이브송generic 80s’ New-Wave Song>을 보라. 이 노래는 시트콤에서 그 시대’스러운’ 배경음악이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생산, 배치된다.2 이런 너절함 혹은 얄팍함은 노랫말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홀스맨’과 같은 무성의한 작명부터 상당수의 대사들까지 《보잭 홀스맨》이 사용하는 언어는 거진 즉각적 목적만을 충족하는 단어의 나열이다. 스토리도 이와 매한가지여서, 이 시트콤은 이상할 정도로 낙관적인 공상, 마약이 일으키는 싸이키델릭한 환각, 제정신이라면 저지르지 않을 외설적인 기행을 좀처럼 자제하지 않고 이어붙인다.

  그러니까 노래, 대사, 플롯 어디를 살펴보아도 《보잭 홀스맨》은, 마치 보잭 왕년의 대표작 제목처럼, 말장난으로 가득하다. 농담n을 농담n+1로 이어가는 피상적 무한수열 속에서 이 반인반수 코미디는 핍진성이랄지 현실감이랄지, 어쨌든 ‘리얼함’이라고 할만한 것을 박멸하는 데 몰두하는 듯하다.

  하지만 《보잭 홀스맨》은 분명 언어유희를 넘어서는 ‘심각함’을 지니고, 그것이 보는 이의 감정을 건들기도 한다. 이건 다이앤 응우옌을 연기한 앨리슨 브리의 소회이기도 한데,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보잭이 심각하고 현실적(serious and real)이기에 사람들이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3 많은 리뷰들이 이 방대한 시트콤에 담긴 ‘실존의 철학’4, 엔딩의 의미5 뿐만 아니라 각 주•조연의 개별 서사에까지 열렬히 주목한 이유도 그 속에 담긴 어떤 ‘리얼함’ 때문일 것이다.

  《보잭 홀스맨》에 어떤 뭉근한 감동이 있음을 나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시트콤의 ‘심각하고 리얼한’ 고갱이로부터 감동을 추출할 때,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경박하고 인위적인’ 껍데기는 어디로 가는가?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보잭 홀스맨》의 껍데기, 그러니까 그 어처구니(-없음)에 대해서이다. 그러다 보면 이 작품 어딘가 있을지 모를 의미에 대해서도 비로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1. 도둑 맞은 ‘D’

  《보잭 홀스맨》의 배경은 할리우드 연예계이다. 스타와 기획사, 시사회와 파티로 가득한 이 도시에 대해 이 신랄한 코미디는 냉소와 과장 섞인 비판을 펼친다. 할리우드 연예산업의 허위와 추잡함과 상업성에 대해……아니 잠깐, 여기 할리우드(hollywood)가 아니라 ‘할리우(hollywoo)’ 아니었나?

  《보잭 홀스맨》의 배경이 ‘할리우’인 이유는 간단하다. 다름이 아니라 ‘HOLLYWOOD’ 입간판 중 맨 끝의 D가 도난된 것이다. 그러니까 ‘할리우드 산업을 비판하는 《보잭 홀스맨》’이라는 분석은 다소 부정확하다. 왜냐하면 그곳이 할리우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 할리우드와 아주 조금 다른 이 ‘할리우’는 어떤 곳인가? ‘할리우’에서는 사소한 말썽도 모두의 방임 속에서 그 여파를 무한으로 증폭한다. 그러니 비유컨대 ‘할리우’는 요지경의 세계이다. 혹은 보잭의 친구 ‘토드’가 참여했던 즉흥연기의 규칙으로 말하자면 질문도 거절도 없이 “무조건 네(yes and...)”해야하는 세계이다(S2 E10).9 좀 더 친숙한 우리 말로 해보자면, ‘막 이래’의 세계는 어떨까?

  말을 만들자면 끝이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할리우’의 가장 큰 특징은 글자 그대로 ‘D가 없다’는 점이다. ‘할리우’를 이해하려 할 때 우리는 외면할 수 없다. ‘D’라는 도둑맞은 글자(the purloined letter)를 말이다.




'할리우'와 'D'




  간판 ’D’가 도둑맞는 것은 첫 번째 시즌에서이다. 금방 제자리로 돌아올 듯하던 ‘D’는 그것을 운반하던 헬리콥터가 추락하는 바람에 아예 파괴된다. 그렇게 간판 ‘D’는 쭉 없는 채로 남아있다가, 마지막 시즌 최종화에 가서야 복원된다. 그런데 베일을 걷어보니 웬걸, 복원된 간판은 ‘D’가 아니라 ‘B’이다(“Hollywoo…B?!”). 그러니 ‘D’는 돌아오지 않고 ‘할리우’는 여전히 ‘할리우’이다.




D 복원 기념 기자회견을 여는 Mr.피넛버터



  한편, 보잭은 이와 무슨 상관인가? 보잭은 바로 할리우드에게서 D를 훔친 자(robber)이면서도 또 다른 '할리우’ 라이벌에게 다시 D를 도둑맞은 자(loser)이다. 달리 말해 보잭은 할리우드를 되돌릴 수 없이 훼손함으로써 ‘할리우’를 창조하고 영속화시킨 장본인이다.

  보잭이 간판 ‘D’를 훔친 이유는, 그의 자서전을 써줄 유령작가 다이앤(Diane)를 두고 Mr.피넛버터와 경쟁하며 펼친 유치한 애정공세에 있었다. 보잭이 술에 취해 그 거대한 간판을 자기 뒷마당으로 훔쳐올 때, 그는 다이앤 즉 진짜 ’D’에 대한 그의 커다란 애정을 증명하려던 것이다. 이때 간판 ‘D’는 진짜 ‘D’에 대한 욕망이 기입된 기호였다. 하지만 정작 다이앤은 이미 Mr.피넛버터와 공개연애 중이고 보잭에겐 솔직해질 용기가 없다. 그렇기에 술에서 깨자마자 간판D는 의미 없는 고철덩어리로 전락한다.

  그런데 이 맥없는 도둑질 다음날, ‘D’는 예기치 않은 일에 휘말린다. 당연하게도 온 할리우드가 ‘D’의 행방을 묻기 시작했으므로 보잭은 이 간판을 다이앤을 포함하여 도시 전체로부터 숨겨야만 한다. ‘D’는 커다란 골칫거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때 Mr.피넛버터는 보잭의 뻔한 속내를 꿰뚫어보고—사실 보잭이 모두 말하기 때문에 꿰뚫을 것은 없지만—, 자기 여자친구에게 그만 집적거리면 ‘D’를 함께 없애주겠노라고 제안한다. 그리하여 두 동물은 탁자에 앉아 지도와 장난감들로 보잭의 집을 꾸며놓고 회의를 시작한다.






-Mr.피넛버터 : 군인(장난감)은 경찰인 거 알겠는데 이 겨자소스는 뭐야?
-보잭 홀스맨 : 그건 그냥 겨자소스야. 점심 먹고 남았어.
-아, 그럼 그냥 치우면 안돼?
-싫어, 또 먹을지도 몰라.

  이 대화는 좀 바보 같다. 보잭이 ‘상징물’과 ‘실제 사물’의 구분을 거부하면서 실제 세계와 상징의 세계 사이에 혼동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유사한 방식의 거부-혼동이 이 에피소드에서 한번 더 등장한다. 이윽고 ‘D’를 헬리콥터로 바다에 버리자고 결정한 뒤, 사람들의 관심을 따돌린 보잭이 진중한 목소리로 무전을 친다—‘Take her home.’ 그런데 웬걸, Mr.피넛버터는 이 말에 약속된 내용을 전혀 모르는 양 뻔뻔하게도 간판 ‘D’를 제 집(home)으로 가져간다. 그리고 기자회견을 열어 온 ‘할리우’에 발표해버린다—‘D는 제가 훔쳤습니다. 바로 제 여자친구 다이앤을 위해서요!’ 보잭은 눈 똑바로 뜨고도 간판‘D’와 거기에 ‘아무도 모르게’ 기입해둔 자기 욕망까지 한꺼번에 빼앗긴 것이다.

  이처럼 보잭은 자꾸만 글자와 문장 뒤에 비밀을 숨겨두려 하지만, 마치 말[馬] 옆에 놓인 겨자소스처럼, 뜬금없이 ‘글자 그대로’의 차원으로 끌어내려진다. 이로써 그는 자기가 훔치려던 ‘D’를 무력하게 빼앗기고 도둑에서 도둑맞은 자/패자(loser)로 전락한다. ‘집으로 가져가라’고 말한 건 보잭 자신이었으니 더욱 꼴이 우습다. 그 말이 그가 알던 의미를 가지리라 믿은 그가 순진했던 것일까?





2. ‘할리우’라는 원점

  ‘D’를 훔치고 또 다시 도둑맞는 이 소동은 포우의 추리소설 『도둑 맞은 편지』 속 첫 번째 절도사건을 상기시킨다. 잘 알려져 있듯 등장인물은 왕, 왕비, 그리고 D대신이다(하필 D인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규방에 있던 왕비는 비밀 편지를 받는데, 마침 들어온 '왕’에게 보이지 않도록 그것을 급히 탁자 위에 뒤집어 두었다. 다행히 왕은 눈치를 채지 못한 듯하다.

  그런데 왕과 달리 마침 방에 들어온 대신은 왕비의 비밀을 짐작하고는 뻔뻔스러운 손놀림으로 편지를 집어간다. 대신은 왕비가 도둑질을 목격하고도 왕의 주의를 끌 것이 두려워 감히 자신을 멈추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공개되어서는 안 될 이 편지의 비밀을 볼모로, 대신은 왕비의 권력을 무단으로 휘두른다. 왕비의 손발은 내내 묶여있다.6 몰래 차지한 D를 빼앗기고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보잭은 왕비와 사정이 같다.

  도둑 맞은 편지(letter)가 다행히 왕실의 평화를 (적어도 아직은) 해치지 않듯, 할리우드 또한 글자(letter)의 실종 앞에 의연하다. ‘할리우’가 ‘할리우’인 이유가 보잭이 D를 훔쳤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그건 모두가 그곳을 그냥 줄곧 ‘할리우’라고 불러버린 덕분이기도 하다. 심지어 연예뉴스채널 ‘모닝타임 할리우드’는 ‘모닝타임 할리우’로 바뀌는데, 이처럼 할리우드는 이 소동을 아무 저항 없이 수용한다. 마치 그곳이 언제나 ‘할리우’였던 것처럼 말이다.

  여기 그치지 않고 ‘할리우’는 Mr.피넛버터의 러브스토리에 매혹되어 그것을 영화화하기로 결정한다. 이중으로 허구적인—애초 거짓인 러브스토리를 픽션으로 제작한다는 점에서—그 황당한 영화에서, Mr.피넛버터의 역으로 캐스팅된 것은 하필 보잭이다. 설상가상으로, 타란튤라 영화감독 ‘쿠엔틴 타란튤리노’는 영화적 몰입을 위해 모든 스탭으로 하여금 보잭을 ‘Mr.피넛버터’라고 부르게 한다. P가 B의 간판을 훔치더니, 이제는 B가 P의 자리로 다시 불려가는 이 끝없는 자리바꿈이 거듭되며 결국 아래와 같은 부조리한 대화에 이른다.


-쿠엔틴 타란튤리노 : (빵을 들고) 피넛버터[땅콩버터]는 어디 있지?
-Mr.피넛버터 : 여기 있어요.
-아니, 피넛버터 어딨냐고.
-보잭 말이예요?
-그러면 보잭이라고 했겠지!
-‘보잭 홀스맨’의 역을 맡은 폴 지아마티 : 누가 보잭 찾았어요?





  「도둑 맞은 편지」에서 첫 번째 사건 즉 편지의 도난은 두 번째 사건을 호출한다. 이번에는 탐정 듀팽이 대신의 저택으로 찾아가 그가 숨겨둔 편지—경찰총감이 지금껏 찾지 못한—를 다시 훔쳐와야만 한다(듀팽이 Dupin인 것도 물론 우연이다). 이 두 사건 중 첫 번째 사건은 “원초적 장면(primal scene)”이라고 일컬어지는데, 이는 뒤따르는 “장면”에서 세 인물들의 자리바꿈 속에 동일한 도둑질이 반복되기 때문이요, 또 반복의 중심에 편지의 부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7

  이와 동일하게, 보잭이 D를 빼앗기는 에피소드는 ‘1루수가 누구야’ 류의 고전적인 교란과 그 속에서 ‘D’가 사라지는 이야기이다. 이뿐만 아니라 《보잭 홀스맨》 전체를 이루는 이후의 소동들은 오해에 뒤따른 도둑질/패배(losing)라는 유사한 구조를 공유한다. 그러므로 ‘D’의 도난은 이 작품에서 내내 반복되며, 그러한 반복의 원점 a0에 놓인 것은 도둑 맞은 ‘D’의 세계 즉 ‘할리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S1 E6의 제목처럼 말할 수 있다—‘우리의 이야기는 D스토리이다.’ 혹은 D스토리는 다름 아닌 《보잭 홀스맨》의 원초적 장면이다.





3. ‘D’의 비극

  대화가 미끄러지면서 엉뚱한 의미가 전달된다. 슬랩스틱 같기도 한 이 말장난은 《보잭 홀스맨》에서 구사하는 코미디의 가장 믿을 만한 원천이다. 그런데 이 원천에서 솟는 것이 코미디만은 아니다. 보잭이 빠진 비극 또한 하나의 ‘D스토리'이다.



(위에서부터) 새라 린, 페니, 할리하크



  이 시트콤에서 다이앤 만큼이나 일찍부터 보잭을 사로잡고 있는 'D’는 바로 아빠(Dad)의 그것이다. 보잭은 ‘아빠 다운 아빠’가 되어도 보고(새라 린의 경우), 연인 같거나 친구 같은 ‘유사-아빠’가 되어도 본다(페니와 할리하크의 경우). 하지만 그 모든 ‘딸’에게 그는 상처나 죽음을 가져온다. 그러니까 이 글자’D’의 경우에도 보잭은 원하는 바를 획득하지 못한다. 대표작 《말-장난》이 유일한 예외인데, 보잭은 여기서 인간 청소년들을 책임지는 비혈연-모던패밀리의 아버지로 열연하며 사랑을 받았다. 그가 ‘90년대 시절 아주 유명한 TV쇼‘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의 기억 때문이다.

  그렇다, 보잭은 향수병에 걸려있다. 이 자연스러운 관찰은 그저 비유가 아니다. 그의 향수병은 말 그대로 향수라는 증상이다. 증상은 “이상하고 역겹다”뿐 아니라 반복적이기도 해서, 보잭은 환상 속에서 자주 아버지가 되곤 하지만 이윽고 그 자리에서 무참하게 쫓겨난다. 이는 꿈을 꿀 때도, 술과 약에 취할 때도, 임박한 죽음이 만들어낸 주마등(走馬燈) 속에서도 거듭된다.

  그런데 증상이라는 말에 담긴 더 중요한 뉘앙스는 ‘원인에 대한 의심'이다. 증상에 주체 외부의 원인이 없을 수 있을까? 잊을만 하면 덮쳐오는 반복적 판타스마고리아를 모두 보잭의 기벽으로 치부할 수 있겠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보잭의 반백년 인생은, 강력한 ‘아버지-형상’을 유통하고 망연히 빼앗기를 거듭해온 할리우드 현대사 안팎의 일부이다. 토드 챠베즈처럼 외쳐보자—만세! 세상의 책임! (S1 E7)



1973~2015의 보잭



  1973년,  어린 보잭은 TV앞에 앉아있다. 그는 토크쇼에 출연한 경마 영웅인 세크리테리엇에게 편지를 보내 묻는다—‘슬플 때는 무엇을 하시나요?’ 그러면 종마 세크리테리엇은 브라운관 너머 기대와 선망에 부푼 보잭에게 ‘계속 달려라, 뒤돌아 보지 마라, 누구도 끼어들게 하지 마라’ 하고 말한다. 한편 같은 해 8월 세크리테리엇은 불법 경마 도박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보잭은 이전처럼 부모의 정서적 학대 속에 홀로 남는다.

  1987년, 청년 보잭은 《말-장난》에 출연한다.8 《말-장난》의 모든 에피소드는 미혼의 가장 보잭이 막내 ‘사브리나’에게 ‘우리는 영원한 가족’이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유치원에 가라’거나, ‘언제나 지켜주겠다’라고 다정히 읊조리며 끝난다. 하지만 정작 그는 아역배우 새라 린의 고독도, 오랜 친구이자 감독인 허브 카재즈의 부당해고도 모두 외면할 뿐이다.

  2015년, 자서전으로 골든글로브(…)를 수상하여 재기에 성공한 중년 배우 보잭은 전기영화 《세크리테리엇》의 주연으로 캐스팅된다. 스포츠 영웅 세크리테리엇으로 분한 보잭은 영화 안팎에서 온 나라에 대고 연설한다—“당신은 모두 세크리테리엇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에 출연한 것은 디지털-모델링된 보잭의 CG일 뿐, 실제 보잭의 촬영본은 모두 삭제되었다.

  그러니까 《보잭 홀스맨》에서 할리우드는 보잭의 유년시절 이래로 40여년에 걸쳐 쉼없이 ‘아버지 형상’을 생산해왔다. 그러한 생산이 필요하고도 또 가능하게끔 만들어주는 전제는, 이른바 ‘제대로된 아버지’의 자리가 언제나 비어있다는 사실이다. 할리우드는 애초 존재하지 않는 그 자리에 ‘새 얼굴’을 세워두고, 그가 점차 닳아서 그 자리에서 미끄러질 때쯤 ‘뉴페이스’를 찾아 그를 기꺼이 대체한다. 할리우드가 ‘낡은 아버지’를 밀어내는 순간 제작사 간부들은 가장 근엄한 표정을, 에이전트와 연예뉴스 진행자는 가장 활기찬 웃음을 짓는다.

  그러니 다시, 이곳이 ‘할리우’인 이유는 간단하다. 이제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이다. 그곳은 말 그대로 ‘D의 추락’을 먹고 살기 때문이다. 보잭이 향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가 이 ‘할리우’에서 ‘D’를 찾으리라고 혹은 ‘D’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는 뜻이다. 그 바보 같은 향수는 증상으로 영속(永續)한다. 더구나 이제는 이 “수취 불명의” 글자를 대체 누가 훔쳤고 누가 잃어버렸는지도 불분명해 보인다.9




 
나가며

  의미를 지탱하는 나사가 어디에도 없지만, 할리우드인지 ‘할리우‘인지 하여간 이 세계는 나사 빠진 채 멈추지 않는다. 「도둑 맞은 편지」에서는 장면장면마다 편지들이 반복해서 분실되지만, 도둑 맞은 자들의 일상에는 외견상 아무 변화가 없다. 이는 도둑들이 책상 위에 대신 놓아둔 가짜 편지들 덕분이다. 그것들은 왕 혹은 대신으로 하여금 어떠한 변화도 알거나, 의심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이다. 이 가짜 편지들은 잠재적인 파국을 대충, 잠시, 그리고 성공적으로 수습한다.

  포우의 소설에서 종이’쪼가리’들이 발휘하는 이러한 힘에 관해, 라캉은 흥분에 찬 어조로 말한다. “이것이 자동반복(l’automatisme de répétition)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가 논평 중인 텍스트[「도둑 맞은 편지」]에서 프로이트가 가르치는 것은, 주체는 상징적인 것의 경로를 따른다는 것이다. (…) 타고난 재주나 사회적 경험과는 관계없이 그리고 성격이나 성과 무관하게 시니피앙의 사슬이 주체들의 행위, 운명, 거절, 무분별, 성공, 숙명을 결정하며, 심리적 소여[주어진 것]에 속하는 모든 것은 싫건 좋건 (…) 시니피앙의 대열을 따른다는 것이다.”10 보잭은 말하자면 가끔 도둑이었고, 대개 D를 찾아 헤매는 왕비였다. 하지만 ‘할리우’는 무엇보다 주로 도둑맞은 ‘D’를 수습하기 위한 허구적 상징물로서 보잭을 즐겨 호출했다.

  그렇지만 《보잭 홀스맨》은 ‘무력한 개인의 순수함을 착취하는 포디즘적 할리우드’ 따위의 일방적인 안티-할리우드 식 결론으로 빠지지 않는다. 보잭은 결국 ‘할리우’의 모든 호출에 기꺼이 응답했고, 캐스팅-촬영-홍보-시상식-파티의 사슬을 씩씩하게 따라갔다. 심지어는 그동안 저지른 잘못으로 돈과 명성을 포함해 모든 것을 포기한 이후에도, 재기의 가능성 앞에 그의 열정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여전하다(S6 E16).

  물론 달리 보면 이것은 ‘할리우’가 그의 내면을 얼마나 철저히 사로잡았는지를 보여주는 듯도 하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보잭은 가축이나 포로가 아니라 글자 그대로의 ‘할리우’를 창조한 장본인으로서, 그 세계에 선행한다. 이에 걸맞게도 그는 한 마리 야생마처럼 ‘할리우’와 질리도록 밀고 당기며 이 도시를 투명하게 체현한다. 《보잭 홀스맨》이 '진짜’ 감동을 촉발한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보잭의 투명함에 대해 느끼는 연민일 것이다. 다이앤이 보잭에게 건네는 말을 빌자면, 그는 “내가 아는 둘도 없는 쓰레기이지만, 내게 말이 되는(make sense) 유일한 자”인 것이다(S4 E7).



다이앤과 보잭



  《보잭 홀스맨》의 마지막 장면에서 보잭과 다이앤은 한동안 아무 말 없이 지붕 위에 나란히 앉아있다. 만약 우리가 그 둘처럼 멀찍이 떨어져서라도 함께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가장 옳은 사람이거나, 언제나 유쾌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보잭의 헛된 바람처럼 사실 “마음 깊은 곳은 좋은 사람”(S1 E11)이라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이 말도 안되는 세상에서 오직 ‘말이 되는,’ 고유한 삑사리에 빠진 동물-인간이라는 점에 있다. 그러니 나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아무 의미도 주장하지 못하는 말장난의 연속이기를 기대한다. 사실 우리는 그때서야 서로의 병든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비로소 진지하고 심각하게.






필자 소개
이동휘. 대학원에서 미학을 공부했다. 현재 학교에서 조교로 일하며 번역을 하고 글을 쓴다. 앞으론 편견을 둘러싼 문제들을 연구하고 싶다. (donghwilee.com)


1. 라파엘 밥워크스버그 제작, 넷플릭스 배급, 2014년 8월 시즌1 첫 방영, 2020년 1월 시즌6 종영

2. <1990년대 풍의 그런지송>, <2007년 풍의 팝송>도 있다. https://youtu.be/wlfK51tN-xo

3. <The Cast & Creators of BoJack Horseman Say Goodbye | Netflix> https://youtu.be/8kk4dsa6F5A?t=68

4. <The Philosophy of BOJACK HORSEMAN – Wisecrack Edition> https://youtu.be/rORIDYHOFTQ

5. <BoJack Horseman Ending, Explained - Then You Keep Living> https://youtu.be/z9oZKylZeCM

6. 에드거 앨런 포, 전승희 옮김, 「도둑 맞은 편지」, 민음사, 242-243쪽

7. 자크 라캉, 홍준기·이종영·조형준·김대진 옮김, 「<도둑 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 『에크리』, 새물결, 19-23쪽

8. https://bojackhorseman.fandom.com/wiki/Horsin%27_Around#:~:text=Horsin'%20Around%20is%20a%20situational,premiered%20on%20ABC%20in%201987

9. 자크 라캉, 위의 글, 39쪽

10. 자크 라캉, 위의 글, 40쪽